지나온 시절, 우리의 역사란 지금의 나 개인에게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인가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었다. 치 떨리고 아파서 차라리 깨끗하게 지워버린 기억들을 이제 와 갈피 갈피 들춰보는 게 괴로워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나물 캐고 소라 줍던 열 여섯, 열 다섯, 열 세살 소녀들을 끌고 가 군인들의 노리개로 내어준 인간들. 사죄나 사과는커녕 그 사실을 인정조차 하지 않는 인간들. 우리 아니면 바로 당신이 당했을 거라고, 우리는 희생자라고 목이 쉬도록 외치는 할머니들을 보는 게 괴로워 귀 막고 눈 감은 우리들.
그게 그리 아득히 먼 옛날의 일도 아닌 6, 70년 안쪽의 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인간이라는 존재의, 아니 나 자신의 염치 없음과 뻔뻔함에 고개를 내저을 수밖에 없다.
딸과 손녀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김윤이' 할머니. 깔끔하기 이를 데 없는 할머니는 낯선 사람 만나는 일을 병적으로 싫어해 그 누구와도 교류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나마 말을 걸고 잘 따르는 건 대학생인 외손녀 '지나'뿐이다.
어느 날 지나가 한국 할머니 두 사람을 모시고 온다. '박순자' 할머니와 '이복희'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당했던 모진 고통을 낱낱이 까발리며 일본을 전 세계에 고발하러 미국에 온 것.
그러나 할머니는 자신의 오빠가 일본군에 징용되었다가 세상 떠난 사실을 알고 탄원서에 서명을 받으러 온 두 할머니를 상대하려 하지 않는다. 다 지나간 일 잊고 살라고 하면서, '나라에서도 당신들을 부끄러워하는 데 왜 이러고 다니냐'며 오히려 설득하려 든다.
그런데 이상하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온 두 할머니가 위안부로 겪은 일들을 털어놓으니 거의 발작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그러던 중에 이복희 할머니의 머릿속에 오래 전 일본의 한 위안소에서 만난 소녀가 떠오르고, 자신과는 달리 일본군 장교 한 사람만을 상대하던 소녀 '하나코'와 김윤이 할머니의 얼굴이 겹친다.
김윤이 할머니의 등에 새겨진 시커먼 문신이 진실을 드러내주지만 할머니는 도무지 기억해낼 수가 없다. 그건 문신이 아니라 뜸 자국이며, 자신은 일본에 간 적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머니의 강요로 억지로 지워버린 기억,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다. 가슴 저 밑바닥에 꽁꽁 묻어두어 평생 드러날 것 같지 않았던 기억이 섬광처럼 드러나면서 진실과 마주한 할머니. 할머니의 괴로움은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급기야는 삶과 죽음을 넘나든다.
죽은 듯 누운 할머니를 일으켜 안으며 손녀가 간절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한다.
"이제 내가 할머니예요!"
자신이 나서서 진실을 밝히고 널리 알리고 싸우겠다는 뜻. 아,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 인정하는 일은 이렇듯 커다란 동지 의식과 공감과 앞으로 함께 걸어갈 방향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하루에 스무 명에서 많게는 사십 명까지 상대하는 '이동식 공중변소'였고, 인간이 아닌 '군수물자'로 분류됐다고 말하는 할머니들은 자신이 겪었던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진실과 마주서는 것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죽고 싶었지만 너무 어려서 죽는 게 무서웠다'는 고백은 그래서 차라리 통곡보다 더한 슬픔이며 아픔이다.
45석 정도 되는 작은 극장 안은 중년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연극 초반부터 훌쩍이는 소리가 계속되었던 것은 우리의 어머니 세대에 있었던 일들을 어쩌면 이리도 몰랐고, 알고도 그냥 넘겼고, 누군가 나서서 하겠거니 하고 방기한 죄송함 때문은 아니었을지...
억울하고 원통한 할머니들의 짐을 우리가 기꺼이 나눠져야만 그분들이 다 늦게 지금이라도, 혹은 이미 저 세상에 가셨다 할지라도 '나비'로 훨훨 날 수 있지 않을까. 연극은 그렇게 진실을 간곡하게 호소하면서 대학가 술집 골목 지하에서 작지만 무게 있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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