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영원한 제국>은 정조에 대한 이야기다. 소설은 정조가 독살됐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남인들의 시각이다. 정조 이후 남인들은 노론에 밀려 정권에서 사실상 퇴출당했다. 그들이 다시 정치권에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5.16 쿠데타 이후였다. 정조가 죽은 것이 1800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 1961년이다. 그러니깐 남인들은 장장 160여 년 동안 반도의 아래 귀퉁이(영남)에 밀려나 있었다.
26년 만에 빼앗긴 승리를 되찾은 DJ
쿠데타로 집권하기는 했으나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겐 믿을 만한 세력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엄민영이란 사람이 TK인사 결집을 권했다고 한다. 이상우가 쓴 <제3공화국>에 나오는 설명이다.
박정희가 고향 사람들을 발탁하기 시작하면서 영남 남인의 후예들을 끌어 들였다. 실로 오랜만에 남인이 TK세력이란 이름으로 부활한 것이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소외된 탓인지 그들은 집요하게 권력을 탐했다. 지역주의를 기획·가동했고, 그것과 반공주의를 기득권 수호의 핵심 기제로 동원·정착시켰다. 그들은 노태우 정권까지 오랫동안 집권했다.
1998년 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분명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만들어낸 성과였다. 다른 한편, 과거 조선시대 노론의 장기집권이 결국 망국으로 이어졌듯이 그것은 장기간 권력을 누린 TK 세력이 급기야 IMF 국난을 초래한 데에 따른 응징이었다.
사실 정권교체는 1971년 7대 대선에서 이뤄져야 했으나, 부정선거로 무산된 바 있었다. 그 후 유신이 있었고, 12·12 군사 쿠데타가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30년 가까이 무력에 의지해 어거지로 기득권을 유지했던 것이다.
1971년 대선에서 승리를 강취당한 사람이 김대중 전 대통령(DJ)이다. 그가 빼앗긴 승리를 되찾은 것은 1997년 대선에서였다. 39만여 표 차이로 이기는 데 26년이 걸렸다. 아마도 세계 역사상 가장 긴 대권 도전사의 기록일 것이다. 26년 동안 그가 겪은 고통과 시련은 엄청난 것이었다. 죽을 고비를 넘겼고, 빨갱이로 몰렸다. 망국병이라는 지역주의의 화신으로 매도당했다. 바로 1971년 그로부터 승리를 강탈해간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어쨌든 DJ는 집권 후 부도위기에 직면한 나라를 되살렸다. 남북화해로 평화를 정착시켰다. 민주화 시대를 활짝 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용하는 등 동서화합을 추진했다. 언론과 야당의 거듭된 공세로 몰리던 와중인 2002년 2월, <월간중앙>과 폴앤폴에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예상대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박정희가 DJ를 압도했다.
하지만 3개 분야에서만큼은 DJ가 단연 1등이었다.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평가에서 DJ와 박정희는 각각 64.4%와 6.5%를 얻었다. DJ와 박정희는 국민의견을 존중한 대통령이란 평가 항목에서 각각 37.2%와 11.9%를 얻었다. 민주주의에 기여한 대통령에 대한 질문에서는 각각 36.5%와 13.5%를 얻었다. 조사결과를 보면, 그가 지향한 가치에 대한 많은 국민들이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유하자면, 박정희가 보릿고개를 없앴다면 DJ는 눈물고개를 없앴다.
누구든 공이 있으면 과도 있기 마련이다. DJ에게도 많은 공이 있고, 숱한 과가 있다. 그가 잘한 것 중에 어쨌든 DJ 때문에 정권재창출에 성공했다고 한다면 왜곡일까? 견강부회일 수도 있다. 대통령으로서 DJ는 임기 말에 극심한 위기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반론도 가능하다. DJ가 정권의 위기 속에 당에 재량권을 넘김으로써 국민경선제라는 반전 카드가 생겨날 수 있도록 해줬다는 것이다.
'호남의 맹주'에서 '국민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했었어야
대체로 실패했다고 평가되고 있는 것이 DJ가 집권 내내 추진한 이른바 '동진정책'이다. 돈으로 영남의 마음을 얻으려 했으나, 결국 지역 토호들의 배만 채웠다는 것이 실패했다는 주장의 근거다. 틀린 말이 아니다. 2000년 총선에서 영남의 65석 중 단 1석도 건지지 못했다. 비서실장을 지낸 사람도 경북 울진․봉화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동진정책 때문에 노무현이란 정치인이 급성장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DJ가 시종일관 영남을 도외시했다면, 호남과 충청의 연합에 매달렸다면 이후의 역사는 달랐을 것이다. DJ의 동진정책은 영남 개혁세력이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줬다. DJ의 동진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고, 노력한 정치인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DJ가 동진정책을 통해 던진 메시지가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에 대선후보 국민경선에서 호남이 영남출신 노무현에게 마음을 활짝 열 수 있었던 것이다.
호남 출신으로서 영남 출신에게 정권을 넘긴 것만으로도 사실 DJ는 퇴임 후 '호남의 맹주'에서 '국민의 지도자'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DJ는 한 것에 비해 훨씬 부족한 평가를 받고 있다. 2004년 한겨레신문의 가장 좋아하는 국가지도자 조사에서, DJ는 8.6%로 50.0%를 받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비해 턱없이 낮았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반대편에서 나쁘게 덧칠하거나 공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역주의와 반공주의에 도전한 DJ를 용납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불가능했다. 허나 상대적 저평가가의 원인을 스스로 제공한 측면도 있었다. DJ가 어느 순간부터 현실정치에 개입한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본인의 판단 미스도 있었겠지만, 주위에서 그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은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못난 정치세력 그를 계속 정치에 불러들였다. 나쁜 참모들이 그가 계속 호응하도록 유도했다. 그의 말을 활용했고, 그의 관심을 악용했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DJ를 지난 4·29 재․보궐 선거에 개입시킨 것이다. 당시 전주에서 정동영 전 장관과 신건 전 원장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민주당의 권유를 뿌리친 선택이었다. 선거가 시작되고 두 후보가 점차 기세를 올리던 와중에, DJ의 발언이 갑자기 등장했다.
참여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분이 당시 유세 현장에서 전한 바에 따르면, DJ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는 반드시 민주당이 승리해야 한다. 무소속 1~2명이 당선돼 복당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전주시민들이 함께 손잡게 똘똘 뭉쳐서 민주당을 밀어줄 때에만 MB악법을 막고 잘못 가는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바로 될 수 있다." 노골적인 민주당 편들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전주 선거에서 모두 패했다. DJ만 우습게 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부정적 효과가 끝나지 않았다. 재․보궐 선거 직후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호남인에게 호남을 대표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에 대해 물었다. DJ가 34.1%로 1위였다. 2위는 29.4%의 정동영 전 장관, 3위는 10.4%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전북에선 아예 정 전 장관에 밀려 숫제 2위였다. 2005년 조사에서 DJ는 43.6%였다. 당시 정 전장관은 7.8%였다.
이 조사에서 유의미한 대목은 또 있다. 민주당 등 기존 정당이 아닌, 호남을 기반으로 하는 신당이 만들어질 경우 지지의사를 물었다. 지지의사가 있다는 응답이 51.3%였다. 민주당 지지층 중에서도 48.4%가 이런 대답을 했다. DJ가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는 거창한 논리로 민주당을 변호했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DJ, 네 편 내 편이 아니라 가치와 정신으로 기억되게 해야 한다
KSOI 조사가 말해주는 것은 DJ의 힘이 떨어졌다는 외적 현상이 아니다. 핵심은 호남인들조차 DJ에 대한 관점이 좁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애서 외면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은 그가 특정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좀 더 초연하고, 통합적인 스탠스를 취하지 못한 데에 대한 반발인 것이다.
얼마 전에 EAI에서 파워 정치지도자 영향력 신뢰도 조사를 했다. 1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현역이 아닌 사람은 DJ가 유일했다. 영향력에서는 MB와 박근혜 전대표에 이어 3위를, 신뢰도에서는 박 전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07년 조사에 비해 신뢰도에서는 4위에서 2위로 뛰어오른 결과다.
누군가 '역시 DJ의 파워는 살아있다'며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DJ가 진보진영의 현역 대표선수로 세간에 인식되고 있는 점이다. 이건 반길 일이 아니다. 현실에 개입하면 할수록 그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이 줄어들게 된다. 관찰자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입각해서 보게 된다. 따라서 그가 지향한 가치가 오해 받고, 업적이 폄훼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DJ가 제대로 평가받느냐 하는 것이 한 개인의 명예 차원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파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향유하고 있는 이점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즉, 박정희와 박정희 모델은 아직도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파의 핵심적인 가치기반(value infrastructure)이다. 따라서 DJ를 국민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은 가치의 문제고, 세력의 문제고, 미래에 관한 문제다.
답은 분명하다. DJ를 네 편이냐 내 편이냐가 아니라 가치와 정신으로 기억되게 해야 한다. 정조를 생각하면 개혁군주 이미지가 떠오르듯, DJ를 떠올릴 때 지역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평화가 연상되게 해야 한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시급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