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칡넝쿨 푸르고 대추 잎 새로 나는
장기성 밖은 큰 바다
수심은 돌로 눌러도 또 일어나고
꿈길은 안개같이 희미하기만 하고
늦은 밥 더 먹지만 입맛이 있어 그럴까
봄옷이 도착하면 몸 한결 가벼울 텐데
이 생각 저 생각 모두가 쓸데 없다
하늘이 칠정(七情)을 주어서 괴로워 하네  

다산 정약용이 포항 장기면에서 첫 유배생활을 하면서, 장기읍성에서 자신의 처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해 쓴 시 <수(愁)>. 

다산은 자신이 모시던 정조대왕이 승하한 다음해인 1801년에 장기로 와서 8개월간 유배생활을 했다.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던 다산은 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을 계기로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됐기 때문이다.

당시, 노론(老論)집권 보수세력은 신유사옥을 구실로 주준모를 비롯한 천주교신자 100여명 처형은 물론 정약용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남인 등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했던 것.

이렇게, 다산은 당진 유배생활에 앞서 포항 장기에서 이백 이십여일 첫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당진 17년 유배생활에 비하면 짧은 기간이지만, 다산은 장기에 머물면서 장기고을 백성들의 생활상과 고을 관리들의 목민행태를 글로 남겼다.

<장기農歌十章> 등 130여 시를 썼으며, 주로'토속적이고도 사실적이며 비판적이면서 은유적'인 표현을 담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현재는 잃어버린 상태이지만  <爾雅述> <己亥邦禮辨> 등을 저술했다 하니 그의 왕성한 창작열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장기초동학교 안에 있는 300년 은행나무. 우암 송시열이 심은 것
▲ 송시열 은행나무 장기초동학교 안에 있는 300년 은행나무. 우암 송시열이 심은 것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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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는 다산 정약용보다 120여년 앞서 우암 송시열도 4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 우암을 기리는 죽림서원이 장기에 세워졌을 정도로 우암이 장기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 같다. 다산 정약용도 장기 사람들이 우암만 얘기하는 분위기를 이렇게 읊었다.

죽림서원이 마산리의 남쪽에 있으니
쭉쭉 뻗은 대나무와 느릅나무 새잎이 밤비에 젖었네
촛불 들고 멀리서 찾아가도 반기지 않고
시골 사람들 아직도 송우암만 이야기하는구나

지금도 장기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송시열이 심었다는 300년 은행나무가 서있다. 2001년 장기초등학교에 세운 사적비에는 우암이 쓴 시 <示孫兒輩:여러 손자들에게>가 새겨져 있다.

  임금님 성덕 신하의 죄에 너그러워
   여름 날 북에서 이곳으로 옮겨주셨네
   빗질할 때마다 머리는 짧아지는데
   장기에 온 지도 다섯 달이 되었구나
   초가 처마 아래 책 펴놓고 읽으며
   마음은 부질없이 나라일 걱정한다
   너희들은 이를 탓하고 원망하지 말게나
   생사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인 것을

이렇듯, 장기에는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주자학의 대가 송시열과 조선 후기의 합리적실용주의 사상가인 다산 정약용이 유배 왔던 곳으로 그들의  정신세계가 이어져 오고 있다.

장기초등학교에 2001년 세워진 우암 송시열-다산 정약용 사적비
▲ 송시열- 정약용 사적비 장기초등학교에 2001년 세워진 우암 송시열-다산 정약용 사적비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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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일까? 장기면의 명물인 장기읍성은 본래의 목적인 군사적 의미 못지않게 역사문화의 현장으로 더 각별하게 다가옴을 느낄 수 있다.

장기면사무소에서 꼬불꼬불한 가파른 산등성 언덕길을 따라 장기읍성에 오르면, 장기면이 훤히 내려다 보이고 눈앞에 펼쳐진 평야지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동해바다도 보인다.

경북동해안을 지키던 '군사요새' 장기읍성. 성에 오르면 넓은 평야와 장기면이 한눈에 내려보이고 저멀리 동해바다도 보인다
▲ 장기읍성 경북동해안을 지키던 '군사요새' 장기읍성. 성에 오르면 넓은 평야와 장기면이 한눈에 내려보이고 저멀리 동해바다도 보인다
ⓒ 추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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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곳에 성을 쌓았는지 그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어진다. 동해안 방어를 위한 요새로써 이만한 위치가 또 어디 있겠는가? 더욱이, 이런 지리적 특성은 조선시대 권력에서 쫓겨난  정치인들의 유배지로도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장기읍성은 해발 252m인 동악산 동쪽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시대에 여진족 침입 방어를 위해 토성을 쌓았으며 조선시대에 또다시 석성으로 증축했다고 전해온다. 읍성은 1.5m의 높이에 총 길이 2000m인 장기읍성은 약 3만7000평의 면적을 갖고 있다.

3개의 성문과 성안에는 4개의 우물과 2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연못이 매립됐고 우물은 성내 주민들 식수로 이용되고 있다. 성내에는 약 20 호의 농가가 아직도 살고 있다.

또한, 성안에는 교육기관과 행정기관이 있었다. 산등성이에 교육기관과 행정기관이 동시에 있었다는 게 흥미로운 대목이다. 따라서, 장기읍성은 군사적 기능뿐 아니라 행정과 교육기능 등 복합적인 역할을 하던 곳인 셈이다. 향교는 아직 성안에 있으나 관아는 읍사무소 옆에 옮긴 상태다.

장기읍성 안에 있는 향교
▲ 장기향교 장기읍성 안에 있는 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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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내에 있던 것을 지금은 장기읍사무소 옆에 옮긴 관아
▲ 장기읍성 관아 성내에 있던 것을 지금은 장기읍사무소 옆에 옮긴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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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읍성이 다른 읍성과 달리 문화유산 가치가 높은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읍성은 평지나 낮은 언덕 그리고 산성에 만드는데, 장기읍성은 산성과 읍성의 기능을 동시에 갖춘 '산성적 읍성'으로써 매우 귀하며, 현존 유구(遺構) 보존상태가 좋아 귀중한 유적지란 평가를 듣는다.

그러나, 장기읍성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급격히 훼손됐다. 현재도 동․남쪽 성곽과 향교는 복원공사는 끝낸 상태이나 나머지 성곽과 건물들은 제 모습을 찾기 힘든 실정이다. 동문 우측 구릉에 '拜日臺'(일명 朝日軒)라 새겨진 초석이 발견됐으나 옛 모습을 찾을 길 없다.

복원에 사용된 성곽돌이 옛것과 다르다는 걸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공사업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여기저기 돌을 가져와 짜깁기 한 때문.
▲ 복원된 장기읍성 성곽 복원에 사용된 성곽돌이 옛것과 다르다는 걸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공사업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여기저기 돌을 가져와 짜깁기 한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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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과 포항시는 총 140억원을 들여 성곽보수와 건물 복원 등 장기읍성 복원공사를 추진하고 있으나 예산이 찔끔찔끔 내려와서 완공이 미뤄진 상태.

그나마, 복원된 성곽도 엉터리 공사인 걸 한 눈에 알 수 있다. 복원에 사용된 성곽돌이 옛것과 다르다는 걸 금방 발견할 수 있다. 공사업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여기저기 돌을 가져와 짜깁기를 한 때문.  시멘트가 대량 사용된 모습도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고 제법 큰 틈새도 보인다. 특히, 성곽 윗부분에 시멘트와 회백칠로 마무리한 모습은 가히 '황당무계' 그 자체다.

의문이 든다. 장기읍성 복원공사에 얼마나 철저한 고증이 뒤따랐을까? 공사감독은 제대로 했을까? 이처럼 엄청난 예산을 들이고도 엉터리 공사를 했기에, 장기읍성은 원형이 훼손되고 결국 흉물을 만든 셈이다.

멘트가 대량 사용된 모습도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고 제법 큰 틈새도 보인다. 특히, 성곽 윗부분에 시멘트와 회백칠로 마무리한 모습은 가히 ‘황당무계' 그 자체다.
▲ 흉물스럽게 복원된 성곽 멘트가 대량 사용된 모습도 눈에 거슬린다. 그럼에도 곳곳에 균열이 일어나고 제법 큰 틈새도 보인다. 특히, 성곽 윗부분에 시멘트와 회백칠로 마무리한 모습은 가히 ‘황당무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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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읍성 복원이 잘못됐다는 지적은 자주 나왔다. 특히, 2007년 11월에 현장을 방문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장기읍성 복원이 잘못됐다"고 일침을 가하기에 이르렀다.

유 청장은 "예산이 부족하다 보면 매년 입찰을 새로 해야 하고, 그러면 시공업자가 수시로 바뀌면서 복원의 일관성이 없어진다"면서 "이 때문에 돌을 쌓는 방식은 물론 돌의 재질도 달라 복원해놓은 성곽의 형태도 짜깁기가 돼 버렸다"고 비난했다.

이런 문제점을 없애기 위해서는 유 청장은 "문화재 복원공사는 전국 입찰을 하고 예산을 집중 배정해 최초 시공업자가 계속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놓았다.

흥선대원군 척화비. 장기면사무소 옆에 있다
▲ 척화비 흥선대원군 척화비. 장기면사무소 옆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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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을 품은 장기읍성은 선조들의 호국정신이 녹아든 곳이다. 따라서 후세들은 복원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더불어 다산과 우암이 남긴 정신세계도 잘 계승해야 할 과제다. 아름다운 동해안 풍경과 어우러진 장기읍성을 찾는 길에 다산과 우암과 함께한다면 그 또한 멋있는 여행코스가 아니겠는가? 

장기천과 연결된 선창리 바닷가의 바위섬. 경치가 아름다워 '해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 장기면 선창리 바닷가의 바위섬 장기천과 연결된 선창리 바닷가의 바위섬. 경치가 아름다워 '해금강'이라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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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영일만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장기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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