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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진이 병진이는 오늘도 흑산리 들판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연못가에서 제 홀로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병진이병진이는 오늘도 흑산리 들판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연못가에서 제 홀로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 이종찬

병진아!

오늘은 연못에서 물고기 몇 마리 낚았니?

엄마는 절에서 애기 낳은 뒤

그 어떤 아저씨한테 시집갔니?

그 텃밭에 하얗게 핀 참깨꽃

그 연못가에 예쁘게 핀 하양 빨강 봉숭아

그 작은 섬을 황홀경에 빠뜨린 자귀나무꽃

그 흙담 위에 알알이 박힌 포도알 

모두 모두 안녕하니?

누구냐고?

그때 연못가에서 잠시 만난 서울 아저씨야

길을 가다가 엄마 손을 잡고 깔깔거리고 있는 꼬마를 보면

가끔 병진이 생각이 나서 말이야...

 

- 해남 아이 병진이에게 보내는 편지

 

부모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는 해남 아이 병진이. 초등학교 2학년 박병진은 전남 해남군 옥천면 흑천리에서 나락처럼 푸르게 자라는 9살 먹은 꼬맹이입니다. 7살 먹은 남동생이 하나 더 있다는 병진이는 오늘도 흑천리 들판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조그만 연못가에서 제 홀로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병진이 말로는 아빠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그만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뒤 몇 해가 지나 어떤 아저씨 아이를 가졌답니다. 병진이 엄마는 지금 아이를 낳기 위해 절에 들어가 있습니다. 병진이 엄마는 아이를 낳고 나면 곧 그 어떤 아저씨한테 시집을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병진이 얼굴에는 그 어떤 그늘진 곳도 없이 아주 맑고 밝게만 보입니다. 연못가에 낚싯대를 빠뜨려 놓고 흙장난을 하다가 내가 다가가자 그저 히죽히죽 웃는 병진이. 병진이는 '국무합기도'란 하얀 글씨가 새겨진 빨간 반소매 웃옷을 입고 있지만 지금은 '국무합기도'란 학원에 다니고 있지 않습니다.  

 

'국무합기도'란 학원에는 아빠가 살아 계실 때 다녔던 학원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가가 이것저것 물어도 피하는 기색 하나 없이 거리낌 없이 대답도 참 잘하곤 합니다. 물고기를 몇 마리 낚았냐고 묻자 "오늘은 지렁이가 없어서요"라고만 말합니다. 예전에는 물고기를 낚았냐고 묻자 제 손바닥을 들어보이며 "4~5마리요" 합니다.

 

병진이 텃밭 너머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놓여 있는 나지막한 평상
병진이텃밭 너머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놓여 있는 나지막한 평상 ⓒ 이종찬

병진이 그 은행나무 아래 작은 평상 너머에는 작고 예쁜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병진이그 은행나무 아래 작은 평상 너머에는 작고 예쁜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 이종찬

 

해남 옥천면 흑천리에서 만난 서경남 선생과 병진이

 

"병진아! 아빠 안 보고 싶니?"

"어차피 돌아가신 걸요"

"엄마 시집가면 따라갈 거니?"

"엄마가 따라오지 말래요. 저도 할아버지 할머니랑 사는 게 더 좋아요"

 

7월 24일(금) 낮 2시쯤. 지난해부터 전남 해남군 옥천면 동리에 있는 생가 복원을 시작해 지난해 6월에 복원공사를 끝내고 고향에 둥지를 튼 윤재걸(62) 선배와 함께 찾아갔던 옥천면 흑천리 서경남 선생 댁. 그날이 중복이라고 서 선생이 윤 선배에게 토종닭 서너 마리 삶았다며 저랑 같이 오라고 했습니다.

 

윤 선배 말로는 서 선생은 전남 나주가 고향인데, 해남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그저 해남이 좋아 이곳 흑천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고 했습니다. 윤 선배가 서 선생을 알게 된 것도 서 선생이 스스로 집으로 찾아와 인사를 건넸기 때문이랍니다. 서 선생은 또한 먹을거리가 생기면 주변에 있는 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나눠먹기를 참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서 선생과 나는 어제 해창막걸리를 마실 때 처음 만났고, 오늘로서는 두 번째 만났지만 나를 마치 오랜 벗처럼 살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 집에서 대낮부터 해창막걸리에 토종닭을 먹으며 이런 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집 앞은 확 트인 옥천 들판이 있어 그런지 에어컨 바람을 틀어놓은 것처럼 몹시 시원했습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습니다. 배는 부르고, 취기까지 슬슬 오르자 갑자기 잠이 스르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 자리에 드러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하얀 참깨꽃이 예쁘게 피어난 텃밭 너머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놓여 있는 나지막한 평상이었습니다. 

 

병진이 자귀나무꽃이 황홀하게 피어나 있는 조그만 섬
병진이자귀나무꽃이 황홀하게 피어나 있는 조그만 섬 ⓒ 이종찬

 

작은 연못에 홀로 앉아 낚시하는 해남 꼬맹이 

 

"얘, 너 혼자 여기서 뭐하니?"

"물고기 낚고 있어요"

"혼자 심심하지도 않니?"

"방학 때만 되면 늘 이렇게 혼자 노는 걸요"

"그 낚시대는 네 거니?"

"아뇨. 늘 여기 그냥 놓여 있어요"

 

내 나이만큼 먹어 보이는 그 은행나무 아래 작은 평상 너머에는 작고 예쁜 호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호수에는 자귀나무꽃이 황홀하게 피어나 있는 조그만 섬과 그 섬 주변에는 물 위에 뜬 연잎 사이에 예쁜 연꽃봉오리가 곳곳에 그 누군가 애타는 소원처럼 솟아나 있었습니다. 그 연못가, 빨강 하양 봉숭아 뒤에서 만난 꼬맹이가 병진이었습니다.

 

나는 병진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다 '아이스크림 사 먹어'라며 돈 천 원을 준 뒤 평상에 벌렁 드러누웠습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나폴거리고 있는 은행잎에서도 시원한 바람이 일었습니다. 병진이는 낚싯대를 버려두고 자전거를 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초록빛 들판 사이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잠이 깜박 들었을 때였을까. 얼굴에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연못가를 바라보니 어느새 병진이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 문 채 빙그시 웃으며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부모 없는 꼬맹이가 저리도 맑고 밝게 살아갈 수 있다니... 대견스러웠습니다. 

 

병진이 어느새 병진이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 문 채 빙그시 웃으며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병진이어느새 병진이가 아이스크림을 입에 하나 문 채 빙그시 웃으며 낚싯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 이종찬

병진이 연못에 떠 있는 작은 섬
병진이연못에 떠 있는 작은 섬 ⓒ 이종찬

 

보름이 지나도록 연락 없는 동화 속 아이

 

"빗방울 떨어져. 병진이도 집으로 가야지."

"저기 3백원 남았는데요?"

"그건 병진이 거야."

"아저씨가 제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그래. 아저씨는 서울 사는데 어쩌지?"

"괜찮아요. 그냥 아빠 같아서요."

 

"어디 사니?"

"쩌어기~ 보이는 저 마을에요."

"그래. 담에 서울 아저씨가 다시 이곳에 오면 꼭 병진이를 다시 찾을게."

"제 멜 주소도 있는데..."

"그래. 아저씨가 명함 한 장 줄 테니까 이 멜로 연락해."

"네. 꼭 연락드릴게요."

 

드넓은 들판을 연초록 물감으로 적시고 있는 흑천리 들판. 먹장구름 잔뜩 낀 하늘 아래 실 배암처럼 꼬물거리고 있는 들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병진이. 흙담 아래 알알이 열려 한 알 한 알 까맣게 익어가고 있는 포도알처럼 까아만 눈빛을 가진 병진이는 그렇게 내 눈 앞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잠시 꿈을 꾼 것일까. 순간 환상을 본 것일까. 아니면 병진이 집에 컴퓨터나 없거나 인터넷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도 아니면 병진이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개학한 뒤에 학교에 가서 내게 메일을 보내려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행여 병진이가 자칫 잘못하여 내 명함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때 병진이에게 메일 주소 하나 받아 둘 걸 그랬나. 하여튼 해남 아이 병진이는 보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 메일을 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 없이도 나락처럼 짙푸르게 자라나는 해남 아이 병진이. 해남 아이 병진이는 오늘도 동화 속 아이처럼 내 기억 깊숙이 남아 나를 애태우게 하고 있습니다.

 

"병진아! 혹 이 기사 보거든 꼬옥 연락해라. 이 서울 아저씨가 병진이 마음 속 아빠가 되어주마".

 

병진이 그 흙담 위에 알알이 박힌 포도알
병진이그 흙담 위에 알알이 박힌 포도알 ⓒ 이종찬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박병진#옥천면 흑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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