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6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특별강연을 경청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부인 이희호씨가 6월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 국제회의장에서 김대중평화센터 주최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에서 문정인 연세대 교수의 특별강연을 경청하며 박수를 치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김대중 선생님, 1980년 사형선고를 받은 군사법정에서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라는 최후진술을 마치고 묵연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수사관 한 명이 "왜 저 사람을 사람들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 알 것같다"고 혼잣말처럼 되뇌더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은 국회의원·대통령후보·총재·대표·대통령·노벨평화상 수상자·전 대통령 등 여러 호칭이 있고, 근래 언론에서는 DJ라는 이니셜로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대통령님'보다는 '선생님'의 호칭이 더 많이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일어나십시오. 깨어 있는 영혼에는 세월이 스며들지 않는다 했거늘, 죽음의 문턱을 몇 차례나 넘나드신 분이 그까짓 병마에 쓰러지시다니 말이 됩니까. 하늘은 큰 일을 맡길 사람의 늑골을 괴롭히고, 사명이 끝나지 않는 사람은 명부로 부르지 않는다 했거늘, 아직 할 일 많이 남은 터에 한 달 동안을 누워 계시다니, 정녕 하늘의 뜻이 아닙니다.

김대중 선생님, 당신은 1982년 신군부세력이 미국으로 추방할 때 청주교도소에서 <이제 가면>이란 시 한 편을 쓰셨지요.

이제 가면 언제올까 기약없는 길이지만
반드시 돌아오리 새벽처럼 돌아오리
돌아와 종을치리 자유종을 치리라.(제3연)

당신은 약속대로 돌아왔고 돌아와서 자유와 민주의 종을 쳤습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이번에도 돌아오십시오. 나라 안팍에 먹구름이 덮히고, "목숨 바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어 억울하고 분하다"고 하시면서, 한 달여를 누워계시면 어찌합니까.

노무현 대통령의 비통한 죽음 앞에 "내 몸의 반쪽이 무너진 것 같다"고 통절한 절규를 남기고, 상심하여 그 길로 누우셨다니, 그 '반쪽'마저 속절없이 가버리면, 이 민초들을 어찌하시렵니까. 이번에도 '새벽처럼' 돌아오소서,

광기와 맹신이 소용돌이치는 시대, 불의만 있고 공분이 사라져가는 시대에, 그래도 당신 있어서 한 줄기 희망이었는데, 가시더라도 아직은 아닙니다. 훌훌털고 일어나십시오.

지고 가기 힘겨운 슬픔 있거든
꽃들에게 맡기고
부리기도 버거운 아픔 있거든
새들에게 맡기고…….

위 사진은 잡지 <피플>에 실렸던 것으로 이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
 위 사진은 잡지 <피플>에 실렸던 것으로 이씨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시절 부엌에서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다.

나태주 시인의 <꽃이되어 새가되어>의 두 연이지요. 당신이 지신 힘겨운 짐, 슬픔의 짐을랑 꽃들에게 맡기고, 그 버거운 아픔은 새들에게 맡기고, 일어나세요.

예리한 칼 끝에 심장을 난도질당하는 아픔을 견디고 살아온 고통과 하많은 세월, 어찌 당신 육신의 세포 마디마디가 멍들지 않았겠습니까만은, 소용돌이치는 역사의 상처를 자신의 상처로 겪어왔던 고난의 풍상에 어찌 온전한 부위가 남았을까마는, 그래도 당신은 일어나셔야 합니다.

당신은 자기가 살았던 시대의 인물이지만, 분명 그 시대보다 앞선 생각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4대국보장론·대중참여경제론·남북유엔동시가입론·비반미·비용공·비폭력의 삼비정책(三非政策)·반세기 얼어붙었던 북의 창문을 열게한 햇볕정책, 제2국치 IMF 환난극복, 금강산길개방, 여성부와 국가인권위원회설치 등 참으로 앞을 내다보고 겨레의 삶과 질을 높이려 애쓰고도 평가는 커녕 용공·좌경·빨갱이·내란수괴·선동가·수백억대 치부·지역주의자·대통령병환자 등 심한 상처를 입어왔지요. 노벨평화상도 돈을 주고 샀다는 비난까지 겹치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은 기적이라 할 것입니다.

가슴에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답다
그대 내면이 아픔으로 꽉 차서
바람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선 사람이여!

정호승님의 <봄길>이란 싯구입니다. 가슴팎에 성한 곳 없을 상처를 안고도 당신은 이 겨레, 이 땅, 민주주의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납치토막살해 음모도, 사형선고도 모두 용서하고 "정치보복 말라" 일렀습니다. 당신의 민주주의와 조국사랑은 종교의 엄숙주의에 가깝고, 역사에 대한 경건한 자세는 수도승과 닮았습니다.

당신은 몇 차례나 운명의 끝자락까지 다녀온 사람답게 감정적 언행을 자제할 줄 알았으며, 증오하는 사람들과 양식을 잃은 언론의 모진 붓질에도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정도를 통해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정립하고 역사에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만이 가능한 일입니다.

김대중 선생님, 당신 앞에 하나의 수식만 필요하다면 무엇일까요. 민주투사·전직대통령·남북정상회담·인권운동가·노벨평화상 수상자, 혹은 "행동하는 양심",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무엇일까요? 저에게 자리매김 하라시면 "역사에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아는 사람"이라 해도 될까요? 일어나서 답을 주세요. 쓰다 둔 자서전도 마무리 하셔야지요. 김대중 선생님, 아직 당신이 떠날 때가 아닙니다. 일어나세요.


태그:#김대중 전 대통령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천도교 대도주의 책임 맡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