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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이 되면 으레 "이번 휴가는 어디로 가느냐", "누구하고 가느냐?" 라는 말을 인사처럼 주고받는다. 구태여 답을 안 해도 되는 인사말인 경우가 많은데 나는 진짜 궁금해서 건네는 말로 착각을 한다. 예전 같았으면 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였겠으나 이번엔 일일이 말하지 않고 그냥 주산지나 주왕산이 있는 청송에 갔다 오겠노라 대답하였다.

속으로는 안동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위치한 봉화, 영양, 청송 그리고 안동 풍산면을 맘에 두고 있었다.  봉화라고 하면 '봉하마을'로 잘못 알아듣기도 하여 다시 봉화라고 고쳐 주기가 멋쩍었다. 아니 그렇기보다는 봉하마을을 가야한다는 억눌린 생각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아 봉하마을을 안 가고 봉화를 먼저 간다는 사실을 말하기 싫었다. 봉하마을은 나중에 찾는 이가 드문 때에 가려고 맘먹고 있다.

봉화는 그렇다치고 영양은 어떤가? 영양이라 하면 그게 어딘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고 게다가 봉화-영양-청송-안동을 거쳐 오는 일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면 또 따분한 곳만 찾아다닌다는 핀잔을 듣기가 거북하여 이번에는 청송을 다녀오기로 하였다고 둘러서 말했던 것이다.

이번에 여길 택한 속마음은 다른 데 있었다. 다시 한 번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이 낙동강변에 있는 병산서원인데, 병산서원 앞을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내 맘을 급하게 만들었다.

낙동강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상처 받기 전에 눈에 담아두기 위해 서둘러 떠난 여름여행이다
▲ 부용대에서 내려다본 하회마을과 낙동강 낙동강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상처 받기 전에 눈에 담아두기 위해 서둘러 떠난 여름여행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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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철회는 되었지만 하회마을 앞에 보를 설치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하는 걸 보면 상처 받지 않은 낙동강을 내 눈에 혹은 문명의 이기를 빌려서라도 꼼꼼히 담아 둬야 한다는 생각이 절절히 드는 것이다. 나에게는 봉하마을에 가는 것보다 더 급했던 것이다.

봉화에서 발원한 내성천은 예천을 거쳐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고 태백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낙동강 본류는 봉화 청량산 곁을 흘러 안동에 이르고, 일월산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반변천은 영양-청송-임하를 거쳐 낙동강이라는 이름표를 단다. 이 지역은 모두 낙동강의 지류이거나 낙동강 본류를 곁에 두고 있어 병산서원 앞의 낙동강과 함께 봉화, 영양, 청송, 안동(풍산)을 함께 보고 싶었던 것이다.

문화선진지역이었던 봉화 내성천 주변

크든 작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면 강이나 큰 내가 흐른다. 봉화는 내성천을 끼고 있다. 내성천은 물야 오전리에서 발원하여 예천에 이르러 의성포를 휘돌아 낙동강 본류에 합류하는 낙동강 지류다. 내성천은 봉화읍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아 석천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합수하여 제법 큰물을 이룬다.

내성천은 봉화 물야 오전리에서 발원하여 예천 의성포를 휘돌아 낙동강 본류에 합류하는 낙동강 지류다
▲ 봉화 내성천 내성천은 봉화 물야 오전리에서 발원하여 예천 의성포를 휘돌아 낙동강 본류에 합류하는 낙동강 지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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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천계곡에는 석천정사가 있고 이 계곡은 닭실마을로 이어진다. 북지리에는 마애불이 있으며 물야에 이르러서는 창녕성씨의 종택인 계서당이 있고 왼쪽 산너머에는 부석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내성천 주변은 신라와 조선에 이르기까지 문화의 선진지역이었다. 오지로 남아 있는 지금의 봉화와는 달랐다.

태백산 끝자락에 자리한 부석사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한 큰절이 북지리에 있었다 전해진다.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마애여래좌상이 그 자취를 남겼다. 북지리 마애불은 산자락 끝에 뻗어 나온 암벽에 새겨진지라 마애불 앞이 옹색하지 않고 비교적 너르다.

옆을 보면 불상이 앞으로 튀어나와 보이고 불상 왼쪽은 깨져 그 모습을 알기 어려워 보이나 오른쪽 측면이 불상 앞까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이 마애불은 아마도 바위평면에 그냥 새겨진 것 같지 않고 바위 표면을 파서 감실을 만들고 거기에 불상을 새겨 넣은 것 같다. 워낙 오래 되고 풍화가 심해 얼굴 윤곽을 잘 알아볼 수 없으나 처음 만들어졌을 때엔 그 크기나 형태로 보았을 때 대단한 걸작이었을 것이다.

풍화가 심해 윤곽이 뚜렷하지 않지만 이 마애불의 존재는 봉화가 문화오지가 아닌 문화선진지역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 북지리마애불 풍화가 심해 윤곽이 뚜렷하지 않지만 이 마애불의 존재는 봉화가 문화오지가 아닌 문화선진지역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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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애불이 어떻게 이런 곳에 자리하고 있을까? 앞서 말한 대로 이 곳은 지금은 외진 곳으로 남아있으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 곳은 신라 때 신성시하던 태백산 끝자락이며 존재자체만으로 일대(一帶)의 격이 높아지는 부석사를 곁에 두고 있으며 북으로 향하는 길목인 죽령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아 문화적으로 선진 지역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이 마애불이 향하는 방향이 예사롭지 않다. 바라보는 방향이 남향이나 동남방향이 아닌 북동 방향을 하고 있다. 이 방향은 태백산이 있는 방향과 일치하여 흥미롭다. 태백산은 신라 때 신성시 하던 산 중에 하나로 일부러 이 방향을 하고 있는 바위를 찾아 선택한 것 같다. 부석사 일주문은 '봉황산 혹은 소백산부석사'가 아닌 '태백산부석사'라 적힌 현판을 달고 있다. 부석사가 자리한 곳이 태백산 끝자락이긴 하나 굳이 다른 산을 버리고 태백산을 택한 것은 이와 연관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마모가 심하고 조각 솜씨가 순박하여 선사시대 암각화를 보는 느낌이다. 특히 탑은 경주 남산에 본 이후 처음 보는 것이어서 반갑다
▲ 원통전 뒤편 암벽에 새겨진 불좌상과 삼층탑 마모가 심하고 조각 솜씨가 순박하여 선사시대 암각화를 보는 느낌이다. 특히 탑은 경주 남산에 본 이후 처음 보는 것이어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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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대가 한창 복원·보수 공사중이라 주변이 어수선하지만 원통전과 그 뒤에 있는 바위에 새겨진 4구의 불좌상과 탑은 볼만하다. 특히 바위에 새긴 탑은 경주 남산에서 본 이래 처음 본 것이어서 매우 반가웠다. 예전체취라 생각하면 모두 애착이 가는 것들이다.

'태백산'이 아닌 '소백산' 막걸리로 아쉬움을 달래고

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태백산을 다시 한 번보고 석천정사로 향했다. 석천계곡을 들어선 지 얼마되지 않아 청하동천(靑霞洞天)이 새겨져 있는 큰 바위가 보였다.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 여기엔 마을은 없으니 여기에 들어오는 사람은 모두 신선이 된다는 의미일 게다. '신선을 맞을 만한 곳', 주천 요선정(邀仙亭)과 견줄 만한 곳이다.

계곡과 계곡물 그리고 계곡물에 발을 담근 소나무를 보며 걷다보면 계곡과 나란히 하고 있는 맞배지붕과 팔작지붕건물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석천정사(石泉精舍)다. 봉화는 온통 공사중이다. 북지리마애불도, 석천계곡도, 여기 석천정사도 공사중이다. 일하는 대여섯 분들이 반갑게 맞아 주며 어디서 왔느냐,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며 덮어놓은 돌샘(石泉)을 걷고 보여 주기도 하고 바위에 새겨진 석천정(石泉亭) 글자를 찍으라 권하기도 한다.

계곡과 정사가 그려 내는 풍광이 아름다워 과연 '신선이 사는 마을,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 할만하다.
▲ 석천정사(石泉精舍) 계곡과 정사가 그려 내는 풍광이 아름다워 과연 '신선이 사는 마을,청하동천(靑霞洞天)'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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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과 붙어 있는 석천정사는 계곡의 풍광을 그대로 끌어 앉고 있다. 지금은 복원·보수공사를 하여 그 맛을 느끼지 못하였다. 일하는 분들은 공사가 마치 본인들 혹은 봉화의 허물이라도 되는 양 나보다 더 아쉬워한다. 어지간히 서운했나 보다. 막걸리 한잔을 권하기에 머뭇거리지 않고 받아 먹고 아쉬움을 달랬다. 상표를 유심히 보니 영주 소백산 막걸리였다. 이분들은 굳이 '태백산'을 고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남 모르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석천을 떠나 닭실로 향했다.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어하는 청암정

닭실마을은 석천정사에서 곧바로 올라 갈 수도 있고 석천계곡을 따라 내성천으로 다시 나와 갈 수도 있다. 형편이 안되어 계곡을 거슬러 오르지 못하고 찻길을 택했다. 봉화읍에서 춘양방향으로 가다 보면 작은 언덕, 버티재를 넘게 된다. 산에 기대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닭실마을이다. 언덕마루 아래 철로변에서 보는 닭실마을 전경이 참 좋다.

언덕마루 아래 철로변에서 내려다본 닭실마을
▲ 닭실마을 정경 언덕마루 아래 철로변에서 내려다본 닭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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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로 잘생긴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 백설령 산세에 따라 집들이 옹골지게 들어서 있다. 마을 앞으로 창평천이 흐르고 서북쪽으로 가계천이 흘러, 이 두 물이 합수하여 석천계곡으로 빠져나간다. 풍수지리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도 단번에 길지임을 알 수 있다.

길지에 명가가 없을 리 없다. 마을 서쪽에 충재 권벌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마을길 따라 토담과 대문, 기와집 그리고 토담 밑에 정갈하게 심어진 꽃과 한쪽 모퉁이에 심어진 참깨, 옥수수, 고추를 보며 거닐다 보면 제법 큰 솟을대문과 마주친다. 권벌의 종택이다.

서쪽에서 본 닭실마을, 솟을대문집이 권벌의 종택이다
▲ 닭실마을 정경 서쪽에서 본 닭실마을, 솟을대문집이 권벌의 종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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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택 서쪽에는 청암정과 충재가 있는 공간으로 휴식과 학습의 공간이다. 청암정은 연못 가운데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지어졌다. 그래서 서재인 충재에서 청암정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한다. 학습의 공간인 충재와 휴식과 교류 때론 강론하는 공간을 구분해 놓았고 학습의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하려면 멋진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흡사 절 집의 세속의 세계와 피안의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같아 보인다.

청암정은 연못 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에 지어져 서재에서 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학습의 공간과 휴식·교유·교류·강론의 공간이 나뉘어 양 공간을 다리를 통해 드나들도록 했다
▲ 청암정 청암정은 연못 가운데에 있는 바위 위에 지어져 서재에서 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학습의 공간과 휴식·교유·교류·강론의 공간이 나뉘어 양 공간을 다리를 통해 드나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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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은 바위를 다듬지 않고 생긴 그대로 놔둔 채 지어졌다. 정자 뒤는 낮고 앞이 높은 바위여서 돌기둥을 만들거나 돌로 쌓아 키를 맞추고 그 위에 마루를 얹었다. 자연석을 깎아 계단을 만들어 정자에 오르게 하였고 이황이 65세 와서 읊은 시구에 나오는 연꽃과 난초는 없어도 정자 주변엔 철쭉, 단풍나무, 향나무를 심어 멋을 냈다.

서재와 학습의 공간인 충재는 세칸 맞배지붕 건물로 아담해 뵌다. 서재는 원래 선비정신에 맞게 화려하지 않고 검소하게 짓는다. 돌다리, 돌기둥, 돌계단 등 온갖 정성을 다한 정자에 비하면 충재는 단아하고 검소해 보인다.

 맞배지붕 세칸 건물의 서재로 아담하고 단아하며 소박하게 지어져 선비정신이 엿보인다
▲ 충재 맞배지붕 세칸 건물의 서재로 아담하고 단아하며 소박하게 지어져 선비정신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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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암정에는 권벌 친필 외에 이황, 체재공, 허목의 글씨로 새긴 현판이 여럿 걸려 있다. 이처럼 청암정은  같은 세대들에게는 교유(交遊)의 공간이었고 세대를 초월하여 학문과 사상의 교류가 이루어진 공간이었다.

현판 중에 청암수석(靑巖水石)이 눈에 들어온다. 미수 허목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글씨다. 글씨를 써놓고 보내지 못한 채 세상을 등진 안타까움과 글씨의 내력을 현판 옆에 적어 놓았다. 봉은사 '판전(板展)'글씨를 마지막으로 쓰고 세상을 떠난 추사가 생각나 한참을 쳐다보고 말았다.

학자의 마지막 작품은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 허목의 마지막 글씨, 청암수석(靑巖水石) 학자의 마지막 작품은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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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나 작가의 마지막 작품은 뭔가 다른 진한 감동을 준다. 허목에게 청암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청암정은 세상을 떠나기 전 꼭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곳, 한 번 가 본 이에게는 죽기 전에 기억하고 싶은 곳으로 여겨질 만큼 아름다운 정자다.


태그:#봉화, #내성천, #북지리마애불, #청암정, #닭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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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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