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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원 저. 진명출판사
▲ 조일전쟁 백지원 저. 진명출판사
ⓒ 윤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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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120년 만에 전국을 통일하는 위업을 세운다. 일본의 그 당시 환경은 우리들이 '사무라이'라고 알고 있는 바로 그들의 전성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글자 하나쯤 몰라도 일생을 검에 혼을 실었고 그들의 개개인의 전투능력은 세계 어느 국가의 육군보다 강력했다. 거기에다 외국에서 수입되어온 조총이라는 신식무기와 더불어 그들이 개발해낸 사격법은 일본군의 전투능력을 더욱 향상시켜줬다. 

그에 반해 그 시대의 조선은 평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14대 선조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위협하는 외세는 존재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안에서 곪아가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당쟁'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탄생하는 시기가 바로 이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져 서로의 기득권을 취하기 위하여 그들은 일본과 전쟁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을 각각 다르게 해석하고 진술한다.

평화의 시기가 불러다 준 비극은 군에도 영항을 미쳤다. 조선은 군대의 기강이 전혀 없는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군의 기록부에는 수 천, 수만 명의 병력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은 호미, 곡괭이밖에 들 줄 몰랐던 농부였고,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징집된 인원은 기록된 것과 달리 수 십, 수백 명 밖에 모이지 않던 그런 전투경험 제로의 오합지졸의 조선 군대였다.

명은 그 당시 대륙을 호시탐탐 노리는 금의 위협에 맞서서 그들을 진압하기 위해 전투 중에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다 일본의 군세가 슬금슬금 그들을 향해 뻗어오자, 명은 금의 진압 이후 숨고를 새도 없이 또 한 번의 대규모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한다. 그들의 땅에서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남의 땅 조선에서 한판 벌이는 것이 여러모로 따져봤을 때, 훨씬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선 땅에서 벌어진 대규모의 동아시아 국가들의 패권다툼. 재미사학자 백지원은 이것을 일본군 20만 , 조선군 20만, 명군 10만이 투입된 국제전으로 해석했고 그래서 이 시기의 전쟁을 단순히 '임진왜란'이라는 왜가 난을 일으켰다는 의미보다는 <조일전쟁>이라는 더 큰 의미로 해석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난'이라는 개념은 내부의 적이 봉기하여 일어난 전쟁을 칭하는 것이었고, 그것에 따르면 임진왜란이라는 호칭은 왜라는 나라를 상당히 과소평가하여 만들어낸 단어임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임진년에 시작된 이 거대한 전쟁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왜란'이라는 이름보다 나라 대 나라의 '전쟁'으로 정확하게 고쳐서 해석하는 게 훨씬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쟁 초기에 조선은 '일본군은 섬나라이므로 육지전은 약할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오였다. 일본은 120년 동안 내전을 겪은 무를 숭상하는 사무라이의 국가였고, 해군은 약탈을 위한 목적으로 배를 가볍고 날렵한 모양새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육군보다 해군이 훨씬 약했다. 이러한 판단착오는 단숨에 경상도를 내주고 20일만의 한양 점령, 2달 만의 평양 점령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낳게 한다.

그러나 명군의 지원과 더불어 우리에게는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해서 스스로 일어났던 의병들이 있었고,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던 그 상황 속에서도 권율, 이순신, 김시민, 정기룡과 같은 명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과를 거둔 이면에는 우리의 패배를 한없이 정당화 시킨 약한 무기 대신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대포와 함선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평양성을 되찾고 일군을 압박하여 그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는 결코 아니었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굶주렸으며, 심지어는 살기위해서 인육을 먹기도 했다. 전쟁 때문에 조선의 여인들은 모조리 그들의 전리품으로 전락했으며, 많은 인재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

행주대첩의 진실

우리는 보통 행주대첩을 이야기 할 때 아녀자들이 행주에 돌을 실어 날라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의 패배를 약한 무기에 돌리려고 하는 헛소리에 불과했다. 고려시대의 최무선을 기억하는가? 화약무기를 개발해낸 그 최무선. 그의 업적은 조선에 이미 뿌리내리고 있어서 그 당시 조선은 활질만 했던 미개한 국가가 아니라, 화포를 쏘아대던 막강화력을 가진 국가였다.

그리고 아녀자의 행주가 아닌 그 지역의 이름이 행주였던, 그 행주대첩에서 성을 수성하기 위해 돌멩이가 아니라 일본군에게 무차별 대포사격이 이루어졌다. 즉, 전쟁의 패인은 무기의 문제가 아니라 무기력한 왕과 신하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조선이 가지고 있는 군사력을 제대로 운용할 수 있는 능력만 가지고 있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패배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순신의 신격화 그리고 거북선의 진실

24전 24승에 빛나는 무적의 명장 이순신. 수 십척의 배를 가지진 악조건 속에서도 오직 물길 하나만을 이용하여 수백 척을 무찌른 불후의 명장. 저자는 이와 같이 신격화 되어있는 이순신의 존재에 대하여 메스를 들이댄다. 나는 장정일의 <공부>라는 책을 통해서 이순신과 세종대왕의 동상이 군사정권 시절. 그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졌다는 진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가 진행하려는 작업에 나는 기대감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갔다.

저자는 24연승의 신화로 주목받는 그의 해전기록을 조사하여 총 16전에서 13승 3패라는 전적을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전투라고 할 수 없는 10척 이내의 상황은 제외하거나 통합하고 그가 무패라고 기록해두었던 "성과가 없었다"라고 왜곡된 기록을 찾아서 3번의 패배를 기록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세 번째 패전을 웅포해전, 장문포해전, 왜교성해전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배의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이루어낸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대하여, 저자는 일본군의 배와 조선군의 배를 비교분석하면서, 함포가 실린 조선의 판옥선은 왜선에 비해 월등히 우수한 성능을 지녔기 때문에 동일한 조건하에서 이루어진 전투가 아니라 전투력의 우위를 얼마 정도 떠안고 싸움에 임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러나 이순신의 최후의 해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량해전을 비롯하여, 한산도대첩, 명량대첩들의 승리는 이순신의 뛰어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덧붙이면서, 이순신이 남해의 우위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 조선에 상륙한 일본군이 전라도까지 진출하지 못하게 막아낸 효과를 제공했고, 제일의 곡창지대를 지켜냈던 것이 일본군의 물자부족을 야기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의병들의 전투효과가 극대화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업적 속에는 거북선이라는 존재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거북선으로 인해 해전을 승리할 수 있었다고 학교에서 배웠다. 우리의 기억 속에는 종횡무진 일본 전함 사이를 헤집으면서 불을 뿜어내던 용맹한 거북선의 위용이 자리하고 있고 아직도 그 모습이 선명한데, 저자의 의견에 따르면 이것은 과장 되도 한참 과장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거북선은 총 3척밖에 건조되어 있지 않았고, 원균이 대패한 이후에 다시 건조된 기록이 없음을 알리면서 주요 함선이 아닐뿐더러 그렇게 효율적인 전투선도 아니었음을 밝힌다.

그 이유는 거북선 자체가 판옥선을 개조해서 만들어냈기 때문에 재빠른 일본 전투함을 헤집을 만한 속도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용머리와 꼬리부분만 뚫려있었기 때문에 공격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즉, 불을 뿜어냈던 것이 아니라 함포구멍이었다는 이야기인데, 그 당시의 판옥선의 함포구멍에 비해 훨씬 적었으므로 화력 면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조일전쟁>이 내게 남긴 것

이렇게 저자는 <조일전쟁>사의 전개과정과 진실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엿보였다. 그의 말처럼 이순신을 깎아내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겠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부풀려진 역사적 사실을 벗어나서 역사 그대로의 역사로 바라볼 수 있게끔 한 걸음 먼저 내딛었다는 것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저자는 임진오적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이며, 그것의 가장 첫째를 선조로 꼽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책 속의 저자는 선조의 무능함과 탐욕을 꼬집는 욕이 섞인 발언을 서슴없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당쟁을 주도하고 제 살길을 찾아서 도망쳤으며, 남이 세운 공적을 가로채고, 또한 남의 공적을 뒤에서 모함하는 모든 썩어빠진 정치인들에게 대노한다.

선조가 이순신을 홀대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널리 잘 알려져 있다. 그 옛날 신라시대의 왕이 장보고가 가진 청해진의 강한 힘을 두려워해서 장보고를 제거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순신은 장보고와는 달리 스스로를 낮추었고 명예욕이 있다고 보기 힘든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선조의 권력에 대한 욕구, 그것을 이루기 위해 수 많은 전쟁 공신들을 내쳤던 그 비겁함에 분노가 치미는 것은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나라를 걱정하며 가산을 모조리 탕진하면서 까지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해냈던 많은 이들의 최후를 보고 있자면, 독립군의 후예는 거지꼴을 못 면하고 친일파의 잔재는 이 땅에서 떵떵거리면서 살고 있다는 현실 또한 나를 가슴 아프게 하고 분노하게 한다. 

이 당시 조선 그리고 지금의 대한민국.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아래에서 아무리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어도 윗선에서 물을 흐리면 그 더러운 물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는 현실임을 인정해야 할 듯 하다. 비록, 지금의 우리는 우리의 대표자를 직접 선출할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백성들 보다는 한결 나은 위치에 있다고 하지만 나는 점점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는 매체들이 범람하여 점차 우민화 되어가는 작금의 상황이 더욱 애통하다. 우리가 가진 아래의 힘이 위를 바꿀 수 있을진데, 우리들은 너무 순순히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고 만다.

<조일전쟁> 그 후...

아울러 이 책은 전쟁 후의 조선과 일본의 변화에 주목한다. 조선은 일군과 명군의 침입으로 황폐해져 버린 처참한 현실 속에서 일에서 넘어온 새로운 작물의 보급, 그리고 명에서 넘어온 은을 이용하는 거래로 인한 화폐제도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서 잡아온 도공들을 그들의 자랑스러운 국부로 만들었고, 포로 중의 강항이나 이진영과 같은 성리학자들로 인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시대에 성리학을 뿌리 내리는데 기여했다.  

내 생각은 <조일전쟁>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이쯤에서 매듭을 지었어야 하지 않았나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진도를 더 나갔다. 11장의 내용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이해를 우리에게 전수하고 있었고, 12장의 내용은 1592년 그 시기에 일본의 가장 유명했던 3명의 인물.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거기에 덧붙여 13장에서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야기도 해주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일본의 이해를 더욱 돕게끔 하여(단순한 오랑캐가 아니라 진정한 적수의 가치가 있었던 일본인들의 이야기), 조선과 일본 간의 국제전임을 더욱 부각시키려고 했던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지만, 책속의 책 형식으로 고등학교 문제집에 보면 해답을 별책화 하듯이 그런 구성을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조일전쟁 - 세계 최강 해군국 조선과 세계 최강 육군국 일본의 격돌

백지원 지음, 진명출판사(2009)


태그:#조일전쟁, #백지원, #진명출판사, #단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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