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 대선 패배 뒤, 포옹하며 흘린 눈물2009년 올해는 저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한 해입니다.
지난 5월에는 정치적 동지이자 오랜 친구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었고, 이제는 정치적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인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떠나보내고 있습니다. 국민통합과 남북화해, 그리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평생을 바친 두 거목을 한꺼번에 떠나보내자니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표현을 빌자면, '제 생의 반쪽, 제 영혼의 반쪽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 너무나 많이 흘렸기에 이미 모든 눈물이 말라버린 줄 알았습니다만, 제 가슴 저 깊은 바닥에서 깊고 조용한 울음이 또다시 솟구쳐 올라오고 있습니다. 더 이상 울음 울 기력도 없지만 누군가 내 안에서 계속해서 울음 우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님도 참 많이 눈물 흘린 '눈물의 사람'이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경에서 납치되어 생환한 뒤에 기자회견에서 흘린 눈물과 광주 5.18묘역을 참배했을 때 흘린 눈물, 그리고 문익환 목사의 영결식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때 목놓아 울던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눈물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언론에 공개된 것 외에도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눈물을 많이 보이셨습니다. 자기 자신보다는 이 땅의 백성들을 생각하며, "불쌍한 우리 국민들"이라고 말씀하시며 자주 눈물 흘리시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나는 눈물은 92년 대선 때입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다음날 정계은퇴를 선언하시기 전에 당직자들과 먼저 상의를 하러 당사에 나오셨다가, 뒤늦게 도착한 저를 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포옹하며 서럽게 또 서럽게 눈물 흘렸던 기억을 잊을 수 없습니다.
92년 대선 당시 영남출신이지만 YS의 3당 합당을 따라가지 않고 DJ를 지지하며 전국으로 지원유세를 다니면서, 그리고 국민의 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과 정무수석으로 가까이에서 모셨던 김대중 대통령님은 눈물이 많은 만큼 정도 많은 '다정(多情)한 사람'이셨습니다. 정계 은퇴 후 영국으로 유학길을 떠나시기에 앞서서, "정치인은 누구나 자기 이익을 따라 움직이기 마련인데, 떨어질 줄 알고도 지역주의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도전하는 김 의원에게는 앞으로 필요한 곳이 많을 겁니다. 꼭 필요할 때 쓰세요"라며 적지 않은 액수의 금일봉을 건네주셨을 때, 저는 돈의 많고 적음을 떠나 그 세심한 마음씀씀이에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붙잡았던 김대중 대통령님의 따뜻한 손길, 뜨거운 체온이 아직도 제 손끝에 남아 있는 듯한데, 아아 이렇듯 아쉽게 떠나가시다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많은 분들이 김대중 전 대통령님을 남북 화해의 물꼬를 트신 분, 불굴의 의지로 민주화를 이루어내신 분, 그리고 IMF 환란을 지혜롭게 극복하신 분, 대한민국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신 분 등으로 기억합니다. 맞습니다. 그 모두가 김대중 대통령님의 위대한 업적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내기 힘든 그것들을, 모두 이루어내신 위대한 정치가입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김대중 대통령님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용서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집권 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정치적 복수를 할 것이라고 예상김대중 대통령님은 진정한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당선된 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주 학살의 최종 책임자이자, 김대중 대통령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당신께서 정치적 복수를 하실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자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에게도, 자신의 사형수 머리를 깎은 교도관에게도, 어느 누구에게도 보복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두 용서하고 모두 품으셨습니다. 오죽하면 전두환 대통령 스스로의 입으로 "김대중 대통령 재임시절이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라는 고백이 나왔겠습니까? 김대중 대통령님은 보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직 대통령이자 정치 원로로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수차례 청와대로 불러 정치적 자문을 구하기도 하셨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의 가장 위대한 점은 그가 바로 '용서의 사람'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지지자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까지, 자신을 동경에서 납치해서 동해에 수장시키려 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기념관을 지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불과 몇 달 전에 퇴임한 전임 대통령의 일가족과, 후원자, 그리고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몇 달씩 뒤지고 뒤져서 없는 죄라도 만들어 뒤집어씌우려 했던, 그래서 마침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치적 타살'로 내몰았던 그 누구와는 정말 비교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수많은 추억과, 수많은 역사적 평가들을 뒤로 하고 내일이면 김대중 대통령님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의 육신은 우리를 떠나지만, 그가 품었던 민주주의에 대한 원대한 꿈, 그리고 우리 국민들 속에서 발견하였던 강력한 희망, '행동하는 양심'은 우리들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씨앗은 뿌렸지만, 아직 완전히 열매를 거두지 못한 남북통일과 국민통합의 꿈은 우리들 남겨진 자들에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 수많은 정치적 빚을 물려받는 저는,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우리 국민은, 또한 당신을 존경하는 수많은 세계인들은 이제 당신을 떠나보내려 합니다.
평안히 영면하소서. 내가 사랑하였던 사람, 우리 모두가 존경하였던 사람….
당신은 수많은 시련과 고난,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꿋꿋이 이기고 살아남아, 때로는 시련과 고통도 커다란 자산이 된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의지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서로의 가슴을 향했던 남북의 총구에서 총탄이 아니라 꽃송이가 피어나게 한 사람,부둥켜안은 두 정상의 어깨가 총칼보다도, 탱크보다도, 심지어 핵무기보다도 더 강력하게 평화를 지키는 방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평화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비굴하게 독재와 타협하여 한 번 더 사느니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생명의 길이란 것을 삶으로 보여준 '부활의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반평생을 지팡이에 의지해 살아가면서 똑바로 걸음을 걸을 수 없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길이 있으며 그 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길이 아닌 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준 '정도(正道)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자신을 사형으로 내몬 모든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하였던 '용서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보다도, 가족보다도, 정치적 동지보다도 이 땅의 백성들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아파한 '눈물의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죽음으로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거대하고 장엄한 일몰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스스로의 마지막 모든 것을 다 태우면서까지 이 시대를 밝히고자 했던 당신의 위대한 꿈과 희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살아서도 천년, 죽어서도 천년을 간다는 주목처럼, 죽어서 다시 시작되는 또 다른 시대의 역사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토록 당신이 간절하게 희망하고 간구하였던 '행동하는 양심'이 시대의 악과 역사의 어둠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횃불처럼, 새벽처럼 깨어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당신이 드리운 커다란 거목의 나무 그늘 아래, 수많은 나무들이 어깨를 맞추고 거대한 숲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을 나는 꼭 지켜보겠습니다.
당신이 말이나 글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으로,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당신의 유언을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의 목숨과, 온 생애와 맞바꾼 이 땅의 민주주의를 반드시 지켜내겠습니다.
남겨진 우리들을 믿고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덧붙이는 글 | 필자인 김정길은 국민의 정부 초대 행정자치부 장관, 정무수석을 지냈고, 참여정부 대한체육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