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의 그녀는 팔을 뒤로 묶이고 눈이 검은 천으로 가려진 채 말했는데, 그 내용은 대체로 수경의 후배 김인철이 들려 준 것과 비슷했지. 그 외에도 자기가 대학병원에 가기 전 개인 병원에서 낙태 시술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도 태연히 밝혔어.
그녀는 자기가 봉사활동을 한 목적은 오로지 국회에 진출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지. 최근 무의탁노인지원회 회장이 된 것도 국회의원이 되고 싶어 한 짓이라고 했어.
또한 그녀는 자기 남편이 대학 교수가 될 때 얼마의 비용을 썼는지도 밝혔어. 유수 시민단체의 임원이 되는 데에도 얼마가 들어갔으며 어디에서 몇 번 술을 샀는지도 소상히 밝혔지. 그리고 자기 부부는 통장 관리를 따로 하므로 서로의 재산 내역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았다고 덧붙였어.
마지막으로 자기는 지금 보호를 받으며 잘 있는데, 반드시 살아 나갈 수 있다고 했어. 그러기 위해서는 이 비디오를 보낸 사람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한다고 했지.
한편 비디오테이프에는'WANT TELEVISE'라는 영문자가 쓰여 있었는데, 그것은 피랍자의 양심고백 장면을 텔레비전으로 방영해야 한다는 뜻이었지.
경찰청에서는 긴급회의가 열렸지. 하지만 비디오를 공개하는 문제는 이미 경찰청 수준에서 결정할 사안이 아니었어. 비디오테이프는 그 날 저녁 한국 정부의 수뇌 기관에서 다시 틀어졌겠지. NSC 즉 국가안전보장회의 같은 데였을 거야. 수경도 그 사실을 용 부장에게 들어 알았다고 했지.
비디오를 검토한 정부 책임자는 매우 신속한 결정을 내렸어. 바로 공개해 버리자는 것이었지. 고심 끝의 결정이었겠지만 거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계산이 있었다고 봐. 범인이 모호하고 불특정한 다수가 아닌 특정한 소수를 노린다는 점을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지. 사실 염규호 부부처럼 사는 사람이 한국에 몇이나 있겠어? 정상적으로 사는 대다수 국민들에게 '우리는 아니다'라는 안도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지.
다음으로 범인의 요구를 묵살하여 피랍자가 살해됐을 경우의 책임 추궁이 부담스러웠겠지. 그래서 어차피 비디오를 내 보낼 바에야 범인에게 굴복하는 인상도 주지 않을 겸 바로 공개해 버리면 언론이 알아서 방영하리라고 계산한 것이었지.
경찰이 비디오테이프 공개를 내심 반긴 것은 그래야 피랍자가 풀려날 가망성이 그나마 있을 터이고, 그렇게 되면 그녀를 통하여 뭔가 단서를 포착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었지.
그 날 저녁, 텔레비전 채널마다 이숙희의 얼굴과 양심고백 내용이 속보와 뉴스를 타고 방영되었지. 이숙희의 비행이 자진 폭로되자 염카페와 염사모는 다소 위축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뜬금없이 염카페와 염사모 게시판에는 비디오 공개를 정부의 음모로 간주하고 규탄하는 글들이 올랐지. 염규호 부부는 건전하고 성실한 사람들인데 부정적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여론을 냉각시키려는 술책이라는 것이었지. 일부 신문에서는 범인의 요구대로 응하는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기도 했어.
이 모두가 무용한 짓이기도 했지만 더 심각한 것은 다른 데에 있었어. 염규호와 이숙희 부부의 삶을 알게 된 국민 중 일부는 내심 통쾌하게 생각한 거지. 심지어는 살인자를 현대판 의적으로 선망하는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지.
양심고백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자 범인은 약속대로 이숙희를 돌려보냈어. 눈이 가리어진 그녀는 한강 한가운데의 보트에 실려 있었지. 아무튼 범인은 유력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인질을 대담하게 풀어 놓은 것이었지.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범인은 자신이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일이었지.
하지만 이숙희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어. 그녀는 자신이 왜 입을 열지 않는지조차 말하지 않았지.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이 가려진 채로 지냈기 때문에 모른다는 말과 이제 집에 가야겠다는 말만을 되풀이했어.
경찰에서도 그녀를 더 붙잡아 둘 구실이나 권한이 없었지. 물론 경찰이 그 사이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 경찰에서는 범인이 보내온 비디오테이프 제품을 즉시 점검했지. 물론 비디오테이프에 지문 따위의 흔적이 있으리라는 기대 같은 것은 아예 하지도 않았지. 유감스럽게도 비디오테이프는 한국 어디에서나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유명 회사의 표준형 제품이어서 언제 생산, 출고된 것인지도 파악하기가 어려웠지.
사건은 갈수록 어렵고 복잡해지고 있었어. 이 때 쯤 해서 수경이 나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 나는 조금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지난 번 전화 때처럼 응답했어.
"아직도 범인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는 데 성공하고 있어요. 그러니 지금 만나 보아야 도움 말씀을 드릴 것이 없군요. 나에게 아이디어가 생기면 내가 미스 조에게 먼저 전화를 하겠소."
나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어. 수경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지. 나는 수경이 자존심이 강하거나 예절 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사람이더군.
한국에서 발생한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은 이제 세계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어. 일본 신문에 첫 보도가 된 이래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이 사건을 다루었지. 이숙희가 납치되는 날부터 이미 한국의 연쇄살인사건은 CNN의 톱뉴스가 되어 있었어. <타임> 지에서는 특집을 꾸며 보도했지. 이것은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한국이 가장 큰 세계적 뉴스거리로 부각된 일이었지.
경찰과 언론과 국민들은 과연 다음 사건은 어디서 어떻게 터질 것인지에 대해 초미의 관심을 기울였지. 경찰은 여론의 뭇매와 상급 기관의 질책을 동시에 받았어. 하지만 수사는 원점에서 맴돌 뿐,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지. 그 사이 수경은 판교와 서초와 경춘국도와 한강을 두 차례 이상씩은 더 가 보았다고 나에게 말했지.
수경은 한사코 상급자들의 프로파일링 요구를 들어 주지 않았다고 했어.
- 추상적인 유형을 제시하는 프로파일링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경찰이 유형을 체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찰은 소수 집단 또는 개인의 변별성. 그리고 될 수만 있다면 날짜나 장소나 이름 등의 구체적인 것을 원한다. -
수경은 이런 내용을 FBI에서 이미 무수히 듣고 배웠을 거야. 세계적 권위자들 중에서 프로파일링에 실패하여 하루아침에 망신당한 것은 물론 수사 일선에서 소외된 예가 얼마나 많은지를 수경은 마음에 새기고 있었어. 국제적 명성을 지니고 있다가 한 번의 실수로 전락한 프로파일러가 한둘이 아니지.
섣부르고 다급한 상황에서 하는 프로파일링은 수사에 혼선을 줄 뿐이고, 아울러 수사관의 위상과 명예를 순식간에 허물어 버리는 부메랑이 된다는 점을 수경은 잘 헤아리고 있었어. 수사관이 성급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절반의 자격을 갖춘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아무튼 나는 수경의 차분과 냉정은 가히 천부적이지 않고서는 지닐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단서가 전혀 잡히지 않는 상태에서 유일한 실마리는 범인에게 납치되었던 이숙희뿐이었지. 경찰이나 기자들이 그녀를 집요하게 추적한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봐.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 정보도 발설하지 않았어.
"피해자께서 증언을 하셔야 또 다른 희생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요."
"신변 안전을 생각하시는 거라면..."
"무슨 말인지 알아요."
"그렇다면, 더구나 공인으로서 말씀하실 것은 하셔야지요."
"다그치지 마세요. 범인보다 더 무례하군요."
"범인은 예의가 있었습니까?"
"...아무튼 무례하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횡설수설은 교묘한 것이었어. 이른바 '미친척 하기' 수법이라고 할 수 있었지.
덧붙이는 글 | 김대중 대통령 상중에 고인에 대한 추모를 위해 소설 연재를 일시 중단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