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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지역에서는 버스 출발시간이 무의미하다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을 촬영했다는 곳이다. 맨위에 항아리 부분에 보물을 숨겨 두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 알 카즈네(보물창고)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을 촬영했다는 곳이다. 맨위에 항아리 부분에 보물을 숨겨 두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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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은 소형버스(15인승)가 많은 편이다. 대형 버스는 흔하지 않다. 아니면 주로 택시를 이용하던가. 클리프 호텔 주인 할아버지는 인자하신 인상에 지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외출할 때 여행정보를 물어보면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는건 물론이고 아랍문자로 써서 현지인들한테 물어볼 수 있게 배려까지 해준다.(영어가 안 통해서 목적지까지 가는데 애를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매번 숙소 밖으로 나가면 전쟁이 시작된다.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하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의사소통하는 게 힘들고, 버스비나 택시비 등 가격 흥정하는 것도 전쟁이다. 정해진 공정가격이 없어 부르는 게 값인 경우가 많았다.

페트라행 버스비도 처음엔 5디나르를 부른다. 다른 버스를 알아보려고 안타고 있었더니 3디나르를 부른다. 탔다. 버스에 탔는데 출발할 생각을 안한다. 8시 45분쯤 탔는데 10시가 돼서야 출발한다. 아랍에서의 시간은 고무줄이다. 아랍지역 여행을 하려면 인내력부터 길러야 할 듯하다.

좀 과장하자면 담요만큼이나 두꺼운 검은색 천이 버스창마다 드리워져 있다. 처음엔 차도 지저분해 보이는데다 색깔도 어두운 커튼들이 처져 있어서 겁이 났었다. 시간이 지나니 이유를 알 것 같다. 두꺼운 만큼 덜 더운 셈이다. 일종의 단열 효과라고나 할까? 이곳 여인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있는 이유가 짐작이 되었다.

상의는 손목, 하의는 발목까지 오는 옷을 입었는데도 땀이 줄줄 났다. 긴옷인데도 차창으로 햇빛이 들어오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바깥풍경이 궁금해 커튼 자락을 쳐들면 살이 익는 것만 같다. 가도 가도 사막이다. 와서 보니 사막엔 모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자갈도 많고 바위산도 있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사막에서도 자라는 나무가 있다. 끈질긴 생명력이 경이롭다

바깥에 작은 나무들도 보인다. 땅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아주 작은 나무들이 보인다. 어떻게 이런 사막기후에? 친구의 말을 들으니 사막에 적응하는 나무도 있단다. 포자를 가지고 있다가 언제든 물을 만나면 살아난단다. 정말 생명이라는 것은 신기한 것인가 보다.

오후 1시쯤 되어 페트라에 도착했다. 짚차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오더니 픽업 프리(pick up free 숙소까지 타고 가는 비용 안받음)라며 태워서 발렌타인 호텔로 인솔한다. 9인용 도미토리다. 1인당 4디나르. 오늘은 쉬면서 정보 탐색하고 페트라 구경은 다음날 하기로 했다.

새벽 4시쯤 깨었다. 아잔소리 때문이랄까? 여기서 중동여행하시는 분들에게 팁 1가지. 귀마개 가져갈 것. 잠자기 힘들다. 아잔소리(이슬람교에서 신도에게 예배시간을 알리는 소리 -하루에 5번)에 깨고, 낮에는 죽은 도시 같은데(길거리에서 사람 만나기 힘들다) 저녁 이후 사람들이 거리로 나온다. 이들의 왕성한 밤활동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새벽 5시 50분쯤 되어 나섰다. 일찍 나서려고 어젯밤에 짐을 미리 꾸려 두었다. 페트라가 엄청 넓기도 하고 입장료(21디나르-한국돈으로 당시 39000원 정도)도 비싸다기에 하루종일 구경하면서 본전 뽑으리라 작정했다. 저녁무렵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햇볕은 아직 없고 공기는 신선했다. 붐비지 않아서 사진도 많이 찍고 중간중간 그늘에서 쉬었다. 배낭여행의 좋은 점이다. 누가 일찍 오라고 재촉하는 데도 없고 급할 것도 없는 느긋함. 이것이 여행의 매력 중의 하나이리라.

암벽 도시이면서도 바닥의 흙이 곱고 붉은 색을 띠었다. 붉은 흙먼지가 양말에 덮여 양말도 붉은 색이다.

암벽 위에 꽃피운 붉은 도시의 주인은 어디 가고...

페트라는 요르단의 국가적인 보물이자 가장 잘 알려진 유적지로, 수도 암만에서 왕의 대로를 따라 남쪽으로 240㎞ 정도 떨어져 있다.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페트라는 2000여년 전 요르단 남쪽에 거주했던 나바테아인들의 유산이다.

기원전 7세기경 유목민인 나바테아인들이 이곳을 점령한 후 향료교역의 중심지로 발전하면서 이들은 이곳에 세련된 문화와 신전, 왕궁, 공공건물, 왕족과 일반인들의 무덤, 일반 거주지 등을 건설했다. 로마제국의 침략을 받고서도 여전히 번성하다가 무역로가 바뀌면서 점점 상업이 쇠퇴했다. 기원전 6세기 경 발생한 지진에 의해 폐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에서 잊혀진 도시였다. 젊은 탐험가 부르크하르트가 발견하기 전까지는.

지금도 발굴 중이다. 그러나 발굴된 건축물들 중 상당수는 용도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페트라로 들어가는 입구에 높이 100m이상 되는 암벽으로 이루어진 좁은 통로다. 이렇게 좁은 통로가 2km가량 이어진다.
▲ 시크 페트라로 들어가는 입구에 높이 100m이상 되는 암벽으로 이루어진 좁은 통로다. 이렇게 좁은 통로가 2km가량 이어진다.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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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매표소에서 좀 걸어 들어가자 시크(벽)가 맞아주었다. 겉에서는 도시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높이 100여m가 넘는 암벽이 협곡을 이루고 마치 보물을 숨겨둔 양 안의 모습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다.

페트라에 있는 왕들의 무덤이다.
▲ 페트라 왕족의 무덤 페트라에 있는 왕들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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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바위가 만든 협곡을 따라 2㎞ 가량  걸어가면 갑자기 넓은 곳이 나타나면서 정면에 화려한 조각이 나타난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최후의 성전->을 촬영했다는 알 카즈네(Al Khazneh-Treasury, 보고)다. 조각솜씨는 화려했다.

기원전 1세기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2층으로 조각이 되어 있다. 건물 정면 맨 위의 가운데 부분에 항아리모양이 조각되어 있는데, 그 속에 나바테아인들이 보물을 숨겨놓았다는 전설 때문에 보고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층 건물 안쪽으로는 방이 있는데 비어 있다.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은 오벨리스크의 무덤이라 하고 1층은 식탁모양을 닮았다 하여 트리클리니움 무덤이라 한다.
▲ 오벨리스크 무덤과 트리크리니움 무덤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은 오벨리스크의 무덤이라 하고 1층은 식탁모양을 닮았다 하여 트리클리니움 무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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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적지나 이집트의 피라미드 등은 거석을 옮겨다 축조한 반면에 페트라는 돌산 자체를 조각하고 다듬어서 세운 독특한 도시다. 알 카즈네(보고) 오른편에 있는 원형극장 역시 나바테아인들의 기발함과 추진력이 빚어낸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약 7000-8000여 명을 수요할 수 있는데 바위를 그대로 깎아 40층의 계단식으로 만들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장례식이나 다른 종교 의식을 거행했겠지만 로마인들은 공연장으로 사용하였다.

페트라의 무덤은 암벽을 파서 만든 것들이다.
▲ 로마병사의 무덤 페트라의 무덤은 암벽을 파서 만든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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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여행정보에는 넓고 더워서 지치기 쉬우니 체력 안배를 잘 하라고 씌어 있었다. 우린 너무 잘했기 때문인지, 지치지 않은 상태에서 제일 꼭대기에는 엣데이르(수도원)이라 부르는 건물에 도착했다. 페트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건축물이다. 건물 내부 벽면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어서 수도원으로 불렸다. 건물을 세운 원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내부에 십자가를 새긴 것으로 미루어 AD4세기 이후 비잔틴 시대의 교회 건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페트라의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이 있는 이곳이 제일 높은 곳이다. 올라서면 사방이 시원하게 잘 보인다.
▲ 페트라의 엣 데이르(수도원) 페트라의 꼭대기에 있는 수도원이 있는 이곳이 제일 높은 곳이다. 올라서면 사방이 시원하게 잘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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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트라 건물들의 내부는 단조롭다. 돌을 파내고 네모난 방들을 만들어 놓았고, 아무런 장식도 없다. 그러나 암석 자체가 갖고 있는 여러가지 (주로 붉은 계통의) 색깔과 기하학적 무늬나 물결 무늬들이 어떤 벽화나 조각장식보다도 화려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페트라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낸 교향곡이었다. 붉은색 사암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와 식물이 자라지 않는 황량한 바위를 파서 새겨놓은 건축물, 집, 무덤들. 나바테아인들은 척박한 자연에 순응하며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닌 것을 이들도 알았을까?

 페트라 발굴 중 아직 20여%만 발굴된 것이 이 정도라 한다.
▲ 페트라 대신전 유적 페트라 발굴 중 아직 20여%만 발굴된 것이 이 정도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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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돌산을 다듬어서 불후의 전설적인 도시를 남겼으나, 이들에 대한 역사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나바테아 문자로 기록한 4000여 점에 달하는 기록 중에 역사와 관련된 내용은 거의 없다. 역사가들이 앞으로 풀어내야 할 수수께끼다.

페트라는 모두가 이렇게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이다.
▲ 캄브리아기의 붉은 사막 페트라는 모두가 이렇게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바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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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덥고 힘은 들었지만, 암벽의 붉은색감과 자연이 빚어낸 무늬들이 주는 느낌은 환상적이었다. 불타오르는 듯한 느낌. 석양을 받으면 붉은 색은 더욱 진해진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잠자고 있는 감성이 스멀스멀 일어난다. 전엔 느껴본 적 없는 흥분. 한동안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자는 잔소리꾼?

암벽을 파서 방을 만들고 가운데 올리브 나무가 서있다(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나무) 암벽 위에도 이런 나무들이 자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군데군데 꽃도 잘 가꾸어 여행자들이 많이 들러서 쉬며 차를 마시고 간다.
▲ 베두윈 할아버지 집 암벽을 파서 방을 만들고 가운데 올리브 나무가 서있다(사진 오른쪽 끝에 있는 나무) 암벽 위에도 이런 나무들이 자랄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군데군데 꽃도 잘 가꾸어 여행자들이 많이 들러서 쉬며 차를 마시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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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이 알려준 베두윈 할아버지의 집도 찾았다. 동굴 박물관 뒤쪽에 있었다. 말이 집이지. 암벽을 파서 방을 만들고 정원을 만들었다. 집(암벽에 있는) 한가운데 서 있는 올리브 나무가 그림같다. 할아버지가 손수 끓이신 티(실론티와 유사한 맛)한잔과 쉽게 구할 수 없을 것 같은 비스켓 몇개를 내놓으셨다. 할아버지는 마주 보이는 암벽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단다.

할머니는 없다고 했다. 혼자가 편하다고 했다. 있어봐야 잔소리만 할 뿐이라고. 여자를 잔소리꾼으로 보는 건 동서양이 마찬가진가보다. 갖고 있는 사탕이나마 드리려 했더니 됐단다. 피곤한 터에 잘 쉬고 인사를 하고 기념으로 사진도 한 장찍고 헤어졌다. 많이 쉬면서 걸었는데도 많이 피곤했다. 더운 지역에서의 여행은 녹녹치 않았다. 

와디무사에서 바라본 석양
▲ 페트라의 석양 와디무사에서 바라본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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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뷔페(1인당 3디나르)를 먹었다. 종류도 많고 맛있었다. 평상시에 잘 못먹다 욕심껏 먹고는 배불러 어쩔줄을 모른다. 방에 들어가려는데 호텔관계자인 듯한 사람이 잡는다. 파티가 있다고. 어울리기 좋아하는 내가 빠질 수 없지. 앉아 있는데 300cc정도 될만한 음료수컵을 내민다. 술이었다. 반가왔다. 색깔로 보아 맥주인 줄 알았다. 맥주치곤 독하다고 생각했다.

2,30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이 한쪽으로 모였고 이름은 모르겠지만 만돌린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여행자들은 흥겹게 박수도 치고 분위기가 무르익어 춤들도 추었다. 그러는 중에 술이 돌았다. 아까와 똑같은 잔으로 두 잔을 마셨다. 공짜라니 웬 떡이냐 싶었다. 파티가 끝나고 몽롱한 상태로 내방으로 들어와 쓰러져 잤다. 그 이후는 의식이 없다.


태그:#페트라, #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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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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