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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먹는가 아니면 먹기 위해 사는가, 라는 자못 대답하기 난처한 질문이 있다. 하긴 먹고 사는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그저 지금 사는 대로 그렇게 살고 지금 먹는 대로 그렇게 먹으면 그만일 것 같지만 거기에 새삼 의문 부호를 달고 '의미'를 찾노라면 의외로 심각해지는 게 먹고 사는 일이다. 왜냐면, 그게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면서도 그것만으론 '사람'이 '삶'을 '왜' 일구어 가는지를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과 얼핏 떨어져 사는 듯 보이는 나는 오랫동안 '스펙'이라는 말을 잘 몰랐다. 그러고 보니, '스펙'만큼 '현실'과 어울리는 말이 또 있을까 싶다. 4학년 정도는 되어야 취업을 고민하던 때는 이미 옛일이 된지 오래고 대학 입학일이 곧 취업준비에 뛰어드는 날과 같은 말이 되어버렸다. 그 오랜 이야기가 세상에 다 퍼져나갈 때쯤 되어서야 비로소 '스펙'에 덮힌 세상을 발견한 것 같다. '스펙'과 '현실'이 서로 얼마나 오랜 우정(?)을 나누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은 이젠 두 말하면 잔소리가 된 듯하다. 

 

인문학이 위기다, 라는 말을 들어보았으리라. 인문학은 죽었다, 라는 심각한 말도 어디선가 들었을지 모른다. '스펙' 앞에서 인문학은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내지 몽상가로 치부되기 십상인 세상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누구 잘못이냐, 하는 질문은 상황만 어렵게 만들 뿐이다. 무엇부터 잘못된 것이냐, 하는 질문 역시 답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왜 사냐고 물으시면 그냥 웃지요, 라는 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대한 가장 '현실친화적'이고 의미심장한 '바디랭귀지'가 아닌가 싶다.

 

그래도 사람들은 틈만 나면 너나 할 것 없이 의외로 자주 묻는다. '왜 사니?'

 

사람은 먹어야 산다! .... 아니지! 사람은 물어야 산다고, 물어야

 

'왜 우리 대학들은 삶의 의미 묻는 일을 포기했나?'

 

정해진 대로 가르치면 그만이지 왜 교육 목표와 방향에 대해 길고 긴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느냐고 묻는 학생이 있다...면 그 앞에서 가르치는 이는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온몸으로 '현실'을 반영하는 학생들 앞에서 뜬금없는 소리와도 같은 '왜'를 뱉어낸다면 그 여파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내 인생 책임질 겁니까, 하고 반문하는 질문 아닌 질문만 피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 않을까.

 

앤서니 T. 크론먼은 <교육의 종말>(모티브북 펴냄, 2009)에서 삶의 의미에 관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진정한 '스펙'이라고 소리 높여 외친다. 귀 담아 듣는 청중이라고는 분명 몇 안 되는 현실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는 예전에는 인문학을 가르치는 이들이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과 개인적으로 조우할 때 학생들이 유익한 도움을 얻으리라 믿었다"고 회상(!)한다. 그 기억이 생생해서인지, 자못 담대하게 그 철 지난 추억을 현실로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작은 외침을 그는 책에 담았다.

 

"성찰해 보건대, 만일 내게 가장 중요한 대상이나 인물이 내가 가장 중요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그런 상황을 조정하거나 수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또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혼란스럽다면, 이를 명확히 하는 것보다 절박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나의 최고 관심사와 관련된 오류나 무지가 내 삶 전체에 잘못된 의미를 부여하거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은 내가 궁극적으로 무엇에 신경 쓰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으로 재구성될 수 있다."(<교육의 종말>, 37)

 

아주 자연스럽게, 학원 순례(?)를 하는 어린 학생들이 떠오른다. 대학생도 저 정도는 아니겠다 싶을 만큼 하루 일과가 그야말로 꽉 찬 초등학생들이 적지 않다. 말하자면, 21세기 교육 현장에서 '스펙'은 더 이상 취업전선을 코앞에 둔 대학생 언니 오빠들의 문제만이 아니다. 너도 나도 현실을 모르는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그렇게 학교에서 학원으로, 다시 학원에서 학교로 끝 모를 순례를 다닌다. 순례를 하는 이유를 자기 자신조차 생각해보지 않았을 때조차. 그만큼 순례를 떠나는 이들이 많아서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질문을 한참 앞서 간다.

 

우리 대학생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시대 대학생은 더 이상 '생각하는 사람'과 가깝지 않다고 한탄하는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 이들이 적지 않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 그러니까 '왜'라는 짧고도 중요한 한 마디를 진지하게 입에 담는 움직임이 이 시대에는 얼마나 있을까 싶다. 먹고 살 방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차라리 사람이란 어찌 살아야 올바로 사는 것인지를 배웠다고 해야 할 서당에 대한 즐거운 추억(!)이 여전하지만 그건 그저 옛 이야기로만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도구'를 '생산'하는 게 교육과 교육기관의 지상과제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대에서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 않고 무엇보다 당장 써먹지도 못할 그 무엇을 위해 삶을 투자(!)하라는 말은 아무래도 씨가 안 먹힐 소리다. 그래도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 부활을 간절히 바라며 짐짓 확신도 하는 앤서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하튼 묻지 않을 수 없다. 삶이란, 배움이란 무엇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인문학은 학술연구적 이상을 수용함으로써, 삶의 목적에 관한 질문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져 인문학의 목적의식과 자기 존엄성이 손상되었다. 회의주의적 다원주의 시대에도 이 질문에 진실성을 부여했던 세속적 인문주의 전통이 근저에서 무너졌다. 인문학이 방향을 잃고 새로운 목적과 방향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인문학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1960년대의 정치적 사상과 그 이후 인문학을 괴롭혔던 정치적 공정성의 문화를 환영했다. 그들은 인문학의 특별한 지위를 회복하고 세속적 인문주의 붕괴로 야기된 권위의 상실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학술연구적인 이상을 수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학술연구 중심의 이상은 인문학에 커다란 해악을 끼쳤다. 1960년대 이후로 인문학을 지배해왔던 정치적 공정성의 문화로 세속적 인문주의의 권위가 복원되기는커녕 더욱 더 손상되었기 때문이다."(같은 책, 107)

 

묻지 않는 삶과 교육, 그대로 좋다 할 수 있나 

 

앤서니 T. 크론먼만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리라. 그렇지만 앤서니의 <교육의 종말>처럼 '삶의 의미'를 밥 먹는 일보다 더 중요하게 내세우는 일이 그리 많아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객관성, 중립성, 공정성을 중요한 평가 잣대로 삼는 세상 아래에서 '왜'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협한 태도가 담긴 무례한 질문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앤서니는 삶의 의미를 묻는 인문학 고유의 사명이 퇴보하게 된 현실에 대해 고민하면서 그 이유를 살펴보았다. 책은 그 고민이 남긴 흔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보인다는 이유만으로도 객관성, 중립성, 공정성 등이 난무(?)하는 대학 현장에서 '삶의 의미'와 '왜'가 자리 잡기 힘든 현실에 대해 그는 고민했다.

 

인문학이 제 할 일을 잃고 길을 헤맨 흔적을 되짚어보고 인문학이 잃어버린 본래 모습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앤서니는 고민했다. 인문학은 물론이고 대학이라면 어느 분야에서든 당연히 '왜'를 묻던 모습을 그는 회복하고자 했다. 그게 우리 모두의 일이기도 하다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으면서.

 

교육의 종말? 교육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대답은 달라질 것이다. 앤서니가 대학 교육이 "다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게" 하자고 말하는 것 역시 교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여하에 따라 서로 다른 반응을 받게 될 것이다. 각자 알아서 묻고 대답할 일일 뿐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할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삶의 의미'. 어떤 면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면서도 우리 모두가 관여해야 할 일이 '삶의 의미'라는 것을 누구나 동의할 것인가를 우리는 지금 각자 묻게 된다.

 

앤서니 바람대로라면, 인문학의 부활은 바로 우리 모두가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시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교육의 종말에 대해 동의의 마침표를 찍느냐 아니면 반대의 의문부호를 붙이느냐는 문제 역시 인문학과 '삶의 의미'가 지닌 중요성을 얼마나 인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말을 좀 바꾸자면, 인문학의 부활이 앤서니에게만 중요한 일인지 몰라도 삶의 의미를 묻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하다. 그런데 둘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데서 앤서니의 말, 말, 말이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딱 하나만 묻자. "왜 사나요?"

덧붙이는 글 | <교육의 종말-삶의 의미를 찾는 인문교육의 부활을 꿈꾸며> 앤서니 T. 크론먼 지음 / 한창호 옮김 / 모티브북 펴냄  2009. 7. / 1만5천원
(원서) Education's End: Why our colleges and universities have given up on the meaning of life by Anthony T. Kronman(2007)


교육의 종말 - 삶의 의미를 찾는 인문교육의 부활을 꿈꾸며

앤서니 T. 크론먼 지음, 한창호 옮김, 모티브북(2009)


태그:#교육의 종말, #앤서니 T. 크론먼, #인문학,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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