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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던 여름방학이 끝나고 드디어 아이들이 개학을 했습니다. 아이들이 '방학'하면 엄마들은 '개학'이라는 말을 누가 지어냈는지 딱입니다. 물론 제 경우는 좀 다릅니다. 아이 학교가 급식을 안하기 때문에 도시락을 싸니 오히려 방학이 좋습니다.

어쨌든 아이의 입에서 심심하다는 소리는 안 들으니 좋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2009년의 하반기 학기를 시작했습니다. 한 학기를 끝내면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뭘까요? 네, 바로 성적표입니다. 딸들이 다니는 학교는 성적표라는 이름으로 오지는 않습니다. 고1 딸은 <1학기 기말 평가서>라는 이름으로 오고,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은 <성장기록>이라는 이름으로 옵니다.

"딸, 학교에서 왜 평가서가 안 오지?"
"음... 왔어."
"어딨어? "
"음... 나한테 있어."
"왜 그걸 니가 갖고 있어? 엄마가 보는 건데. 빨리 줘" 
"엄마. 꼭 엄마가 봐야 돼?"
"야! 그럼 엄마 보라고 온 건데 성의로라도 엄마가 봐야지. 빨랑 내놔라."

딸이 내민 성적표, 눈에 불똥튀다

큰 딸이 학교에서 우편으로 날아온 평가서를 자기 방에 숨겨놓고 밍기적거리며 제게 보여주길 꺼려합니다. 그때 눈치빠른 제가 '감'잡았습니다. '이것이 안 보여주고 싶은 이유가 뭔가 있구나'라고요. 한 학기를 정리하며 날아오는 평가서는 아이가 학교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전반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은 긴장도 하고, 두근거림도 있습니다. 

큰딸이 억지로 방에서 삐쭉 내민 한 학기 평가서를 죽죽죽 읽어 내려가는 제 눈에서 불똥이 튑니다. '아니 이걸 그냥 확!' 딸은 눈치가 9단인지라 지 방에서 나오지도 않습니다. 다 읽고 딸의 방문을 박차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심호흡을 했습니다. 제가 인내심이 무쟈게 많으니 망정이지 보통 엄마였으면 큰딸은 반 죽었습니다. 

아이의 평가방식, 점수가 아닌 공동체성과 자기 주도성

딸들이 다니는 학교는 과목별 점수가 없습니다. 점수로 아이를 평가하지 않으니까요. 수업태도나 열의, 공동체성과 자기 주도성, 성실성 등을 가지고 평가 합니다. 큰딸은 이번 1학기에 진행된 '움직이는 학교 수업'을 미이수 했습니다. 그 미이수는 짐작했던 대로고, 제가 원했던 대로입니다. 제가 옆에서 보기에도 성실하지 않았기에 절대 이수를 받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 제 속이 터졌을까요? 제 뜻대로 성실하지 못한 과목은 미이수가 됐는데 말입니다.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저는 제 딸이 성실하고, 공동체성이 뛰어나고, 봉사도 잘하고, 이런 걸 기대했는데 그런 것은 영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닥 공동체성도 별로고,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쬐금 성실하고, 봉사는 남의 일이고, 개인적이고, 암튼 부모인 제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평가서가 왔습니다.

 큰딸의 1학기 학기말 평가서- 이름하여 <성적표>
큰딸의 1학기 학기말 평가서- 이름하여 <성적표> ⓒ 권영숙

내가 딸에게 원하는 건 무얼까?

큰 딸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 안에서 화가 뽀록뽀록 올라와서 밥도 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 제 심정을 어찌 알았는지 딸이 그날 저녁은 굶었습니다. 평가서를 가지고 한마디 하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이 올라왔지만 그 마음 상태로 대화를 하게 되면 제가 엄청 화를 내겠다 싶어 참았습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내가 정말 딸에게 원하는 것은 무언가.

첫째, 성실해라.
둘째, 남도 생각해라.
세번째, 적당히 공부도 좀 해라.
네번째, 엄마 말 좀 들어라.
다섯째, 밥 좀 잘 먹어라.

이 다섯 가지가 별 고민없이 탁 올라옵니다. 그런 제 자신에게 다시 물어봤습니다.

- 성실? 너는 그만할 때 성실했니? 성실 안하면 안되니? 
- 남도 생각해라? 나도 이기적이잖아. 원래 인간은 본래 이기적이지 않나? 내가 남을 배려하는 거는 남한테 싫은 소리 듣기 싫어하는 게 있어서잖아.
- 적당히 공부도 좀 해라? 공부 하고 안하고는 딸의 문제지. 니 문제가 아니잖아? 
- 엄마 말 좀 들어라? 아니 내 말 들어서 나처럼 되라고? 그게 과연 꼭 좋은가? 내 수준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면 내 말을 좀 안들어야지. 
- 밥 잘먹어라? 아니 어린애야? 밥 먹는 걸로 싸우게. 배고프면 잘 먹겠지.

한 가지 한 가지 생각해보니 좀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화딱지가 나서 한 이틀은 딸과 말하기도 싫다가 제 자신이 딸에게 엄청 기대를 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나니 좀 가볍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친정엄마가 제 성적표를 보고 펄쩍펄쩍 뛰셨던 그 심정을 이해하게 됐습니다.

딸이 못마땅한 것에 핵심은 내 뜻대로 안 돼서

저는 딸을 성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어쨌든 다른 평가기준으로 못마땅해 합니다. 제가 지금 기분나쁜 것에 핵심은 내 뜻대로 아이가 자라주지 않아서입니다.

딸이 좀 공동체성이 뛰어나고, 봉사 좀 잘하고, 샘들이 '어머니 잘 키우셨어요'라고 말해주는 딸로 자라길 바랐는데 이건 도무지 제 뜻과는 달리 자기 맘껏 '비 공동체적'이고, '비 봉사적'이고, '어머니를 안닮았네요'라는 소리를 듣게 만드니 속이 터졌던 것이지요.

그나마 오십보, 백보지만 둘째의 성장기록을 보면서 위안을 삼았습니다. 반찬을 시원스레 나누어 먹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기록에 웃음이 터져나오고, 6학년이 됐는데도 맞춤법이 전혀 맞지 않는 딸의 '스스로 평가'를 보면서도 고쳐줘야겠다는 생각이 안듭니다.

 딸의 학교에서 보내온 <성장기록>
딸의 학교에서 보내온 <성장기록> ⓒ 권영숙

                                                      
 선생님들이 기록한 딸의 <성장기록>
선생님들이 기록한 딸의 <성장기록> ⓒ 권영숙

"엄마. 엄마가 샘들한테 내 생활 보고했어?"
"아니. 엄마가 니 생활을 왜 샘들한테 보고해?"
"그런데 샘들이 어떻게 감시한 것처럼 나를 알아?"
"해주야. 니가 오죽 튀냐? 엄마도 너 학교 생활 안봐도 훤히 알겠다."
"짱 기분나빠. 뭐냐구. 왜 저렇게 자세히 써놓냐고."

딸에게 나오는 잔소리, 마음 속 딱지로 접다

둘째 딸이 샘들이 쓰신 <성장기록>을 보면서 자신을 감시한 것처럼 자세해서 기분이 무척 나쁘답니다.

딸들의 평가서를 보고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으니 부모로서 무슨 말이라도 해줘야 하는 건 아닐까 고민됐습니다. 적어도 '다음에는 이런 말 안 듣게 해라'든지 '수업시간에 성실하게 해라'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고민만 하고 잔소리는 마음 속에 딱지 접듯 접었습니다. 

왜냐면 어쩌면 부모인 저보다 딸은 더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싶었습니다. 실망을 희망으로 만들려는 아이한테 부모인 제가 절망을 확 끼얹으면 안될 것 같아서 꼭꼭.
그런데 혹시 이 딸들이 제 이 깊은 속과는 달리 아무 생각이 없다면?
아이고. 혈압이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간디학교#성적표#성장기록#대안학교#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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