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학생 수가 많아 콩나물 교실로 수업을 해도 교실 수가 모자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해야 했고, 분교까지 두었던 학교였습니다. 그러던 학교가 범국가적으로 추진되었던 산아제한, 셋째아이를 낳는 게 무슨 죄라도 되는 것처럼 이런저런 제도로 불이익까지 주던 미래지향적(?)인 국가정책과 이농현상으로 입학생이 줄어들어 2002년에는 면소재지 학교의 분교로 전락하더니, 분교의 규모조차 유지하지 못해 금년 초에는 폐교가 되었습니다.
지금이야 중앙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미끼를 던지듯 이런 혜택 저런 지원을 약속하며 출산장려에 혈안을 올리고 있지만 그때의 산아제한은 집요하기조차 했습니다. 아이를 많이 낳는 건 가난의 대물림이 된다는 걸 상기시키는 포스터와 아이를 많이 낳는 건 국가의 미래를 좀먹는 반 애국적 행위라는 걸 암시하는 표어들이 곳곳에 붙어있었습니다.
산아제한 정책은 포스터나 표어를 통한 계몽에서만 그치지 않고 셋째아이부터는 각종 지원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물론 예비군훈련에 동원된 남자들에게는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에서 면제시켜준다는 떡밥이 던져지곤 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라고 하는 교육보다도 훨씬 더 국가의 미래에 근간이 되는 인구정책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미래지향적인 산아정책을 가늠하게 하는 현주소였습니다.
백년대계는커녕 반세기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근시안적인 산아정책 파편과 이농현상의 파고로 밀려 온 농촌인구의 급감이 입학생 감소로 이어지며 재학생이 줄어들었으니 폐교라는 수순은 피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모교, 향수와 추억의 공통분모누구에게나 자신이 졸업한 학교, 특히 어린 시절을 6년이나 함께 한 초등학교는 향수이며 추억입니다. 도농이라는 출신지역과 개인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긋지긋 했던 가난조차도 아름답게 기억되고, 아옹다옹 다퉜던 악동의 친구들조차도 그립게 하는 게 졸업한 초등학교를 추억하는 공통분모 중 하나일 것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처럼 추억의 공통분모로 아름답거나 그리운 추억으로 공유하고 싶은 필자의 초등학생 시절 모교, 충북 괴산에 있는 칠성초등학교 외사분교의 현주소는 폐교라는 현실을 넘어 황폐화되어 있었습니다.
추억까지 황폐화시키는 폐교 현장등하교를 할 때면 선생님을 대신해 복장검사라도 할 듯 당당하게 서 있어 가슴까지 설레 게 했던 교문은 기우뚱 뒤틀어져 있습니다. 쇠사슬로 묶고 자물통을 채워 출입을 막고 있는 교문에 덕지덕지 칠한 페인트는 금방이라도 벗겨질 듯 툭툭 불거져 있었습니다. 철창이 되어버린 교문 사이로 들여다보는 학교 운동장은 흉가를 연상시킬 만큼 잡풀만 무성합니다.
아무 곳에나 앉아 지그시 눈만 감으면 떠올릴 수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조차 깡그리 무너트릴 만큼 황폐한 모습입니다. 뜀박질하던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와 웃음소리가 만발하던 운동장에는 성큼 들어서기가 망설여 질만큼 잡초만 무성합니다. 철문이 닫혀있어서 들어갈 수도 없었지만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을씨년스럽기만 한 풍경입니다.
여느 때라면 고단한 심신이 위안을 받을 만큼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었던 곳이지만 폐교 된지 반 년 만에 흉가처럼 변해버린 모교는 추억조차 흉흉하게 하는 안타까운 현장입니다.
하루라도 빨리 정비되거나 관리되길마냥 넓기만 한 것도 아닌 운동장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잡초만이라도 제초된다면 이렇듯 흉가처럼 방치 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는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을 뒤로하며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 주체가 괴산군교육청이던 어디이든 간에 현존하는 주민들은 물론 고향을 방문하는 졸업생들의 추억조차도 황폐화시키는 폐교, 칠성초등학교 외사분교가 하루라도 빨리 정비되거나 관리되길 갈망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기사 중 사진은 8월 31일 오후 현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