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정권교체 성공!"
"모두의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54년 만에 자민당 정권의 붕괴를 가져온 일본 중의원 선거의 승리자 민주당의 당선 인사다. 반세기에 걸친 자민당 천하가 무너진 것은 실로 일본 역사에 충격을 주는 일이자 동아시아 전체에도 중대한 의미를 던진다.
"당신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이 주도한 전후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대 소련 적대전선인 냉전과 결합해서 유지되었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미국은 동아시아(한국과 일본)에서 지난 시기에 자신과 싸웠던 파시즘 세력을 복원, 결집시킴으로써 극우 이데올로기를 가진 근본주의자들이 자본주의를 지배하도록 만들었다.
미 군정기를 거쳐 형성된 한국의 이승만 정권이나 일본의 자민당 체제 모두 이러한 미국의 세계전략상의 산물이었다. 한국의 경우 지난 10년의 정권교체기가 있었지만 길게 보면 일본의 자민당 체제와 다를 바 없는 우파세력의 장기집권체제 연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나라의 우파는 자본주의체제의 기득권을 탐욕적으로 독점해오면서 그 사회의 진정한 연대나 결속, 공동체적 우애관계를 깨뜨려온 세력들이다. 그들의 탐욕과 기득권의 팽창은 신자유주의 체제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된다.
미국의 부시 정권은 가장 강력한 군사력으로 위세를 떨쳤지만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의 절정에서 몰락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셈이었다. 미국에서 오바마 정권이 등장한 것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라는 점 이상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경로 수정을 요구하는 내외의 힘이 현실화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은 이미 그러한 길로 가고 있고, 라틴 아메리카도 그러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도 결국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하토야마 "시장근본주의 끝장내야"
중의원 선거가 있기 전인 지난 8월 26일 민주당을 이끈 하토야마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에 기고한 글은 이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의식과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긴 글이라 중요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하토야마의 생각을 들여다보자. 그의 글은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철학적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난 후 일본은 흔히들 세계화라고 불린 미국 주도의 시장 근본주의에 계속 휘둘려 왔다. 자본주의의 근본주의적 추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고, 그 결과 인간의 존엄성은 상실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덕이나 절제가 없는, 아무런 제동이 걸리지 않는 시장 근본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어떻게 끝장내고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시민들의 삶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직면한 문제다."
이 글을 보면 하토야마가 자민당에 뿌리를 둔 자유주의 우파 정치인인가 싶을 정도다. 이건 어찌 보면 좌파 전향 선언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수준이다. 한국에서 어떤 정치지도자가 이런 식으로 말하면 그의 당선을 장담할 수 있을까? "끝장낸다(put an end to~)"는 식의 표현도 과감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그는 공동체적 우애, 결속의 가치를 내세운다.
"이제 우리는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자유, 평등, 우애처럼 우애의 가치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자유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위험을 조절할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우애란 현재 세계화로 이름 지워진 자본주의의 극단적 현실에 대처해나가면서 일본의 전통 속에서 길러진 지역 경제의 현실을 끌어안고 나가는 방식이다."
"우애의 가치"가 소중하다
하토야마는 이렇게 자신의 우애 개념을 설명하면서, 오늘날 겪고 있는 일본 사회의 위기는 미국식 자유 시장 경제가 이른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보편적 기준이라는 생각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못 박는다. 그래서 그는 시장 근본주의를 좇는 자민당과는 달리, 일본 민주당은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고 일본의 전통적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는 방향을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하는 전통적 경제 활동이나 가치는 시장 근본주의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환경, 자원의 보존, 공동체적 삶이며, 시장 근본주의는 이런 것들을 계속 파괴하고 해체해 왔다는 것이며, 이런 것들을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선의에 맡겨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정치인으로서 우리의 책임은 이렇게 세계자본주의 체제가 내버리도록 만든 경제외적인 가치들을 다시 조명해서 공동체적 결속을 회복하고 자연과 환경을 지켜내며 복지와 의료시스템을 재건하고 보다 좋은 교육과 육아지원을 펼쳐나가며 빈부의 격차를 교정해나가는 일이다."
그런데 그의 우애의 개념은 단지 일본사회 내부로만 향해 있지 않다.
"이 우애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또 다른 국가적 목표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창설이다. 물론 미-일 동맹은 일본 외교의 근간으로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자신이 아시아의 일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계속되는 활력을 보이고 있는 동아시아야말로 일본의 삶이 근거를 두어야 할 곳이며 따라서 이 지역을 위한 안정된 경제협력과 안보체제를 반드시 건설해나가야 한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꿈꾸는 신세대의 등장
이러면서 그는 세계적 주도권을 복원하려는 미국과, 그걸 겨냥하고 달려가고 있는 중국 사이에 낀 동아시아는 유럽통합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역 결속의 기반을 새롭게 다져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민당을 창당하고 총리까지 지냈던 그의 조부 하토야마 이치로가 85년 전 번역했던 쿠덴호브-칼레르기의 <판-유로파(범 유럽주의)>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고 있다.
"모든 위대한 역사상의 생각들은 유토피아를 꿈꾸며 시작하고 그것은 현실로 귀결된다. 그 생각이 유토피아의 꿈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현실이 될 것인가는 그 이상과 그 이상을 실현하려는 자신들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렇게 보면 일본이 선택한 하토야마와 민주당은 단지 자민당과는 다른 정치적 존재라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일본과 세계를 꿈꾸기 시작한 세대의 등장임을 확인하게 된다. 시장 근본주의를 극복하고 이를 통해 칼 폴라니가 그토록 강조했던 사회, 즉 공동체의 복원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과 자연의 가치가 존중되는 일본,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우애의 가치를 공유한 동아시아를 열망하는 일본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매우 소중한 변화다.
물론 정치지도자는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다. 그의 의지와 현실이 충돌할 수 있으며, 정치 외교적 수사와 현실의 국가적 이익이 대립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전체의 역사적 변화를 짚어내면서 새로운 일본과 동아시아를 전망하는 정치 지도자의 출현은 일본사회를 위해 축복이자 동아시아를 위해서도 축복이다.
1868년 일본의 명치유신 이후 근대화 프로젝트는 이제 다른 길로 접어들 수 있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약탈적이며 탐욕적인 자본주의 체제 건설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면서 함께 살아가는 미래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정치적 방향전환은 세계체제의 중대한 변모를 암시하고 있다.
이명박이 이끄는 한국만 나홀로 역주행
세계는 이렇게 변하고 있다. 미국은 오바마를 선택함으로써 미래를 택했다. 일본은 하토야마의 민주당에 압승을 가져다주면서 미래를 택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쯤 있는가?
하토야마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리게 한 자본주의 문제"를 정면으로 들고 나왔다. 대부분의 국내언론들은 이 대목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그런 점이 부각될까 봐 일부러 외면하고 있다는 혐의가 짙다. 모르고 있다면 더욱 문제다.
신자유주의 체제 붕괴라는 현실에 직면한 미국의 오바마나, 이에 토대를 둔 세계화 체제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일본사회의 일상을 수술해야 할 책임을 지게 된 하토야마 유키오나 모두 동병상련(同病相憐)인 셈이었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미래를 택했다.
그러나 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만이 여기서 혼자 뒤로 돌아 이미 무너져 내린 다리 위를 위태롭게 밟고 있다. 무지와 무모함이 결합된 자멸의 길로 가는 행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야만성에 "이건 아니다", 라고 방향전환을 선택한 미국과 일본, 그리고 그 야만의 늪 속으로 계속 빠져드는 한국의 운명이 확연히 갈라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당신이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정권교체 성공!", "모두의 용기에 감사드립니다." 일본인들이 나눴던 그 인사를 우리도 나눠야 한다. 2012년, 이 인사가 모두 감동적인 현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가오는 10월 재 보궐 선거부터 시동을 걸어야 한다. 야만과의 결별은 멈칫거릴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