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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회사 창고에는 비품들이 긴 선반에 쌓여있고, 그 구석에는 스텐레스컵 상자 두 개가 해묵은 먼지를 쓰고 있다. 컵에는 회사로고가 박혀 있고 증권, 보험이라는 글자와 전화 번호가 새겨져 있다. 뜨거운 커피를 담으면 빨리 식지도 않고, 손잡이와 뚜껑이 있으니 차 안에 놓기도 좋은 이 컵들을 회사 직원들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대신 가볍고 쓰기 좋은 일회용컵들을 쓰고 있다. 나 말고는...

친하게 지내는 직원 켈리도 일주일이면 수북히 쌓이는 신문지를 모아 재활용터에 가져가는 일을 기꺼이 하면서도 왠지 이 스텐레스컵은 쓰기 싫어한다. 조금 무거우니 거추장스럽기도 하겠지. 몇 달 앞서, 켈리와 함께 아는 식당에 밥 먹으러 갔는데 사기로 된 물컵이 나오자 예뻐 하기에 하나 얻어 주었더니 몇 일 쓰고는 다시 일회용컵을 쓴다.

"어머! 그 이쁜 컵은 어쩌고?"
"아이! 죄송해요.  씻으려고 집으로 가져 갔다가 깜빡 잊었어요."


켈리는 무안한 듯이 웃고는 그만이었다. 

지금 그 컵은 어디서 딩굴고 있을까? 온갖 물건으로 차고 넘쳐나는 이 세상. 이러다가 기우뚱하며 우주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날이 올거야.

하루에도 일회용컵을 몇 개씩 후딱 쓰고 버리는 회사 직원이 있었다.  날마다 그 모습을 보는 일이 무척 괴로워, 하루는 큰 맘 먹고 "한 번 쓰고 그렇게 버리면 너무 아깝잖아"하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 돈 쓰는 것도 아닌데요 뭘.  부자 회사 보고 좀 쓰라죠"라고 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버려지는 것들이 환경을 다 망친다잖아."
"에이, 선배님도. 나 하나 안 버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요?"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대꾸를 하니,  벼르고 말을 꺼냈던 나는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래서 어느 날, 도자기 가게에 들려 하나에 3, 4불 하는 사기컵을 몇 개 사왔다.

"조이스, 내가 어제 신문에서 읽었는데 일회용컵이 유방암을 유발한다고 하네. 더우기 젊은 여자들한테는 아주 심각하다고 해서 몇 개 사왔어. 이쁘지? 우리 하나씩 쓰자."
"참말 나 생각해서 일부러 사왔단 말이예요?"
"그럼."
"고마워요.  선배님.  잘 쓸게요." 


하고 아주 좋아하며 하루에도 몇 번 씩 물을 담아 마신다.

나는 내친김에 남자직원들에게도 하나씩 사서 주었더니 씻기가 귀찮아서 싫다고 한다.

"걱정 말아요.  내가 씻어 줄테니까. 예쁜 컵에다 마시면 물맛도 커피맛도 더 있을 거예요." 

나는 아침에 조금 일찍 나와서 켈리와 함께 방마다 컵들을 챙겨 설겆이를 해 주었다. 지금은 그 컵들이 다 어디에 있나몰라. 

그런데 어떤 직원이

"글쎄! 우리가 이런다고 벌써 망가진 자연이 좋아지겠어요? 그냥 편한대로 한 세상 삽시다. 아직도 미국은 소비가 미덕입니다. 소비가 위축되면 미국 경제가 마비되고 경제가 마비되면 주식 시장이 곤두박질 치고 주식 시장이 곤두박질을 치면 우리 증권 브로커들은 밥 굶어요."

하고 말하니 나는 그만 주눅이 들어서 대거리도 못하고 속으로만 소리를 질렀다.

'이렇게 낭비를 부추기면서 제 살 깎아먹는 경제는 마비가 되어야 마땅해요. 그래서 주식 시장이 곤두박질을 친다면 우리도 굶어야 마땅하고요.'

그래. 이건 아니야. 사기컵을 억지로 안겨주어 몇 달 쓰다가 팽개치는데 뭐가 달라지겠어?  이 땅을 우리가 오손도손 아껴 쓰다가 후손들에게 고이 물려 주어야 한다는 의식을 스스로가 깨우쳐야 할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나는 금요일마다 한 주일 동안 신문지를 모아서 켈리와 함께 회사 건물 주차장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재활용터에 가지고 간다. 하루는 사장이 우리를 보고 "그렇게 가지고 가면 돈 몇 푼이라도 나와요?"하고 묻는다.

"아니요.  빈 터에 놓고 올 뿐... 아무도 돈 안 줘요."
"허허, 그런데 왜 사서 그 고생을 해요?" 


켈리가 옆에 있어 함께 해주어 고맙기 짝이 없다.  나 혼자서 이 짓을 했으면 참 힘들었겠다. 신문지를 팔아서 돈을 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러나 저러나 창고 속에서 햇볕도 못본 채 누워 있는 저 많은 컵들을 어떻하지? 우선 몇 개 집으로 가져다가 칫솔도 담아 놓고 양치컵으로도 써야지.

그러던 어느 날,  다니기 시작한지 두 달밖에 안된 우리 교회 홈피에 들어가 봤는데, '세상에서 가장 비싼 컵, 스티로폼 컵'이란 제목이 눈에 반짝 띄였다. 반갑게 클릭을 했더니 '일회용컵을 쓰지 맙시다. 사기컵이 모자랍니다. 안 쓰는 컵이 집에 있으면 교회에 가져와 주십시요'라는 이야기였다.

일요일 날, 남편과 나는 차 트렁크에 컵 열 개를 실고 교회에 가서 담당 집사님에게 컵을 가져왔다고 하니 아주 반가와 한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컵을 가지러 차로 간 남편이 한참 뒤에 빈 손으로 온다.

"왜 컵을 안 가지고 와요?"
"막상 회사이름이랑 전화번호가 새겨진 컵을 보니까 안 되겠어. 우리는 새로 온 교인인데 이런 컵을 교회에 주면 '회사선전을 하려고 교회에 다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나는 싫어."


에구. 기다리고 서 있는 젊은 집사님에게 "미안해요.  안가지고 왔네요.  다른 차에 있나봐요. 다음 주일에 가져 올께요"하고 무안하게 말했다.

"아니! 누가 어떻게 우리를 생각할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해야 할 일을 못하다니요. 말도 안 돼요."
"그래도 나는 싫다니까... 새겨진 글자들을 내가 긁어볼게."


월요일날,  일 갔다 집에 오니 남편이 뾰족한 손칼로 컵에 있는 글자들을 긁고 있었다.

"어머머! 집 안에 이 쇳가루 날리는 것 좀 봐요. 제발 그만 해요. 그렇지 않아도 먼지와 오염물질로 가득한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에요? 땀흘려 새긴 것을 땀흘려 지우다니... "
"알았어. 집 안에서는 안 할게." 


에구구구우....

지난 주일, 남편이 지우다 만 컵 일곱개를 교회에 갖다 주었다.

"글자를 지우지 않은 컵들이 더 있는데 가져 올까요?"
"네. 참 좋은 컵이네요. 교회에서 쓰기보다는 가지고 싶은 사람들에게 하나씩 주어야겠어요. 괜찮지요?"
"그럼요."


드디어 회사 창고에서 긴 잠을 자고 있는 컵들이 햇볕을 보게 되었다. 하나하나 제 몫을 감당하면서 일회용컵들을 몰아 내리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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