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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가공할 사건들은 한국인들의 관심권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추가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월드컵 축구 때문이었다. 한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과 인터넷 매체는 단 한 곳의 예외도 없이 월드컵 보도에 사력(社力)을 기울였다. 그들은 월드컵 보도에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회가 열리기 한 달 전쯤부터 이미 한국인의 제1 관심은 단연 월드컵으로 옮겨 가 있었다. 정부 책임자는 편지의 공개 여부를 놓고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대회가 시작되었을 무렵에는 과연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는지 모를 정도가 되어 버렸다.

경찰청 건물 안에서도 텔레비전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축구 방송으로 소란스러웠다. 이제 그 사건은 뜻있는 경찰 몇이나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조수경은 외곬으로 사건에 몰두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올림픽이나 월드컵이 열리는 때를 그녀는 마뜩치 않게 여겨 왔던 터였다.

그녀는 우선 시끄러운 것이 싫었다. 그리고 붉은색 일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수만 명씩 몰려 나와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볼 때마다 원인 모를 공포감을 느끼고는 했었다. 때로는 북한 모란봉 경기장의 카드섹션을 연상케 한 적도 있었다.

월드컵 예선 세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인들은 너 나 없이 초조와 광란에 휘말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은 토고, 프랑스, 스위스 등과 차례대로 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소망은 충족되지 않았다. 어렵사리 첫 게임에 이긴 한국은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그리 심각한 비탄에 잠겨 들지는 않았다. 언론은 참담한 언어로 16강 탈락을 보도하면서도 그것이 심판 때문이라고 몰아붙였기 때문이었다. 

월드컵이 끝나고 며칠도 안 되어 한국인은 평상으로 되돌아갔다. 그것은 4년 전 4강에 진출했을 때나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흥분도 빠르지만 제 자리로 돌아오는 능력도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유연성이라고 한다면 한국인들은 유연성에 있어서 단연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월드컵이 종료되자 한국의 신문들은 기사 채우기에 애를 먹게 되었다. 물론 보도할 거리야 많았지만 독자들의 관심과 흥미를 끌 소재가 여간해서 나타나지 않았다. 내년 봄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거까지는 전국적인 이목을 집중시킬 이벤트가 없었다.

그것은 한국 사회가 비교적 평안한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일부 신문에서 월드컵 전에 있었던 연쇄살인사건을 다시 거론하며 관심의 불씨를 되살려 보려 했지만, 한국인들은 불쾌하고 음습한 기억을 반추하는 일에 호응을 보이지 않았다.

사건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잠잠해진 동안 조수경은 한국의 근·현대사를 공부했다. 그녀는 한국에도 테러 살인 집단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대동단이나 의열단 그리고 애국단 등의 단체가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일제 때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한 결사체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독립군이었지 단순 테러 집단이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하기야 일본의 입장에서는 물론 그들을 테러 조직으로 간주했을 것이었다.

조수경이 해방 이후에도 한국에 살인 테러 집단이 엄존했다는 것을 안 것은 이번 공부를 통해서였다.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오상원이라는 작가가 쓴 <모반>이라는 단편소설을 읽은 적이 있었다. 해방 정국의 테러단원이 주인공인 소설이었다.

조수경은 그때만 해도 그 소설이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것으로 지레 짐작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 당시에 테러단의 존재와 활동은 일반 국민들도 피부로 느낄 정도로 확실한 수준이었다.

가장 이름난 테러단의 명칭은 백의사(白衣社)였는데, 그것은 중국 장개석이 만들었던 남의사에서 힌트를 얻은 이름이었다. 중국인들은 남색 옷을 많이 입고 한국인들은 흰옷을 즐겨 입으니 얼마든지 그런 명칭이 붙을 수 있는 것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백의사 단원이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기록으로 보관하고 있었다.

백의사의 단장은 염동진이라는 맹인이었다. 그는 1902년 평양 출생이며 서울 선린상고를 다녔다. 그는 중학교 시절 이미 유도의 유단자였다. 그는 1934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반에 입교했다. 당시 중국의 장개석 정부는 한국 독립군을 양성하는 사업에 나름대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것은 일본과 싸우는 중국의 국익을 위해서도 이로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생을 주선했던 사람은 김구나 이청천이나 김원봉 등의 임시정부 수뇌진이었다. 염동진은 신익희의 추천을 받아 이청천의 주선으로 입교했다. 그때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한인 사관후보생들에게 매달 11원씩을 지급했는데, 이 과정에 부정 의혹이 생겨 일부 학생이 폭력적인 수단으로 항의했다.

염동진도 이 거사에 참여했다가 쫓기게 되자 남경으로 피신하여 신익희의 보호를 받았다. 그는 중국인으로 변성명하여 장개석 직속의 특무기관 남의사에 들어갔다. 마침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남의사의 활동력이 커지게 되었다.

염동진은 남의사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첩보 공작을 위해 만주에 밀파되었다가 일본 관동군 헌병대에 체포된다.(미국이 공개한 기록문서에서는 염동진이 일본군 밀정 노릇을 하다가 김구의 밀고로 중국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실명했다고 말함으로써, 마치 염동진이 김구에게 원한을 가진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이 진술에는 합리적인 증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단원의 증언에 의하면 염동진은 잠시 일본 관동군의 정보원 노릇을 했다고 하는데 이는 체포, 석방 이후의 일임이 분명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염동진은 평양 공설운동장 뒤편에 있는 절 영명사에 드나들었다. 영명사에는 다수의 민족주의자들과 소수의 사회주의자들이 모이고는 했다. 그 절의 주지는 임시정부 요인 박찬익의 동생 박고봉이었다. 박고봉은 염동진에게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에 필적할 만한 단체를 만들라고 권유한다. 염동진은 항일무장단체였던 대동단이라는 이름을 따 결사체를 만들었다. 염동진은 단원 포섭에 주력했는데 그는 중학생까지도 단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단체가 항일운동을 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은 전혀 없었다.

해방이 되자 염동진은 서울로 귀환한다. 그는 일본 헌병대에서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서서히 눈이 어두워진다. 그러다 그는 1948년에 완전히 시력을 잃었다. 그는 말수가 적었는데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면서 자신의 시각 장애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눈 치료를 위해 고향인 평양에 갔다가 서문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최성률을 만나 결혼한다. 최성률은 곧 임신했는데 유산했다는 설도 있고 낳아서 누군가에게 맡겨져 키워졌다는 소문도 있었다.

염동진은 단체를 재결성하여 스스로 리더가 된다. 그는 공산당 간부 현준혁을 암살했다는 혐의로 투옥되었지만 그의 부인 최성률이 소련군 장교 로마넨코의 부인에게 로비를 하여 풀려난다. 그 당시 발생한 좌익 인사들에 대한 암살 테러는 염동진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 염동진은 1945년 11월 말에 거점을 서울로 옮긴다. 그는 대동단을 백의사로 개칭했다. 그는 반공 노선을 내세워 단원을 포섭하여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는 서린동 갑부였던 오동진에게 일본인이 쓰던 저택을 기증받았다. 그 저택은 궁정동에 있었다. 그는 궁정동의 저택을 정치적 테러 살인의 본부로 삼는다.(그런데 정작 더 큰 정치적 테러는 그 집에서 30년 후에 발생하는데, 그것은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의 죽음이었다.)

염동진은 철저한 점조직으로 테러 집단을 이끌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 외출했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도 언제나 혼자였다. 그는 손님을 이중으로 자물쇠가 채워진 밀실로 데려가 몇 시간이고 대화를 나누다가 돌려보내고는 했다. 1년쯤 후 백의사의 단원 수가 3만 명에 이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덧붙이는 글 | 이 소설은 주 2~3회씩 올 연말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백의사#염동진#태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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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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