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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다 / 말은 나오면서 곧 들어가서 / 꼬리만 살짝 입술에 걸릴 때가 많다 // 말꼬리 잡는 취객의 짓궂은 손에 걸려 / 슬픈 이야기가 새 나오는 걸 막으려는 것인지 / 피가 나도록 입술을 꼭꼭 깨물기도 한다 // 텅 빈 운동장 같은 눈으로 먼 곳을 보며 / 한숨을 토할 때는 / 어릴 적 팔려가던 우리 집 소의 젖은 눈을 닮았다" -14쪽 '첫 인상' 모두

사랑! 지구촌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짊어지고 가는, 싫어도 짊어지고 가야 할 으뜸 화두가 사랑인 모양이다. 우리가 흔히 듣는 유행가 노랫말에서부터 시와 소설, 그림, 사진, 음악, 춤 등 모든 예술작품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있던가. 그 어떤 사람에 대한 미움, 절망, 원한 따위를 품은 격한 감정들도 모두 사랑이 그 뿌리가 아니겠는가.    

사랑에도 '나쁜' 사랑이 있고, '좋은' 사랑이 있는 것일까. 시인 김주대가 이번에 펴낸 <나쁜, 사랑을 하다>란 시집에서 말하는 '나쁜'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나쁜'과 반대되는 말은 '좋은'이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나쁜' 사랑이란 반어법을 통해 참 사랑을 찾는다. 사랑(좋은)은 또 다른 고통(나쁜)의 시작이라는 그의 말처럼.

글쓴이가 시인 김주대를 만난 것은 80년대 중반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실에서였다. 한창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를 외치는 문인들과 재야세력들을 향해 서슬 퍼런 총칼을 겨누고 있을 때였다. 그때 민주화를 위한 가투에 참가하기 위해 작가회의 사무실을 찾았던 그는 몸매가 가냘프고 키가 자그마한 게 여성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그는 가투가 벌어질 때마다 그 누구보다 일선에 서서 전경들과 맞서 싸웠으며, 그 누구보다 문단 선후배들을 잘 따르고 아꼈다. 저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가열찬 투쟁의 힘이 솟아 나오는 것일까. 그게 늘 궁금했다. 근데 이번 시집을 읽고 나자 그 힘은 다름 아닌 사람을 지독히 사랑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인 김주대(44)가 2년 만에 네 번째 시집 <나쁜, 사랑을 하다>(답게)를 펴냈다
▲ 김주대 시집 <나쁜, 사랑을 하다> 시인 김주대(44)가 2년 만에 네 번째 시집 <나쁜, 사랑을 하다>(답게)를 펴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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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떠난 한 여자에 대한 사랑의 향불

"그대 떠난 그 먼 곳에서 소리만 혼자 천 리를 왔는가 / 새벽마다 귀에 익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 모든 걸 잃어버린 나는 / 거리의 바람 속을, 버려진 비닐봉지처럼 흘러다녔다. / 바람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 어느새 여름이 온 것이다. / 그리고 남동의 어느 술집에서 그 여자를 만났다. /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인 줄 모르고." - '시인의 말' 몇 토막

지난 2007년 10월, 삶의 상처와 어둠 속에서 희망이란 빛을 기어이 찾아내는 시어가 빛나는 세 번째 시집 <꽃이 너를 지운다>를 펴냈던 시인 김주대(44)가 2년만에 네 번째 시집 <나쁜, 사랑을 하다>(답게)를 펴냈다. 이번 시집은 한 여인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지독한 사랑에 빠지기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를 담은 애틋한 사랑의 향불이다.

모두 4부에 실려 있는 이삿짐 풀기, 남동에서 만난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 기둥서방, 돈 이야기, 삼각관계, 불쌍한 손, 너를 쓴다, 잘못된 질투, 찢어진 편지, 문자가 왔다, 내 속의 그대 내 밖의 그대, 사랑의 자본주의, 너의 번호를 지웠어, 슬픈 글자만 남았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옛 그림을 보다, 문풍지가 울다 등 82편이 그것.

시인 김주대는 "그토록 나를 힘들게 했던, 스스로도 죽을 만치 아팠다던, 그녀가 느닷없이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김 시인은 "오지 못할 그녀를 기다리며 나는 정신이 허황해졌고 눈이 내리면 그녀가 오는 게 보였다. 미쳤다. 세상에 없는 그녀가 세상 어느 곳에서나 보이기 시작했다"며, 가슴에 남은 아픈 사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돈으로 사고 파는 사랑에 탄식하는 시인

"짙은 화장기가 바람 든 사내들을 가슴에 품는다. 문을 잠그고 넣어둔 아이가 전화로 울어도 영업 중엔 돌아갈 수 없다. 몸을 준 사내들이 차례로 왔다 가고 여자는 새벽에 마지막 사내에게 간다. 쓰레기통 옆에서 몸을 섞은 사내가 끝까지 남았지만 사내의 뒤를 이어 또 누가 올지 모른다." - 15쪽, '순서대로' 몇 토막

시인 김주대가 꿈꾸는 사랑은 특별하다. '잘못된' 사랑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못된' 사랑이란 것은 물불 가리지 않고 하는 사랑, 즉 참 사랑보다 한 여자에 대한 소유욕이 더 앞서는 어긋난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시인 김주대가 하는 사랑은 '나쁜'사랑이다. '나쁜' 사랑은 곧 '좋은' 사랑, 참 사랑으로 가기 위한 디딤돌에 다름 아니다.

그가 우연찮게 만나 '나쁜' 사랑에 빠진 여자는 뭇 사내에게 몸을 파는 술집여자다. 그 사내들 중에는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다가오는 여자를 마누라처럼 안아주는 사내"도 있고, "두껍게 옷 입고 다녀, 라는 문자를 하는 사내"도 있다. "산에 놀러 한번 가자"는 사내도 있고, "을왕리 바다의 추억을 가진" 사내도 있다.

마지막 사내는 다름 아닌 그다. '기둥서방'이라 불리는 그 마지막 사내는 다른 "가게들 불이 꺼질 때" 불이 켜지는 그 여자 가게에 앉아 장사가 끝날 때까지 술을 마시며 기다린다. 그 여자 또한 그 사내 앞에서만 고개 들고 웃는다. 마지막 사내가 돈 이야기만 하면 귀를 쫑긋 세우며 바싹 붙어 앉아 팔짱을 끼면서.

마지막 사내는 그때마다 "얼마나 간절하면"이라 생각하며 그 여자를 동정한다. "그녀는 내 형편(돈)을 사랑했고 한동안 나는 외로움을 잊었지만 / 형편이 어려워지자" 그 여자는 금세 돌아서고 만다. 마지막 사내는 돈으로 사고 파는 사랑에 탄식한다. "사랑아 / 밥 한번 안 사더니 / 내 돈 다 발라가더니 / 딴 남자 만나 놀아난다는 소식 // 나도, 참 / 너도 불쌍하구나"라며.    

이번 시집은 한 여인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지독한 사랑에 빠지기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를 담은 애틋한 사랑의 향불이다
▲ 김주대 시집 이번 시집은 한 여인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지독한 사랑에 빠지기까지, 그리고 죽음 이후를 담은 애틋한 사랑의 향불이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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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잘못 만나 졸지에 술집여자가 되다

"들락날락 처음엔 쫓겨나고 두 번짼 도망쳤다. 이태 만에 붙들려 들어가 남의 집 살 듯 못된 놈 만나 살며 하루도 몸 성할 날 없었다는 그대. 그 날도 별 이유 없이 뒤 안으로 끌려가 죽도록 맞고 남편 몰래 너무 아파 겁먹고 또 다시 삼 년 만에 짐 싸들었다 한다. 다섯 살짜리 아들에게 꼬옥 간직해라 성경책 안겨주고 세 번째로 아주 집을 나왔다 한다." - 40쪽 '역사' 몇 토막

그렇다면 그 여자는 어떻게 하다 몸을 파는 술집 여자가 되었을까. 그 마지막 사내는 왜 그 여자에게 그토록 깊이 빠지게 되었을까. 그 여자는 고향 강진에서 "한쪽 팔과 한쪽 눈과 한족뿐인 생을 빨래처럼 떨다 간 어머니를 강물에 뿌리고" 새벽차를 타고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왔다. "배웅 나온 눈보라와 어둠에 손 흔들"며.

서울에 올라온 그 여자는 시다 3년을 거쳐 미싱대에 올라 "찢어진 꿈 상처 위의 터진 실밥을 풀어내고 / 세상에 끊어진 것 다시 잇겠다"며 밤을 새워 미싱을 밟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적금 통장에 쌓이던 눈물과 웃음만 한 옥탑방을 얻어" 한 사내와 동거를 한다. 하지만 사내는 아기가 태어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때부터 그 여자는 술집에 발을 들여 놓는다.

아프다. 마치 최인호가 쓴 <별들의 고향>에 나오는 그 여자 경아가 살아온 삶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처음, 그 여자는 술을 팔기 위해 그 마지막 사내를 만났고, 마지막 사내는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 여자를 만났다. 하지만 마지막 사내는 날이 갈수록 그 여자의 속내를 샅샅이 알게 되고, 마침내 그 여자와 '나쁜' 사랑에 빠진다.

문틈에 다가와 안부만 물어보고 가는 그 여자 

"드디어 그 여자가 죽었다. 이제 나는 밤새 술을 마시고 2차선 100리 길을 달리지 않아도 되고 새벽마다 질투에 휩싸여 식은 땀을 흘리며 앓지 않아도 된다. 카페 문을 닫고 다른 사내와 사라진 그대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벽제 화장터 화구 속으로 들어가는 그대를 분명히 보았고 흰 가루로 내게 안긴 그대를 임진강 귀퉁이에 쪼그려 앉아 바람 속으로 훨훨 날려 보냈으니까" - 96쪽, '일심동체' 몇 토막

그 여자가 죽자 마지막 사내는 그 어떤 '나쁜' 사랑의 사슬에서 이제야 벗어났다며 스스로 위로한다. "다시는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소리치며 (그 여자의 뼛가루를) 강물에 흘려" 보냈다. 하지만 그때부터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른 새벽마다 "발신번호 없이 오는 전화"에 눈물짓는다.

그 여자가 늘상 "죽어서도 내게 오겠다는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마다 마지막 남자는 그 여자가 "내 속에 이미 깊이 와서 떠날 수도 있을 수도 없이 되었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핸드폰에서 지우며 엉엉 운다. 혹시라도 이제 이 세상에 없는 그 여자에게 술이 취한 새벽에 전화를 걸까 두려워서다.  

이 세상에 없는 여자와 살아 있는 사내의 지독한 사랑. 그 이루지 못하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은 마침내 대자연이 되어 시시각각 마지막 사내에게 다가선다. 비 내리는 소리가 그 여자가 우는 소리로 들리는가 하면 눈길을 걸어도 그 여자 발자국이 찍힌다. 꽃냄새를 맡으면 그 여자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여겨진다. 바람이 불면 그 여자가 서성대는 게 보인다.

시인 김주대가 꿈꾸는 사랑은 특별하다. '잘못된' 사랑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 김주대 시인 시인 김주대가 꿈꾸는 사랑은 특별하다. '잘못된' 사랑을 하지 않고 '나쁜' 사랑을 하기 때문이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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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떠난 여자 목소리를 바람 속에서 듣는다

이처럼 그 여자와의 사랑을 대자연에 빗댄 시는 이 시집 곳곳에 있다. "먼 곳 / 가며 / 그대가 남겼을 말들"(함박눈)이라거나 "강둑의 풀들도 슬픔이 무거워 / 쓰러지고 있었다"(저녁), "깊은 밤 찾아와 / 유리창에 문자를 쓰는 눈송이"(메시지가 오다), "문틈에 / 안부만 물어보고 돌아가는 사람아"(문풍지가 울다), "체할 때마다 / 네 손끝을 따주었던 바늘"(바늘) 등이 그러하다.    

문학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내 친구 김주대 시인은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난 여인의 음성을 바람 속에서 듣는 사람이다"고 말한다. 방 교수는 김 시인은 "문풍지가 울면 그 여인이 안부를 묻기 위해 다녀가는 걸로 여기는 사람"이라며 "귀신을 울리는 시라는 말이 있다. 죽은 사람인들 그의 시를 보고 울지 않을 수 있으랴"고 평했다.

작가 김별아는 "시적 진실이 내용의 사실 여부로 확보되는 것은 아니지만, 진짜 있었던 일이냐고 몇 번씩이나 물어보고 싶었다... 시를 읽다 울었다. 그는 시의 진실과 시의 진정성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시인이다"라며 "너무도 슬픈 이 시의 내용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 시적 진실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으니까"라고 덧붙였다.

시인 김주대는 1965년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민중시> <창작과 비평>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도화동 사십계단> <그대가 정말 이별을 원한다면 이토록 오래 수화기를 붙들고 울 리가 없다> <꽃이 너를 지운다>가 있다. 제1회 <심산문학상> 받음.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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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옥 지음, 답게(2009)


태그:#시인 김주대, #나쁜, 사랑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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