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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부안군 격포에는 위도로 가는 여객선터미널이 있다. 2009년 어느 봄날, 아침 일찍 인천에서 내려온 이종섭(63)씨가 배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귀향중이다. 페리호를 타고 가면 고향 위도에 닿는데 40분. 그러나 오늘은 바람이 거세어 배가 뜨지 않는단다. 그 바람을 등지고서 담배 하나 피운 후, 그는 미련 없이 인천으로 되돌아갈 채비를 한다. 코앞에 고향을 두고 헛걸음 했지만 아쉬울 것 없다.

그에겐 정말 그 섬을 향한 '미련이 없다.' 육신을 키운 애정 어린 섬이자, 동시에 인생을 망가뜨린 증오의 섬이었다. 그에게 고향 위도는 그래서 애증의 섬이다. '오늘은 배 안 뜹니다!'하고 누군가 다시 한번 소리친다. 그 소리가 이씨의 귀청을 찌른다. 찢어진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세상의 소리는 이씨의 귀에 날카로운 금속성으로 닥쳐온다. 망가진 귀는 이 나라가 오래 전 어린 청년이었던 그에게 남긴 고문의 흔적이다.

바람 타는 섬 위도 섬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하여 위도다. 부안 격포에서 15km 떨어진 이 섬은 육지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다.
바람 타는 섬 위도섬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고 하여 위도다. 부안 격포에서 15km 떨어진 이 섬은 육지에서는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다. ⓒ 이혜영

전라북도 서해안 칠산바다 위에 펼쳐진 섬 위도, 들쑥날쑥한 해안선이 고슴도치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위도(蝟島)다. 이 섬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기억될 만한 열쇠말을 많이 갖고 있다. 오래 전 서해바다 위를 수놓은 서해안 조기 파시의 중심지가 위도였다. 700척에 달하는 배들이 위도 앞바다에 둥실 떠서 불야성을 이뤘다. 거대한 조기 시장이 파도에 일렁거리며 춤을 췄다.

이 섬에서 거래된 조기들이 인근 영광 법성포로 건너가 햇빛과 바람을 더해 '영광굴비'로 태어났다. 위도는 무형문화재 '띠뱃놀이'로도 잘 알려져 있다. 띠뱃놀이는 짚으로 만든 배를 물 위에 띄워 보내면서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던 행사였다. 자그마한 규모와 달리, 위도는 빛나는 기억을 많이 간직한 섬이다.

반대로 작은 섬의 규모를 훌쩍 넘어서는 깊은 아픔들도 있었다. 93년 일어난 서해페리호 침몰사건은 위도와 격포를 오가는 여객선에 벌어진 일이었다. 수많은 관광객과 주민들이 위도 앞 바다에서 난데없이 생을 묻어야 했다. 2000년대 초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유치 논쟁은 위도를 할퀴고 간 가장 최근의 상처다. 방폐장 설립 문제를 놓고 주민들 사이에 찬반이 크게 나뉘어 서로 골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굵직굵직한 밝음과 어둠이 교차한 땅 위도. 그런데 혹시 '태영호 납북사건'이라는, 위도에 새겨진 또하나의 묵직한 어둠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찢긴 귀를 감싸 쥔 어느 사내는 자의반 타의반 고향을 등졌고, 어떤 이들은 40년 세월 간첩 누명을 쓰고 작은 섬 이웃들에게서 손가락질 받으며 생존해왔고, 어느 할머니는 아들의 억울함이 원통해 한도 끝도 없이 울다가 눈이 멀고 덧나서 결국 눈알을 빼야 했다. 그 목울대 뜨거운 이야기의 발단이 바로, 위도 어민들의 삶을 갈갈이 찢어버린 '태영호 납북사건'이다.

1. 먹먹한 68년 연평도 바다의 여름

1968년 6월 4일 전북 부안군 위도면 대리. 아이 업은 아낙들의 따스한 배웅을 뒤로 하고, 태영호 엔진이 힘차게 북쪽 바다를 향해 물보라를 그렸다. 스물일곱 패기 넘치던 선주 강대광씨는 뿌듯함에 입이 귀에 걸렸다. 그 배는 디젤엔진을 장착한 7.5톤짜리 목선이었다. 당시 보통 어선들은 대부분 태영호의 절반 크기 정도 되는 '통통배'였다. 전남 여수에서 배를 빌려온 강씨는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의욕적인 청년이었다. 그는 45m짜리 그물 40여 개를 배에 실었는데, 그 역시 당시로서는 흔치 않는 규모였다.

이 신형 배를 구하기 위해 그는 서남해안 곳곳을 휩쓸고 다녔었다. 여수에 다다랐을 때였다. 항구에서 그는 어떤 배를 마주치고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에 쏙 드는 배, 바로 태영호였다. 대포집에서 술 한 사발 사이에 놓고 배 주인을 설득했다. "이 배, 저 빌려주십시오! 후회 안 하십니다." 선주를 하기에는 어린 청년이었지만, 건장하고 씩씩한 강씨의 '배포'가 배 주인의 마음을 움직였다.

태영호는 연평도(경기도 옹진군) 해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연평도 바다에서는 다양한 고기가 많이 잡혔다. 선원들은 그 섬을 거점 삼아 바다 위에 한 달 넘게 머무르며 조업했고, 만선이 되면 연평도 위판장에 가서 팔았다. 현금이 하루하루 쌓여갈수록 고향 위도에 돌아갈 날이 기대되었고, 술 한잔 걸치면 노곤한 몸도 가뿐해졌다. 꼬물꼬물한 자식들, 이제나 저제나 남편의 무사귀환을 기다리는 젊은 각시들이 취기에 어른거렸다.

배 위에서 밥은 당시 목탄을 때서 지었는데, 식사당번은 박헌태씨였다. 여리고 내성적인 스물두 살 청년 박헌태씨는 맛있고 깔끔하게 밥을 차려냈다. 선원 이종섭씨도 스물두 살이었다. 그는 군 입대를 앞두고 가난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될까 싶어 태영호에 올랐다. 강대광씨의 친구인 선원 박상용씨는 스물여덟. 이들은 모두 대리마을에서 나고 자라 호형호제하며 살아온 젊은이들이었다.

선장 정몽치(46)씨는 위도에서도 더 들어간 작은 섬 거륜도에 살았는데, 그는 9남매를 거느린 가장이자, 건장하고 노련한 뱃사람이었다. 여수에서 배와 함께 올라온 선원 박종옥, 강용태씨도 있었다. 기관장인 여수사람 박종윤씨까지 합쳐, 68년 그 여름의 태영호는 위도와 여수 사람 8명이 꾸려가는 젊은 배였다.

파도에 거칠게 흔들리는 배를 여러 시간 타다 보면 그 어떤 건장한 사내라도 배멀미에 시달리게 마련이었고, 항해경력이 짧은 20대 선원들은 더했다. 그들은 대부분 마흔 줄에 이르러서야 배멀미를 극복하기 마련이었다. 배를 타는 일은 고되지만, 고기잡이는 척박한 섬을 살아가는 사내들의 숙명이었다.

기록마저 아픈... 강대광 씨가 태영호의 선주가 되었던 1968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 납북사건으로 인하여 강씨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뒤틀렸다. 이들이 40년 세월 버텨온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기록하는 자에게도 먹먹하게 다가온다.
기록마저 아픈...강대광 씨가 태영호의 선주가 되었던 1968년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7세. 납북사건으로 인하여 강씨 가족의 삶은 송두리째 뒤틀렸다. 이들이 40년 세월 버텨온 이야기를 기록하는 일은 기록하는 자에게도 먹먹하게 다가온다. ⓒ 이혜영

7월 3일, 위도를 떠나 조업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태영호 선원들은 연평도 인근에서 병치잡이 그물을 쳐놓고 잠깐 숨을 돌리고 있었다. 북쪽 수평선에 대한민국의 해군함정 55호가 떠 있었다. 해군함정은 군사분계선 인근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다.

그때였다. 북한 함정 2대가 군사분계선을 넘어왔다. 태영호는 이들 함정에 포위된 채 북으로 납치되었다. 잠깐 사이의 일이었다. 손꼽던 귀향의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그때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날의  갑작스런 사건이 자신들에게서 만선의 부푼 꿈을 뺏고 귀향길을 더디게 한 것뿐 아니라, 자신과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린 날이 될 줄은.

당시에는 태영호의 경우뿐 아니라, 북한과 가까운 해상에서 어부들이 조업을 하다가 북으로 납북되는 일이 잦았다. 푸른 바다 위에 철책선이 있을 리 없었고, 어부들이 물고기 떼를 따라 다니며 그물을 치고 걷어 올리다 보면 자신들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어로저지선을 넘기도 했다. 그래서 남한의 해군함정은 생업에 열중한 남쪽 어부들이 어로저지선을 넘지 않게 주의를 주고, 동시에 납북의 위험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납북되는 일은 자주 발생했다. 태영호도 그랬다.

북한에 억류된 지 넉 달, 가을도 한참 깊은 10월의 마지막 날에야 태영호는 연평도 해상으로 풀려났다. 납북어부들은 돌아오면 간단한 조사를 받고 풀려나는 게 관행이었다. 오히려 북한에서 억류 생활을 하느라 고생했음을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태영호가 납북된 당시에도, '납북어선 37선과 288명의 어부들이 풀려났다'는 보도가 났는데, 그런 보도는 당시로선 그리 놀라운 뉴스가 아니었다. 강대광씨 일행은 곧바로 인천경찰서로 이송돼, 3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6월 4일 여름 초입에서 위도를 떠나온 지 넉 달만의 귀향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이들은 여수경찰서로 불려갔다. 배의 주소지가 여수인 탓이었는데, 여수경찰서로 옮겨가면서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들을 구속영장도 없이 불법으로 구금했다. 조사를 받은 곳도 경찰서가 아니라 여수시내의 허름한 여관이었다.

선원 1명 당 경찰관 1명씩이 배치됐고, 선원들은 날마다 자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다. 순박한 섬 청년들은 어리둥절했다. "우리가 무얼 했단 말이여. 뭘 쓰라는 건지." 다 닳은 볼펜들이 쌓여가도록 이들은 자술서를 쓰고 또 써야 했지만, 도무지 경찰들이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술서 쓰기는 20일이나 계속 됐고, 다시 열흘 동안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왜 자술서를 쓰는지 몰라 미칠 지경인데, 바다 생각을 떠올리면 더 초조해졌다. 이제 막 결혼한 청년도 있었고, 정몽치 선장의 경우 9남매를 거느린 가장이었다. 고기잡이를 못하면 가족들은 끼니를 위협받게 마련이었다. 태영호 선원들은 여수경찰서에서 한 달만에 풀려났다. 그들에겐 뽑아낼 죄가 없었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여수경찰서는 결국 사건을 부안경찰서로 넘겼다.

여수경찰서는 떠나는 그들에게 여관 투숙비를 내놓으라 했다. 청년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구속영장도 없이 자신들을 불법으로 가둔 것도 억울한데, 여관비까지 내놓으라니.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들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야 했고, 무섭고 넌덜머리나는 뭍을 떠나 섬으로 돌아왔다.

대리 마을. 태영호 선원들은 대부분 위도의 남동쪽 마을 대리에 살았다. 섬 자체가 산이어서 위도 사람들은 논은커녕 밭을 가꾸기도 녹록치 않아, 일찌감치 바다에 기대어 살아왔다. 바다는 그들에게 목숨줄이었으니, 납북사건으로 인해 바닷일을 못하게 된 어부들의 생계는 급격히 망가져갔다.
대리 마을.태영호 선원들은 대부분 위도의 남동쪽 마을 대리에 살았다. 섬 자체가 산이어서 위도 사람들은 논은커녕 밭을 가꾸기도 녹록치 않아, 일찌감치 바다에 기대어 살아왔다. 바다는 그들에게 목숨줄이었으니, 납북사건으로 인해 바닷일을 못하게 된 어부들의 생계는 급격히 망가져갔다. ⓒ 이혜영

돌아온 날은 12월 7일, 태영호를 타고 출발한 지 6개월째였다. 서해바다의 초겨울 바람은 매서웠다. 68년 한 해의 절반이 날아가 버렸고, 선원들의 집안 꼴은 말이 아니었다. 선주였던 강대광씨의 경우 태영호 조업으로 한 달 간 모았던 현금(당시 약 쌀 250가마에 해당)이 조사과정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그 많은 돈은 어디로 갔고, 누가 가져갔을까. 그 돈이 있어야 어선 임대료, 어구 구입비 등 투자비를 갚을 수 있었는데 말이다. 증발된 돈은 강씨에게 고스란히 빚으로 되돌아왔다.

"왜 우리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 우리는 북에 잡혀간 억울한 사람들인데." 그들은 분노했다. 뭍에서 벌어지는 권력자들의 주판알 튕기기를, 그리고 반공을 국시로 내건 독재정권의 정세를 알아차리기에 섬 청년들은 너무 순박했다. 그들은 수평선 저편에서 배를 타고 건너와 느닷없이 자신들을 끌어가는 뭍사람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69년 3월, 이번에는 부안경찰서 정보과 직원들이 경비정을 타고 건너오더니, 그들(강대광, 이종섭, 박상용, 박헌태, 정몽치)을 연행해갔다. 해가 바뀌고 새 봄이 왔으되 악몽은 그치지 않았다. 남편을 끌고 가는 경찰을 붙들고 사정하는 아낙도 있었고, 완장 찬 뭍사람들이 무서워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기둥 뒤에 주저앉은 노인네도 있었다. 이번 역시 구속영장도 없는 불법연행이었다.

2. 강경책 선회 시대의 첫 불운아

"국가가 해준 것은 고통뿐" 납북사건으로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스물일곱 청년 박상용 씨는 칠순이 된 지금도 고문의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국가가 해준 것은 고통뿐"납북사건으로 끔찍한 고문을 당했던 스물일곱 청년 박상용 씨는 칠순이 된 지금도 고문의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 이혜영

60년대 후반 북한은 남한 어선을 적극적으로 나포해서 어부들을 북에 억류했다. 53년 정전 협정 이후 불과 15년 남짓 지난 당시, 북한경제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북한은 이들 납북어부들에게 북한의 월등한 경제상을 보여주며 체제 홍보에 힘썼다. 북한 경비정들의 잦은 남한어선 나포가 사회문제로 떠오르면서, 남한 정부는 이들 어부들이 북한에 자의반 타의반 남한의 정보를 제공한다고 판단하던 즈음이었다.

그리고 1968년 11월 2일, 그러니까 태영호 선원들이 북한에서 풀려난 직후, 경북 울진과 강원도 삼척 해안에 북한 무장간첩이 대량 침투한 사건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빌미로 11월 9일 정책을 바꾸어 발표했다. 억류되었던 납북어부들을 '위로' 하던 차원의 기존 정책과 정반대로, 앞으로 납북어부를 '수산업법과 반공법을 적용해 엄중처벌한다'는 강경책으로 선회한 것이었다.

결국 태영호 납북사건은 박정희 정권의 납북어부 정책이 위로에서 처벌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첫 사례가 되고 말았다. 그 전까지는 고의적으로 월선했다는 증거가 없으면 무혐의 처리였는데, 이제 '고의로 (북한으로) 월선하지 않더라도, 월선 될 수 있음을 인식하기만 하면 설령 북한 경비정에 강제로 나포되는 경우라도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미필적 고의'였다. 당시의 반공법은 그렇게 자의적이었다.

그런 격동은 작은 섬마을 청년들에게 크나큰 불행이었고, 분단국가의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부안경찰서로 끌려간 그들은 이때부터 놀랍고 끔찍한 일들을 당하기 시작했다. 부안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여수에서처럼 그들을 여인숙에 가둬놓고 자술서 쓰기를 강요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 전주 시내로 데려갔다. 어딘지 알 수 없는 주택의 지하실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부안경찰서에서 '원하는 진술' 즉 '납북이 아닌 자진 월북'이라는 진술을 얻지 못하자 전북도경 정보3계(대공담당)에서 그들을 데려오라고 시킨 것이었다. 훗날 부안경찰서 직원은 '그 곳에 다녀오면 대부분 범죄사실을 시인하게 된다'고 진술했는데, 그 말은 없는 죄도 만들어 자백하게 한다는 뜻이었다. 없는 죄를 만들어 자백한다는 것은 사람의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랬다. 그들은 맨 정신이 아닐 때까지 잔혹한 고문을 받았다.

박상용(70)씨는 그때를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 40년 전의 일이지만, 불쑥불쑥 몸과 정신을 급습하는 그 기억이 늘 어제처럼 생생했다. 지금도 누군가 이름과 나이 등을 물으면, 마치 취조를 받는 것처럼 느껴져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다. 몽둥이찜질, 전기고문, 물고문, 구타…. 그 시절, 그 검은 방에서 태영호 선원들은 최소한의 사람 대접도 받지 못했다. 고기 잡는 것 외엔 아는 것이 없었고, '완장을 찬 육지사람'을 자주 겪어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런 어부들에게 반공국가의 고문기술자들은 악마와 같은 공포였다.

강대광(69)씨의 왼손 엄지손가락은 손톱 사이가 하얗게 떠서 벌어져 있다. 40년 전 수사관들은 강씨의 손톱 사이에 쇠꼬챙이를 찔러 넣고 휘저으며 '자진 월북을 인정하라'고 협박했다. 그 순간들을 어떻게 버티고 살아나왔는지, 강씨 자신도 이젠 잘 모르겠다. 40년이 흐르는 동안 손톱이 자라고 또 자라도, 하얗게 벌어진 흔적은 그대로다.

손톱 끝이 아픈 사람 강대광 씨의 왼손 엄지손톱에는 쇠꼬챙이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40년 동안 손톱은 자라고 또 자랐어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손톱 끝이 아픈 사람강대광 씨의 왼손 엄지손톱에는 쇠꼬챙이 고문의 흔적이 남아있다. 40년 동안 손톱은 자라고 또 자랐어도 그 흔적은 지워지지 않는다. ⓒ 이혜영

부안경찰서와 전주의 어둔 지하실을 번갈아 실려 다니며 버텨온 지 40일, 그들은 풀려났다. 하지만 위도로 돌아가 고기잡이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수사관들이 '원하는 답'을 뽑아냈기 때문이었다. 곧이어 어부들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끌고 정식 피의자가 되어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4월 29일부터 전주지방검찰청 정읍지청은 이들을 상대로 고문수사를 진행해 9월 16일 '태영호가 고의로 월선, 북괴 지배하의 지역으로 탈출했다'며 기소했다. 태영호의 납북은 월북으로 바뀌고, 이 둔갑에 '공헌'한 수사관들은 눈앞에 승진이 아른거렸을 것이다.

'도대체 이 악몽의 끝은 어디일까. 연평도에서 인천으로, 여수로, 부안으로, 전주로, 정읍으로…. 육지는, 아니 정부는 왜 고기만 잡던 우리들을 못살게 구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 답답함은 고향에 남은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가장이, 장성한 아들이 육지에 끌려가 그런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아내와 어미들은 제정신일 수 없었다. 집집마다 살림은 난파선처럼 속절없이 무너졌다. 논밭이 거의 없는 섬 위도에서 바다는 섬사람들이 기댄 목숨줄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 '바다밭'을 꾸릴 남자들이 모두 봉변을 당하고 있었으니….

이제 아낙들은 울며불며 남편을, 그리고 아들을 면회하러 거친 바닷바람을 가르는 배 위에 몸을 실었다.

(2부로 이어집니다.)

태영호 납북사건이란?
1968년 6월 4일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서 어부 8명이 7톤짜리 목선 태영호를 타고 출발해, 7월 3일 연평도 해상(경기도 옹진군)에서 병치잡이를 하다가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었다. 이들은 4개월 동안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가 풀려났다.

이들은 인천경찰서, 여수경찰서, 부안경찰서로 차례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고, 2달이 넘게 불법구금, 고문 등을 당한 끝에 이듬해인 1969년 9월 전주지방검찰청 정읍지청에 의해 '강제 납북이 아니라 고의로 월선, 북괴 지배하 지역으로 탈출하여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다.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원은 71년 3월 12일 태영호 선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다.

정몽치, 강대광씨에는 징역 1년6월과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3년, 박헌태씨는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 박상용, 이종섭, 박종옥씨는 각각 징역 1년 및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들 6명은 모두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었고, 실형을 복역했다. (박종윤씨는 고문으로 인해 선고 전 사망, 강용태씨는 납북 당시부터 몸이 아파 기소 대상에서 제외됨)

2006년 3월 22일 사건 피해자들은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같은 해 12월 5일,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태영호 납북사건이 수사기관의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한 피해자들의 허위자백만을 토대로, 물증도 없이 사건을 조작한 것으로 규명했다. 사건 피해자들은 이 결과를 토대로 곧바로 재심을 청구해 법적으로 완전히 무죄를 선고받고, 간첩 누명을 벗었다. 사건 발생 후 거의 40년만의 일이었다.

태영호 사건은 6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이 반공이데올로기를 강화하면서, 납북어부에 대한 정책을 강경처벌 정책으로 선회하던 시절에 발생한 첫 비극적 사례로 기록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문화웹진 씨네트워크의 특집기획 연재물로 5·18기념재단의 취재지원과 진실화해위원회의 협조로 만듭니다. 태영호 납북사건 기사는 총 3회로 맺습니다.



#태영호#진실화해위#간첩조작#위도#납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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