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가 범죄현장의 것과 같다는 이유로 진범으로 체포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반발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즉, 35억 년 전에 지구상에 나타난 원핵세포로 구성된 생물체를 우리의 시조 할아버지로 모실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137억 년 전 우주의 완전한 대칭이 깨어지고, 우주의 4가지 힘이 생겨 나고 초신성이 폭발하고 그 잔류물이 모여 지구를 이룬 후, 원핵세포로부터 진핵세포, 다세포생물, 그리고 인간에 이르렀다. 인간의 감각세포, 운동세포, 신경세포의 조합인 의식, 의식을 갖는 호모사피언스 종인 인류는 생명의 기원을 찾으려고 우주의 베일을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뒤지고 있다.
지구상에 생명체가 생기기 시작한 캠브리아기 이후 지구상의 어느 종도 300만 년 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멸종하거나 다른 종으로 진화하였다. 인류가 지구상에 나타난 지 100만 년이 지났으니 앞으로 200만 년 안에 인류도 멸종하거나 초능력인류로 진화할 것이다. 98% DNA가 인류와 같은 침팬지의 유전인자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인류의 과학과 이로 인한 환경의 파괴는 호모사피언스 종의 존속기간을 훨씬 앞당길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점에서 과학의 발전과 인류의 초인류로 급성장은 아이러니이며 넌센스일지 모른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문제에 실질적으로 접근해보려는 시도가 너무 어리석은 짓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나의 삶의 근본적인 방법이 모두 이 문제에 걸려있어 무모한 짓 인줄 짐작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뛰어들었다.
김** 교수의 48회로 구성된 '불교와 철학의 만남' 강의를 듣고 개념을 잡을 것 같기도 하여 박**박사의 28회로 구성된 '뇌 의식의 출현'이라는 강의를 반복하여 들었으나 도대체 오리무중이다. 내친 걸음이라 그냥 둘 수도 없다. 박 박사의 강의록인 '뇌 생각의 출현' 책을 구입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내 전공 외의 지식이 너무 얕은 것 같아 박 박사 책을 잠시 밀쳐두고 천문학, 신경세포학, 진화론, 양자역학, 물리학 등 생명의 근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에 도움이 될만한 책들을 30여 권 구입하여 독파해 보기로 하였다. '데카르트 오류'에 이어 오늘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도리언 세이건(Dorion Sagan)]'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더욱 혼란스러울 뿐이다.
아무튼,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다음 책을 골라 들 것이다. 성철 스님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책을 읽지 말라"고 하셨다. 그러나 그가 관리한 장경각에는 1만 권이 넘는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으며 읽은 책 목록은 물론 내용도 잘 요약하여 보관하셨다. 나도 책을 읽고 '어떻게 살 것인가?'의 가닥을 잡고 나서 책을 읽었던 시간의 무용론을 역설하고 싶다. 나의 철학과 삶의 가치관이 서질 않았으니 우선 앞서 간 현인들의 흉내를 내고 그들의 논지를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얻은 잠정적인 나의 생명에 대한 결론에겠지만, 생명은 지구의 풍부함이며 태양의 현상, 즉 지구의 대기와 물 태양광선을 세포로 바뀌는 천체적으로 지역적인 변환이다. 생명은 성장과 죽음, 처치와 단축, 변환과 부패의 복잡한 형식으로 보여질 수 있다.
생명은 다윈의 시간을 통해 최초의 박테리아에 연결되고 베르나드스키의 공간을 통해 생물권의 모든 주민과 연결되는 하나의 팽창하는 하나의 네트워크이다. 생명은 피할 수 없는 열역학적 평형의 순간(죽음)을 무한정 연장하기 위하여 자신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거칠고 난폭한 물질이다. 생명은 우주가 인간의 형태로 스스로에게 던지는 물음이다.
생명의 정의와 구분
우리는 누구나 생명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생명개념을 경험적으로, 그리고 직관적으로 파악하여 이를 각각의 대상으로 적용하여 생명체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내는 일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 사이의 경계라든가, 한 생명에서 다른 생명이 나오는 경계에 해당되는 영역에 이르면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과학적 방법으로 생명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기대해 볼 수도 있다. 생명에 대한 엄격한 과학적 정의를 제시하고 이에 맞추어 생명이냐 아니냐? 그리고 독립된 생명체냐 아니냐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과학에서 조차 이에 대한 명쾌한 정의를 내리는 일이 여전히 합의되지 않은 어려운 문제로 남아있는 실정이다.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생명의 범주는 크게 나누면, 생리적(physiological)구분, 대사적(metabolic)구분, 유전적(genetic)구분, 생화학적(biochemical)구분, 열역학적(thermodynamic)구분 등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앞의 세 가지는 전통적 생물학적 테두리 안에서 설정되는 개념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물리화학적 개념을 동원한 구분이다.
생물학적인 구분의 세부 구분인 생리적 구분은 생명의 다양한 현상만을 나열할 수 있을 뿐 본질적인 특성에 접근하기 힘들다. 대사적 구분은 생명체란 일정한 경계를 지니고 있는 체계로써 일정한 기간 동안 동일한 내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외부와 끊임없이 물질교환을 수행하는 존재로 정의하고 있으나 너무 국지적이며 동시에 너무 포괄적인 정의가 되는 모순을 갖고 있다. 유전적 구분은 생식작용이 구분의 근간이 되나 노새와 같은 예외가 있어 완벽하지 못하다.
물리화학적인 구분에는 생화학적 구분과 열역학적 구분이 포함된다. 생화학적 구분에서는 생명을 구성하는 물질의 형태가 유전적 정보를 갖고 있는 분자들과 생물체내의 화학적 반응을 조절하는 효소분자들로 보고 이러한 물질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구분이다. 반면 열역학적 구분에서는 생명은 자유롭게 에너지의 출입이 가능한 하나의 열린 체계로 보고 특정한 물리적 조건의 형성에 의하여 낮은 엔트로피, 즉 높은 질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나가는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보는 것이다.
생화학적 구분이 생명의 소재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면, 열역학적인 구분은 기능적인 정의가 된다. 그러므로 열역학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소재가 무엇이던 간에 열역학적인 구분을 충족한다면 생명이라는 모순된 결론에 이르고 생화학적 입장에서는 또 이와 반대되는 논리모순의 결과에 이르므로 모두 완전한 생명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경험적 직관과 과학적 정의가 일치하지 않은 것은 경험적 정의는 분명히 일상적 경험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는 시간적 · 공간적으로 우리의 경험영역에 국한 될 수밖에 없는 반면, 과학적 정의는 공간적으로 생명의 미시적인 구조 및 생태적 성격에 대한 이해를 포함시켰으며 시간적으로 생명 발생의 연유 및 진화과정에 관한 연구성과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은 개체생명의 틀 안에 생명의 총체적인 모습을 담아보려는 무리한 시도에서 나타난 불가피한 개념적 모순이다. 생명에 대한 총체적인 개념을 수립하여 그 동안 과학이 이룬 부분부분적인 이해를 결합하여 생명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하고 이를 의미 있는 전반적인 정리작업을 수행하여 그 동안 과학이 파악한 생명의 참모습을 보는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생명이란 태양과 지구 사이에 형성된 지속적 에너지흐름에 의해 약 35억년 전에 지구상에 하나의 생명체가 탄생되었으며 이것이 지속적인 성장과정(진화)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또 앞으로도 존속률이 1을 넘어서는 성장을 계속하는 상태를 유지시켜 나가는 체계' 라고 정의할 수 있다.
보생명 보존의 당위성
생명체계가 태양과 지구 사이의 자유에너지의 흐름 속에 놓인 하나의 물리계로서 이 정도까지 고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의 생명은 그 동안의 진화과정을 통해 이러한 높은 질서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는 개체생명들의 기여 때문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개체 생명이란 총체적인 생명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총체적인 생명의 정의 내에 포함된 국소질서 내의 생명을 말한다.
개체생명들은 주어진 조건 아래서 스스로의 생존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이며 이를 위해 생명을 보전하려는 생존의지를 갖게 된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활동은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보생명과 상호의존관계를 통해 이뤄진다. 여기서 보생명은 우리가 그 동안 환경으로 불러온 개체생명의 생존을 위한 수단 정도로 생각해 온 것이다. 따라서 인류가 직면한 위기는 이러한 시각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생명전체로써 건전한 생존방식을 거절하고 무분별한 보생명을 파괴함으로써 총체적 생명체계를 위협하고 있다. 바로 이 문제는 우리가 생명에 대한 바른 이해를 진지하게 추구해야 할 당위성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