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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일생을 중도적 입장, 실사구시 입장에서 실용을 주창해왔다. 중도적 입장을 항상 취해와서 조금 보수적인 분들은 저를 진보적이라고 하고, 진보적인 분들은 저를 보수적이라고 하는데 저는 바뀌지 않았다. 누가 뭐래도 저는 중도이다."

 

지난 21일 열린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정운찬 국무총리 후보자는 자신의 이념적 정체성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자신이 총리직을 수락한 핵심 배경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중도실용-친서민' 코드에 있다고 고백했다.    

 

케인즈언(Keynesian)이라는 정 후보자가 청문회 기간 동안 내놓은 정책관련 답변들을 살펴보면, 실제 그가 MB코드에 확실하게 접속했다는 징후들이 적잖이 드러났다. 

 

4대강 찬성론 "강을 아름답게 한다는 아이디어에 찬성"  

 

먼저 대운하 반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정 후보자가 대운하 건설의 전단계라는 의심을 받고 있는 4대강 살리기 사업에는 적극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일각에서 이를 '변절의 근거'로 제시하기도 한다.

 

정 후보자는 4대강 살리기 사업 찬성론의 주요 근거로 '저비용'과 '경제성'을 들었다. 나중에는 가뭄과 홍수예방, 수질 개선 등을 근거목록에 추가했다. 특히 그는 4대강 살리기 사업을 '산림녹화사업'에 비유하면서 "나라는 산과 강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을 좀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에 찬성한다"고 말해 단편적이고 피상적 인식을 드러냈다.

 

인사청문회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세종시문제에서도 정 후보자는 '세종시 수정'이라는 청와대의 흐름을 그대로 수용했다. 그는 "세종시 건설 수정 관련 발언을 후회하지 않는다"며 "양심에 따라 바른 말을 했다"고 '불퇴전'의 의지를 보였다.     

 

또한 정 후보자는 공무원노조, 비정규직 등에서도 보수적 견해를 드러냈다. 그는 공무원 노조의 민주노총 가입과 관련 "민주노총이 정치적 행동과 단체행동을 많이 한다"는 점을 이유로 "가입은 권장할 만한 사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는 행정안전부와 임태희 노동부장관 내정자가 내놓은 의견과 똑같다.

 

정 후보자는 현행 비정규직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뜻을 나타냈다. 그는 "2년 후에 비정규직을 꼭 정규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며 "시간이 지나면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꿔주는 것은 서서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의무조항이 포함된 현행 비정규직관련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여당도 비정규직관련법을 개정해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청년실업에도 MB코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

 

정 후보자는 최근 전세대란 조짐과 관련 '공급확대론'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그는 "방법은 주택공급을 많이 해야 한다"며 "이명박 정부의 보금자리 주택보급 등에 동의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보금자리주택 공급정책이 "무늬만 서민용"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늘려야 할 임대주택은 곁다리고, 분양주택이 중심이라는 지적이다.

 

정 후보자는 "지난 50년 동안 경제성장 과정에서 재벌이 한 역할이 상당하다"고 재벌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다만 부작용은 최소화하고 장점을 살리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있으나 마나 큰 차이가 없었다"며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에 찬성했다.

 

대학입시와 관련해서도 정 후보자는 "대학이 어떤 학생을 뽑고,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학의 자율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입시에서 대학의 자율성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한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과 통하는 대목이다.

 

특히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입학사정관제의 효과도 일부 긍정했다. 다만 "규모가 커지면 부작용도 커지기 때문에 원래의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며 정부의 '입학사정관 확대'에는 우려를 나타냈다.

 

청년실업 문제에서도 철저한 MB코드를 드러냈다. 정 후보자는 "우리 청년들의 눈높이를 낮추어야 한다"며 "대학 나와서 손에 기름 묻히기 싫어하고, 굉장히 높은 샐러리(월급) 주는 직장에만 가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청년실업 문제는 일방적으로 일자리가 없어서 생긴 게 아니다"라며 "청년들에 대한 계도라든지 정보를 잘 제공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현실적인 대책 마련보다는 청년층의 자발적 의지만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정 후보자의 발언은 지난해 12월 이명박 대통령이 4차 라디오연설에서 "상황을 탓하면서 잔뜩 움츠린 채 편안하고 좋은 직장만 기다리는 것은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이 대통령은 "냉난방 잘 되는 사무실에서 하는 경험만이 경험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3불정책(대학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 폐지'를 주장해온 정 후보자는 "시기상조"라는 전제조건을 달긴 했지만 기여입학제의 경우 사립대에 한해 실시를 검토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FTA 체결 '신중', 용산참사 해결 '적극' 등 전향적 측면도 있어

 

물론 정 후보자는 MB코드에서 약간 벗어난 의견도 내놓았다. 인사청문회 첫째날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겠다"고 선언한 데서 알 수 있듯, 몇 가지 정책에서는 학자적 소신을 고수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FTA 체결 신중론이다. 정 후보자는 FTA 자체에는 찬성한다고 전제하면서도 "FTA가 경제적 문제만 아니라 우리의 법률과 제도를 많이 바꿔야 하기 때문에 (동시다발적 FTA 체결에) 신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정 후보자는 ▲쌀은 FTA의 예외 품목으로 한다 ▲개성공단에서 생산된 물품은 한국 내 생산품으로 인정받도록 한다 ▲강대국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투자자-국가 제소제도 적용에 신중해야 한다 등을 한미FTA 체결 조건으로 제시하는 신중한 자세를 보였다.

 

특히 정 후보자는 용산참사의 전향적 해결을 예고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김종률(민주당)·이정희(민주노동당) 의원의 끈질긴 질의에 "총리로 임명되면 다른 것보다 우선해서 유족들을  만나 현실을 파악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한 유족이 청문회장에서 발언하는 동안 의자를 돌려 경청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정 후보자는 용산참사 검찰 수사기록 공개에는 소극적인 의견을 내놓는 한계를 드러냈다. "(수사기록을 공개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이와 함께 정 후보자는 평택 쌍용차파업 당시 식수와 의약품 등의 공장내 반입을 금지한 것이나, 국정원과 기무사가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의혹에는 "어떤 경우에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며 "실상을 살펴보겠다"고 약속했다.

 

국정원의 사찰 의혹을 폭로한 박원순 변호사에게 정부가 소송을 제기한 것과 관련 "그 소송이 불합리하면 소송을 취하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전향적인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또한 정 후보자는 부자감세에도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감세를 일시적으로 생각한다면 경기회복에 별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라며 "감세혜택을 받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기 때문에 빈부격차가 커진다"고 우려했다. 소득분배나 재정건전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특히 정 후보자는 이정희 의원이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며 "어떻게 감세혜택이 중산층과 서민층에 돌아간다고 홍보할 수 있느냐"고 따지자 "통계를 잘 살펴보고 맞다면 고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정 후보자는 이명박 정부에서 무력화된 금산분리와 관련 "금산분리 완화는 장점도 있지만 잠재적인 피해도 많다"며 비판적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관련법 통과를 이유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내년도에 국가채무가 400조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 가운데, 정 후보자는 국가채무의 급속한 증가를 크게 우려했다. 그는 "지금 국가부채 늘어나는 속도가 굉장하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며 "사회복지 지출 등의 기회를 잃어버릴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허수아비 안되겠다"고 했지만... '왼쪽깜박이 켜고 직진'할 수도

 

이러한 전향적인 정책방향을 헤아릴 때 정운찬 내각은 1기 내각보다는 좀더 왼쪽으로 국정운영을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이명박 정부의 중도와 친서민 노선을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자신의 역할을 위치시킬 수 있다는 것.

 

정 후보자 본인도 "이명박 정부에서 허수아비는 되지 않겠다"며 총리직 수행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고, "총리가 되면 전체 정책을 살펴서 무리있는 것은 고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정운찬 전 총장을 총리로 내정한 것은 친서민의 신호로 읽혀진다"며 "그가 총리로 최종 인준되면 이명박 정부의 폭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나성린 한나라당 의원이 "이명박 정부가 1년반 동안 한 것은 감세, 규제완화, 개방확대 등 참여정부의 기본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라고 말하자, 정 후보자는 "바른 방향이었다"고 화답했다.

 

이렇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를 긍정하는 한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의 지적처럼 "왼쪽깜박이를 켠 채 직진"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태그:#정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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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상근기자. 평화를 만들어 갑시다.

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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