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미국의 T.케힐(Thaddeus Cahill)이 발표한 '텔하모늄'이란 최초의 전자악기 원류의 발명 이후, 전자악기는 로버트 무그(Robert Moog)의 '신서사이저'를 통해 상용화된 하나의 제품이자 검증된 악기로써 대중들과 뮤지션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차가운 전자음을 내는 악기는 점차 무수히 다양한 음악장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현대에 와서는 이 악기가 없이 우린 몇몇 고전음악을 제외한 그 어떤 음악도 들을 수 없고 만들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장난감 같은 악기가 과거 록이나 재즈 혹은 현대음악과 같은 거대한 음악적 장르에 포섭되어 차용되어지는 수준을 벗어나 독립적으로 음악전반을 이끌어 가는 장르로 크게 대두되기 시작하는데,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렉트로니카'라는 장르다. 물론 이 음악들을 하나의 주체적인 음악장르로 어떻게 명확히 확립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은 장르의 결합이나 악기의 발전으로 인해 지금도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가장 큰 특징이라면 역시 강력한 전자음, 비트, 루프 그리고 클럽과 믹스정도로 얘기할 수 있겠다.
또한 이런 일렉의 거대한 물결의 힘은 국내에서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금도 그들만의 클럽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수많은 클러버들의 활발한 온, 오프에서의 활동이나, 한국에서도 얼마 전에 열린 '글로벌 개더링'(Global Gathering) 축제의 열기들은 이 장르가 가지는 인기와 가능성을 증명한다. 다만 이 글로벌 개더링에서 언론이 지목한 가장 큰 이슈는 프로디지(Prodigy)라는 거물급 아티스트의 등장이 아니라 우연히 찍힌 '빅뱅'의 권지용이 담배를 들고 있는 사진이 합성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다는 게 좀 씁쓸하긴 했지만.
음반의 재발견⑤: 모텟의 <mo:tet>
아무튼 지금 이 장르에 대해 이런저런 생소한 단어들과 용어들이 나온다고 해서 이 장르를 마니아들을 위한 음악이라고만 생각하고 고개 돌리기엔 조금 이르다.
실제로 이 장르의 음악들을 들어볼라치면, 지금 한국의 대중음악에서 유행하고 있는 반복되는 후크나 오토튠 사운드들 역시 이러한 일렉트로니카 장르들과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클럽을 자주 찾는 사람이라면 사이키 조명과 함께 익히 들어왔던 강한 비트들에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음악을 통한 대중적인 장르의 결합이나 차용 대신에, 가끔 몸이 아닌 브레인 댄스계열로 포함되기도 하는 기계음 본연의 소리를 담은 음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면 그 주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것은 굉장히 흥미 있는 소리를 담고 있지만, 대중적인 소리를 담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국내에선 얼마 전 6집 <그땐 몰랐던 일들>을 발표하며, 여전히 멜로디스트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는 '윤상'이 이러한 일렉음악을 한다는 것은 그의 음악을 좋아했던 팬들에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비춰질 것도 같다. 하지만 이것은 윤상에겐 어찌 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전자음악과 기계음에 대한 근원적 고찰
6집 <그땐 몰랐던 일들> 발표 이전, 2008년 발표한 이 <mo:tet> 음반까지 국내에서 윤상이란 뮤지션은 사실 한국가요시장에서 전자음악에 관해서는 어떠한 하나의 징표로서 존재한 뮤지션 중에 한 명이다.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시퀀서 프로그램에 대한 무료강좌를 할 만큼 열성을 보이던 그는, 실제로 초기 뉴웨이브를 비롯한 신스팝에 수혜자이자 전파자인 동시에 한국대중음악의 미디 1세대로서 전자음악을 하는 수 많은 그의 자발적 후배들을 양성해 냈던 장본인이다. 그들은 윤상이 전자악기를 통해 만들어내는 소리에 열광했고 동시에 그를 통해서 이 음악장르에 대한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자음악 장르에 한정해서 그의 전체적인 음악을 규정짓기엔 윤상은 그 스펙트럼이 꽤 넓은 뮤지션이긴 분명하지만, 그 근간은 언제나 전자음악에 대한 고민과 발전이 맞닿아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아울러 이로 인한 2002년 발매했던 4집 <이사>나 2003년 5집 <There Is A Man>에서의 타 장르의 음악이나 악기들의 적극적인 교합을 통해 스스로의 매너리즘을 타파하려는 그의 일련의 시도는, 3집 <Cliche> 이후로 그가 늘 염두에 두었던 고민인 동시에 동료 뮤지션들이나 팬들에게 그가 늘 존경받는 뮤지션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근거로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때마다 겨울 같은 전자음을 배경에 두면서 그 안에 봄 같이 따스한 멜로디와 박창학의 아름다운 가사를 첨가하여, 차가운 그곳에 따뜻한 숨을 불어넣는 특유의 '윤상 사운드'로서 팬들에게 보답했다. 하지만 그러한 사운드는 주류와 벗어난 비주류 전자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고찰을 그에게 부채질하기에 충분했고, 그러한 고민 후에 그가 떠난 뉴욕 유학길에서 발견한 음악이 바로 일렉트로니카 장르 가운데서도 전자음 본연의 소리들을 얘기하는 글리치(Glitch) 혹은 IDM이었다.
따라서 이 <mo:tet>은 태생적으로 대중친화적인 음반이 될 수가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 계열의 인더스트리얼(Industrial)이나 익스페리멘탈(Experimental)과 같이 급진적인 소리까지는 아닐지라도 윤상이 직접
'나의 정규음반과는 선을 긋는다' 라고 말할 만큼, 한국 가요시장에 익숙한 청자들은 결코 쉽게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이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정체되어 있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전자악기들을 통해서 표현할 수 있는 기계 본연의 소리를 이 한국시장에서 발매했다는 그 사실에 있다.
소리의 탐구, 그리고 소리의 진보
커다란 하얀 종이에 격자를 나눠 한 땀, 한 땀 채워나간다. 그것의 색깔은 소리로서 치환되고 채우는 공간은 비트로서 치환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림은, 즉 음악은 완성되어 있다. 또한 그 '공간'은 변화하고 '소리'는 그 공간을 찌른다. 메우는 게 아니다. 날카롭게 찌른다. 그래서 메우는 것보다는 약간 휘발성이 강하다는 느낌도 지우기 어렵긴 하지만, 그것은 음악을 듣다보면 어느새 공감되고 만다.
따라서 일종의 '전자음 레포트' 같은 이 음반은 그래서 그러한 일렉트로니카, IDM이 가지는 매력을 십분 발휘한다. 아울러 트렌드를 쫓으면서도 스스로의 퀄리티를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음반이기 때문에 국내에 존재하는 일렉음악 애호가들이 즐기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다는 점도 상당히 고무적이다.
대중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 존재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음반. 난 이런 음반들과 음악들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