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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7일/일) 저녁 고장 문학단체 9월 모임에 참석했다. 우선 식사부터 하고, 몇 가지 현안 문제들을 논의한 다음 이런저런 여담을 나누는 시간에 소설가 박범신 선배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박범신 선배에 관한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은, 박 선배가 지난 17일(목) 오후 태안에 와서 특강을 했기 때문이었다. 박 선배는 그 날 태안군 초청으로 태안에 왔다. 태안군 주민생활과에서 제3회 '태안군민 아카데미 강좌'라는 행사를 열면서 소설가 박범신 선배(서울문화재단 이사장·명지대 문예창작과 교수)를 초청한 것이었다.
태안군청 대강당 300여 석을 꽉 채운 가운데 두 시간 동안 진행된 그 특강에는 고장 '태안문학회' 회원들도 다수 참석했다. 박 선배가 강연을 시작하면서 후배 소설가인 '태안의 지요하'에 관한 말을 잠깐 한 것이 회원 모두에게 우선 좋은 인상을 준 것 같았다.
현 태안문학회장 변학수 시인은 그 날 일을 머리에 잘 저장했다가 9월 모임 자리에서 그 얘기를 화제로 올렸다. 그리고 내게 박범신 선배와 나의 관계, 인연의 질량을 궁금해했다. 그래서 나는 잠시 내가 관련되는 쪽으로 박범신 선배에 관한 얘기를 하게 되었다.
내가 박범신 선배를 처음 만난 때는 1982년 1월 초순 어느 날이었고, 장소는 서울 종로구 교남동에 있던 '소설문학사'였다. 그 해 '6개 중앙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가 좌담회'를 소설문학사가 마련하여 참석하게 되었는데, 일곱 명의 신춘문예 당선작가 좌담회를 진행한 이는 박범신 작가였다.
나는 그 날 박범신 선배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리고 오래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서 박 선배의 유다른 눈빛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을 내는 듯했다. 까만 색감을 지닌 반들거리는 눈빛에서 그의 재기(才氣)와 명석함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일곱 명의 신춘문예 당선작가들 중에는 조선일보에 당선한 정호승씨도 있었다. 이미 예전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처지에서 이번에는 소설로 등단을 한 것이었다. 그는 그 후 소설은 거의 쓰지 않고 시 쪽으로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여 오늘날 가장 유명한 현역 문인 중 한 사람이 되었는데, 사람들은 대개 그를 시인으로만 기억하지 소설가로는 기억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날 좌담회에서 사회자 박범신 선배는 나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유일한 중편부문 당선작가인 데다가 나이도 가장 많은 34세였고, 1967년 '현대문학'지 장편소설 공모에서 '당선후보'가 된 이후 무려 15년이나 번번이 고배를 마시다가 마침내 등단의 꿈을 이룬 사람이기에, 자연 내 사연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소설문학'은 그 해 2월 호에 '신춘문예 당선자가 좌담, 일곱 명의 앙팡테리블'이라는 특집을 올렸는데,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해 실로 27년 만에 그 책을 찾아 읽어보니, 내가 한 말들이 가장 많이 올라 있지 싶어 조금은 무안한 기분이기도 하다. 그건 아무래도 사회자 박범신 선배가 내게 질문을 많이 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박범신 선배는 그 날의 나에 대한 관심을 혼자 접어두지 않고 전파하는 일을 했다. '엘레강스'라는 여성잡지(훗날 '여성자신'으로 이름이 바뀜)사에 가서 내 얘기를 한 모양이었다. 나는 엘레강스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고 글을 하나 쓰게 되었다. 등단하자마자 곧바로, 그리고 등단 후 최초로 받은 원고 청탁이었다. 그 최초의 원고 청탁이 소설이 아닌 '수기'를 써달라는 것이어서 다소 섭섭함을 느꼈지만,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게 전화로 긴급하게 원고 청탁을 하는 엘레강스 편집부 간부는 박범신 작가로부터 내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박범신 작가에게 고마움을 느꼈고, 그 고마움에 상응하기 위해서라도, 소설 아닌 수기지만 열심히 쓰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략 160매 분량일 것 같은 그 글은 그 해 엘레강스 2월호에 비중 있게 실렸는데, 표지에도 큰 활자로 '이색고백, 15년 만에 작가된 막노동꾼의 수기'라는 말이 올라 있다. 역시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잠깐 책을 찾아서 펼쳐 보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그 후 나는 박범신 선배를 자주 만났다. 당시 박범신 선배는 안양에서 살았는데, 내 누님도 안양에 살고 있어서 누님 집에 갈 적마다 박 선배를 찾곤 했다. 자주 만나 어울리고 술잔을 나누고 하다보니 자연 '형님 아우'하는 사이가 되었다. 박 선배는 나보다 두 살 위다.
그리고 자주 박 선배를 만나다보니 당시 안양에서 살고 있던 소설가 윤흥길 선배(현 한서대 교수)와 김상렬 선배, 또 정태륭 정동수 선배와 김종철 시인 등도 만나 술잔을 나누게 되었다. 1984년 봄이던가, 박범신 윤흥길 선배와 함께 안양의 수리산을 오르던 날이 아슴히 그리워진다. 수리산 정상에 올라서 돼지 삼겹살 구워 소주를 마시던 풍경….
나는 1984년 가을 최초의 책을 갖게 되었다. 1967년(19세 때) '현대문학'지 장편소설 공모에서 '당선후보'가 되어 나로 하여금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하고 장장 15년 동안 고생하게 만든 장편소설 <개 임금님>을 개작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이 책으로 만들어진 것은 전적으로 박범신 선배 덕이었다.
당시 부산일보 연재소설 <불꽃놀이>를 출판했던 출판사에 적극적으로 내 소설을 천거하여 출판이 되도록 한 박 선배는 내게 소설의 제목을 <신화 잠들다>로 하자고 제의했다. 내 소설을 정독했기에 그런 제목을 생각했을 것이었다. 나는 그 제의를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내 최초의 책인 <신화 잠들다>는 출판도 제목도 박 선배와 나의 특별한 인연을 반영하는 것이 되었다.
나는 그 해 11월 어느 날, 내 생애 최초의 책인 그 책을 가지고 고향에서 출판기념회 행사를 가졌다. 그 행사에 박범신 선배는 가족과 함께 내려와서 참석해 주었고, 또 축사를 해주었다. 그 일로 박범신 선배는 그때 처음 태안을 찾은 셈이었다.
박범신 선배 덕에 세상에 나오게 된 내 최초의 책인 장편소설 <신화 잠들다>는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교수가 그 해 연말 한국일보 지면에 '문학 결산'을 하면서 주요 수확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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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여름 박범신 선배가 가족과 함께 만리포를 찾았을 때 이후로는 박 선배를 자주 만나지 못했다. 박 선배가 안양을 떠나 서울 평창동으로 이주한 뒤부터는 서로 사는 곳이 다르고, 나 역시 점점 바쁜 생활 속에서 여유를 잃게 되면서 만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십 수년이 지난 1998년 어느 날 박범신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KBS 2 TV의 '그곳에 가고 싶다'라는 프로에 출연하게 되어 서산 천수만의 간월도를 가게 되는데, 그 기회에 얼굴 좀 보자는 연락이었다.
덕분에 실로 오랜만에 박범신 선배를 다시 볼 수 있었고, 박범신 선배와 후배 작가인 내가 몽산포에서 오랜만에 해후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고, 내 초등학생 아이들도 난생 처음 TV에 출연(?) 할 수 있었다. 박 선배는 일행과 함께 우리 집(지금의 아파트가 아닌 23평 연립)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면서 1984년에 뵈었던 내 선친 모습과 그 시절의 우리 옴팡집을 추억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10여 년 세월이 금세 흘렀다. 1998년 그때로부터 정확히 11년이 지난 올해 9월 17일 나는 이번에도 우리 고장에서 박범신 선배를 다시 만났다. 우리 고장에서 박범신 선배를 만나기는 이번이 네 번째다.
실로 오랜만에, 1998년 이후로는 처음으로 박범신 선배를 우리 고장에서 다시 만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태안군청 주민생활과에 감사했다. 박범신 선배와 처음 만난 때로부터 어느새 27년의 세월의 바람같이 흘렀음을 헤아렸다. 피차 혈기왕성했던 30대 중반 시절로부터 30년 가까이 흘러온 오늘 우리는 60대 초반과 중반의 세월을 얼굴에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불현듯 25년 전이던가, 어느 날 안양 김상렬 선배 집에서 셋이 함께 술잔을 나누던 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나이 서른 아홉이던 박 선배는 내년이면 마흔 살이 된다는 사실에서 이상한 거부감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년이면 마흔이 된다는 게 참 불쾌해. 이런 감정도 결국엔 수용하고 사랑해야겠지만, 현재는 매우 불쾌해"라는 말을 하며 저물어 가는 30대 시절을 적이 아쉬워했다.
그런 30대 시절 마지막 해의 박 선배 모습을 회억하면서 나는 박 선배가 3년 전 환갑 나이에 도달할 때 기분은 어땠을까? 괜한 궁금증을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 궁금증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는 환갑이라는 나이도 결국엔 수용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오늘의 60대 시절도 사랑하며 살 터였다. 그건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사항일 것이었다.
그는 중년 세월로 접어들면서 종교도 가졌다. 30대 시절 개신교 신자인 윤흥길 선생과 천주교 신자인 내가 어쩌다 종교논쟁(?)이라도 하게 되면 중재 역할을 했던 그는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된 부인을 따라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 태안을 오면서 최근 저서를 두 권 가져왔다. 한 권은 내게 주고, 한 권은 진태구 태안군수에게 선물했다. 장편소설 <고산자>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김정호의 일생을 다룬 작품이다.
그는 태안군청 대강당에서 특강을 시작하면서 고산자 김정호에 관한 얘기부터 했다. <고산자>를 쓰기 위해 서산시 팔봉면 팔봉산에도 왔었다고 했다. 그는 듣기 좋은 음색과 음조를 지녔다. '소설가 박범신이 말도 참 잘한다'는 사실은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는 정확한 발음과 리드미컬한 음조로, 감동적인 내용을 명쾌하고 열렬하게 설파한다. 청중들로 하여금 쏙 빠져들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두 시간 강연을 논스톱으로 진행했다. 좀더 재미있게, 또 덜 힘든 상태로 진행하기 위해 30분용 CD를 하나 준비해왔다. 몇 해 전 KBS 1 TV에서 방영했던 그의 히말라야 등정 모습을 담은 CD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태안군청 대강당에는 그 CD를 청중들에게 보여줄 설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도리 없이 두 시간 동안 자신의 음성으로만 특강을 계속해야 했다.
청중은 거의 자리를 뜨는 사람 없이 그의 열강을 경청했다. 그의 강연 주제는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사는 일'이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고 또 찾으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인가에 대해 청중들은 깊은 공감을 얻었을 터였다.
그가 강연을 마쳤을 때 그의 최근 저서 <고산자>를 들고 와서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를 보러 오면서 서점에 들러 미리 책을 사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고장에도 저런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행스러움을 느끼는 한편 박 선배 앞에서 면목이 서는 듯한 기분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날 오후 3시 40분에 서울성모병원 류머티스내과 특진 예약이 잡혀 있었다. 그러나 박범신 선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 예약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또 오후 7시 서울에서 갖는 한 모임에 참석할 예정이어서 4시 40분 버스를 타려고 했다가 그것도 취소했다.
박범신 선배가 동행한 대학생 제자들과 함께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차 한잔 나누자고 하는 걸 사양하고, 5시 30분쯤 내 차를 가지고 서울을 갔는데, 평일인데도 서해안고속도로부터 막히더니, 서부간선도로를 통과하느라 거의 죽을 고생을 했다. 모임에도 한 시간 이상 지각을 해야 했다.
그래도 박범신 선배를 오랜만에 만난 덕에 질감 좋은 옛날의 추억 속에도 잠겨볼 수 있었다. 작가로서의 능력과 업적, 그리고 명성을 놓고 볼 때 그는 내게서 아주 멀리 있는 사람이지만, 옛날 한때 자주 어울리며 술잔을 나누고, 그에게서 이런저런 은덕을 입었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가까운 인연지정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의 이 글을 마치면서 아는 사람은 다 하는 박범신 작가의 등단 일화를 소개한다. 그는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는 예심에서 일단 탈락을 했다. 문화부 기자들이 하는 예심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예심 작업을 마친 정규웅 당시 중앙일보 문화부 문학담당 기자(문학평론가)는 마지막으로 일어서서 코트를 입으면서 광주리에 가득 쌓인 예심 탈락 원고들을 잠시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광주리의 맨 위에 있는 원고 하나를 집어들었다.
몇 장을 읽어보던 그는 도로 자리에 앉아서 그 원고를 끝까지 읽었다. 그리고 원고 겉장에 있는 예심 기자의 사인을 지우고 자기 사인을 한 다음 본심 원고들 위에 올려놓았다. 그렇게 정규웅 기자에 의해 예심 탈락원고 광주리 속에서 살아난 그 원고는 결국 당선이 되었고, 그 해 각 일간지 신춘문예 당선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여름의 잔해>라는 소설이다.
그런 기사회생의 운이 없었다면 그의 반들거리는 눈빛도 빛을 얻지 못했거나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그는 특별한 천운 속에서 등단을 했고, 실력과 천운이 공존하는 작용 속에서 작가로 대성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그는 지금도 문학평론가 정규웅 선생을 평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며 살 것으로 믿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