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올해는 5월이 윤월(閏月)이어서 추석이 작년보다 한 달가량 늦은 까닭에 부모님 산소 벌초도 작년보다 30일 정도가 늦은 지난 토요일(26일)에 했다. 그런데 벌초로 이루어진 조카들과의 만남은 다음날 점심때까지 이어졌다.

 

그동안은 추석을 한 달쯤 남겨놓고 형제들이 상의해서 날을 잡아 벌초를 해왔는데, 올해는 며느리 셋 모두가 벌초에 참여해 하늘나라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더욱 기쁘게 해 드린 것 같다.

 

산소는 집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에 있다. 하지만, 산소방향으로 가는 버스가 없어 아내가 형님과 약속한 오전 9시까지 태워다 주기만 해도 황송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아침을 먹고는 가자고 하더니 내려주고 돌아가지 않고 산소까지 걸어 올라가 자기도 낫질을 잘한다며 풀베기를 시작했다. 

 

아내는 오후 근무라서 낮 12시 조금 넘으면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벌초에 참여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풀베기를 하다니, 더없이 흐뭇했고, 감사한 마음마저 들었다.

 

 

조금 있으니까 형수님도 도착해서 풀베기를 시작했고, 바쁜 일이 있어서 오후에나 올 것 같다던 동생도 제수씨와 함께 올라와 벌초에 동참했다. 일을 하면서도 "아들 셋과 며느리 셋이 열심히 풀베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실 어머니·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다.  

 

수원 조카 부부와 함께 조금 늦게 올라온 셋째 누님도 남동생 셋과 동생의 댁 셋이 풀베기하는 모습이 감격스러운 듯 "참말로 보기 좋네!"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하여간에 자식은 많이 낳고 봐야 혀!"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최소한 아들딸 오 남매는 둬야!"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형수, 아내, 제수씨까지 낫을 들고 풀베기를 거들었고, 셋째 누님도 와서 덕담을 해주었으며, 조카며느리들이 장만해온 음식을 먹으면서 잠시 화기애애한 대화의 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

 

셋째 누님: "오늘도 봐봐. 벌초도 형제들이 다 모여서 허니까 보기 좋잖여. 그려서 자식은 최소한 아들딸 오 남매는 두야 혀···."

형수: "아들 둘에 딸 둘, 사 남매만 돼도 아순대로 괜찮지요"

큰 조카: "제가 결혼하니까 장인어른이 부르더니 '자식은 최소한 머슴애 둘에 딸 둘은 있어야 애들이 외롭지 않은 거여!'라고 하시기에 국가 시책도 안 그런데 뭘 그리 낳으라고 하는가?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맞는 것 같아요. 지지고 볶더라도 최소한 넷 이상은 둬야겠더라구요. 아들 둘, 딸 둘 거기에 플러스 알파···."

 

옆에서 듣기만 할 수 없어 "나도 총각 때는 아들 둘에 딸 하나, 최소한 셋 이상은 낳아야 한다고 주장혔지. 그런디 결혼혀서 딸 하나만 뒀잖여. 환경이 바뀌니까 생각도 바뀌고. 내가 하는 일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더라니까···."라며 거들었다.

 

남동생들 부부가 함께 벌초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셋째 누님의 자식에 대한 얘기가 토론으로 이어졌는데, 아이들이 정을 모르고 외롭게 성장할 것에 대비해서라도 셋 이상은 낳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다섯 이상도 좋다는 의견까지 다양했다. 

 

공무원 생활을 30년 가까이 해오는 큰 조카는 아들딸 가리지 말고 하나만 낳기 운동이 시작됐던 80년대 초 국가 시책까지 거론해서 '역시 직업은 속이지 못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딸 하나만 둔 아내가 말없이 앉아 있으니까, 옆에 있던 큰 조카가 "숙모님 12시가 넘었어요. 출근하셔야지요."라며 분위기를 바꿨고, 아내는 퇴근하면 곧바로 올 것이니까, 모두 집에서 하룻밤 묵어가라고 당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햅쌀로 지은 밥에 부침개, 익은 김치에 삶은 돼지고기를 싸먹으며, 셋째 누님의 선창으로 막걸릿잔을 들고 '위하여!'를 외치기도 했는데, 옆에 잠들어 계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놀라지나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파주에 살다가 서울로 이사한 큰 조카는 낚시가 취미인 형님에게 내년에 지을 시골집 옆에 저수지가 있는데 낚시꾼들이 많이 모여드는 곳이니까 자주 오셔서 낚시도 하고 주무시고 가시라며 미리 초대하면서 이모(셋째 누님)도 꼭 오셔서 쉬었다 가시라고 당부했다.

 

올해도 강인한 힘 보여준 형님

 

형님은 작년에도 어깨가 좋지 않아 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다니면서도 부모님 산소는 물론 큰 매형이 묻힌 사돈댁 산소까지 깔끔하게 벌초를 마쳐 동생들과 조카들을 놀라게 했는데, 올해도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무거운 예취기를 등에 메고 벌초하는 모습은 예순일곱 나이가 무색할 정도였는데 그렇게 강인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님은 "부모님 산소 벌초는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한다!"고 하지만, 무거운 예취기를 넘겨받을 후계자가 하루빨리 나와야 하는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조카와 조카며느리들은 형님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벌초하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더니 "큰 삼촌에게 보약이라도 한 재 지어 드려야 하는 데 큰일이네요!"라는 말로 감사한 마음을 대신하면서 가져온 음식을 차려놓고 성묘를 마쳤다. 

 

벌초든 성묘든 산소 일이라면 빠지지 않았던 큰 누님 얘기가 나와서 잠시 숙연해지기도 했는데, 병원에 입원해있는 모습과 옛날 추억들이 떠올라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고 마음속 깊이 만족해하며 항상 고맙게 여겼던 형님에게도 덕담을 건넸을 터인데···.  

 

처음 묏자리를 구입했을 때 큰 누님은 언덕 너머에 시부모를 모시면 함께 성묘도 다니고 좋을 텐데 아무리 동생이지만, 형님에게는 어려워서 말을 하지 못하겠다며 나에게 부탁했고, 어머니를 통해 형님의 허락을 얻어 이장(移葬)을 마쳤다. 그 후로 함께 성묘를 다녔고, 산소 얘기가 나올 때마다 형님에게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을 했었다.

 

이튿날까지 이어진 벌초 행사

 

일손이 많다 보니까 벌초를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성묘를 마친 조카들과 시원한 그늘에 둘러앉아 맑고 푸른 5월의 하늘같은 이야기꽃을 피우다 집으로 돌아와 냉동실에 보관해둔 홍어를 안주로 저녁상을 준비했다. 

 

 

마침 낚시질 갔던 조카(셋째 누님 아들) 식구들이 전갱이를 잡아와 소금구이를 해서 홍어회와 함께 올려놓고 소주 파티가 벌어졌다. 사람이 많아 상을 두 개나 차렸는데 모두 피곤해서인지 일찍 끝났고, 11시 조금 넘어 아내가 돌아와 잠시 이야기가 이어지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27일) 아침에 일어나니까 장딴지가 굳어있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벌초해서 그런지 기분은 상쾌했다. 아침밥은 누룽지를 끓여 간단히 먹고 쉬다가 점심은 1인분에 5천 원씩 하는 우렁이 쌈밥을 맛있게 먹고 헤어졌다.

 

앞으로는 좀 더 자주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는데, 벌초는 단지 산소의 잡초를 베어내는 일이 아니라, 형제들이 만나 우의를 다지고 정을 나누는 의미 있는 행사라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와 한겨레필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부모 산소, # 벌초, #형제, #조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