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코넬리의 1996년 작품 <시인>은 많은 여운을 남기면서 끝을 맺는다. <시인>에서 연쇄살임범은 살인을 자살로 위장하고 현장에 에드거 앨런 포의 시 구절을 마치 유언처럼 남겨둔다. 그래서 그에게 붙여진 별명이 '시인'이다.
이 시인은 결국 자신의 정체를 간파한 FBI 요원 레이철 월링에게 총을 맞고 계곡 아래로 떨어진다.
몇 개월 후에 그 주변에서 시인의 옷을 입고 신분증을 가지고 있는 총상입은 시체가 한 구 발견된다.
하지만 시신의 훼손 상태가 너무 심해서 그것이 시인의 시체라고는 장담하지 못한다. 결국 <시인>은 '연쇄살인범이 아직 살아있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독자들에게 남긴 셈이다.
그리고 그 기대대로 시인은 다시 돌아왔다. 마이클 코넬리의 2004년 작품 <시인의 계곡>에서 시인은 보란듯이 컴백한다. 한 차례 총격을 입고 계곡으로 떨어졌지만 그런 사고가 시인을 각성시키거나 개과천선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8년 후에 다시 돌아온 시인
오히려 시인은 더 업그레이드 되었다. 8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인은 성형수술로 자신의 얼굴을 바꾸고 새로운 이름의 신분증도 구했다. 8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여유있게 돈을 쓰고 다니고, 그 기간동안 그만큼의 연쇄살인도 저질렀다.
범행수법도 더 대담해졌다. 예전에는 살인을 한 후에 자살로 위장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 사냥감을 골라서 접근한 후에 죽이고 파묻어 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사냥감을 찾아 나선다. 그가 여태까지 몇 명이나 죽였는지는 그 자신만이 알고 있다. 아니 어쩌면 그 조차도 모를 수 있다. 더욱 빈틈없고 치밀해진 '시인 2.0'이 탄생한 것이다.
<시인의 계곡>에서 시인은 8년 전 자신을 쏘았던 FBI 요원 레이철 월링에게 소포를 하나 보낸다. 그 소포에 담긴 것은 GPS 판독기. 그 장치가 가리키는 곳은 네바다에 있는 모하비 사막의 한 지점이다. FBI에서 급히 그곳으로 달려가 시체 발굴작업을 시작하고 곧 그 사막에서 여러 구의 시체가 나온다.
시인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는 8년 전의 일을 잊지 않고 레이철 월링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막에서 발굴된 시신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질식사했다는 점이다. 연쇄살인범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범행수법이 조금씩 진화되는 경향이 있는데, 시인은 오직 한 가지 방법만을 고집하고 있다.
한편 LA에서 사립탐정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직 형사 해리 보슈도 사건을 하나 의뢰받는다. 얼마전 심장마비로 사망한 자신의 옛 동료 테리의 죽음을 다시 조사해 달라는 것이다. 의뢰자는 테리의 미망인으로 그녀는 테리의 죽음이 단순 심장마비가 아니라 살인사건이라고 보고 있다.
해리 보슈도 사건을 조사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시인의 흔적을 발견하고 이를 추적하게 된다. 이제 시인은 양쪽에서 추격당하고 있는 셈이다. FBI와 사립탐정, 이들은 함께 힘을 합쳐서 시인이 벌이고 있는 연쇄살인을 끝장낼 수 있을까?
어두운 유년기를 보냈던 시인
시인의 연쇄살인이야말로 전형적인 '묻지마 살인'이다. 금전적인 이유나 원한에 얽힌 사건이라면 동기를 파악하기도 쉽고 범인을 찾아내기도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인처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마구잡이 살인을 한다면 이를 추적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심리분석관들은 시인의 내면과 성장과정을 분석한다. 어린 시절 어머니는 달아났고, 아버지는 그에 대한 화풀이를 어린 시인에게 해댔다. 걸핏하면 폭행을 당했고 욕실에 수갑이 채워진 채 감금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런 어린 시절의 경험이 시인을 점점 편집적이고 강박적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장과정이 지금의 시인을 설명해주진 못한다. 어두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서 그것이 살인을 시작하게 된 동기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범죄자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다.
시인은 글자그대로 살인을 즐겼다. 그가 살인방법으로 질식사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한방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비닐을 뒤집어 씌워서 서서히 질식하게 만든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죽어가는 모습을 감상한 것이다. 이쯤되면 시인은 악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시인은 죽음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자신이 다시 태어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은 생각한다. '악은 절대로 패하지 않고, 다만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뿌리 뽑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대가를 치르게 할 수는 있다. 빠르고 적절한 수단을 사용한다면,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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