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찾기
미국의 흑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Alex Palmer Haley)는 1976년 자신의 가족사를 담은 르포르타주 문학소설 <뿌리(roots)>를 발표했다. 잠비아에서 노예로 팔려 온 흑인들의 뼈아픈 역사를 담은 <뿌리>는 쿤타킨테의 7대손인 알렉스 헤일리가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아프리카 조상에 대한 단편적인 이야기와 10여 년 간의 자료 조사를 재구성해 소설화한 것이다. 이후 뿌리는 영화와 드라마로 재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공감과 공분을 일으키며 조상과 뿌리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모계의 혈통을 따라 뿌리를 찾는 것이 흥미롭지만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혈통을 찾기 위해서는 생물학적으로 모계를 추적해봐야 한다는 사실이 현대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혈통을 중시하는 유태인들은 모계가 유태인일 경우에는 유태인이지만 부계가 유태인이고 모계가 다른 혈통일 경우 유태인이 되지 못한다.
뿌리 찾기야 말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국가에 대한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알렉스 헤일리 역시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구심이 없었다면 뿌리찾기에 나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나의 정체성을 바르게 인식하려면 과거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의 토대가 필요한 것이다.
호주제, 왜곡된 뿌리 의식과 건국절, 굴절된 국가 정체성
건국절 논란은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던져진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대개 역사나 개인 정체성에 대한 부정은 불의를 덮고 권력을 고수하려는 데서 발생된다. 2005년 불합치 판결을 받은 한국의 '호주제'는 부계 혈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법원 공청회장에서였다. 강압적으로 공청회장에 밀고 들어와 앉은 유림들은 역사적 근거 자료를 가지고 발표를 하던 교수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리거나, 공청회장에 앉아 있는 여성들에게 "너희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지?"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인간의 뿌리(roots)나 혈통(race)마저 가부장 사회가 만들어 놓은 권력구조 속에서 파악하고 고수하려다보니 그런 비이성적이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거침없이 했던 것이다.
굴절된 국가 정통성에 문제를 제시하는 '철수와 영희' 출판사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묻다>는 한홍구, 정태현, 이만열, 서중석, 정영철 다섯 명의 근현대사를 전공한 학자들의 한국 현대사 특강을 묶은 것이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역사 주체인 대한민국의 개인들에게 자기정체성 문제를 진지하게 자문하게 만들고, 바람직한 역사의식의 방향타를 제시해 건강한 상식을 지닐 수 있도록 한다.
다섯 명의 학자들은 역사는 한갓 이데올로기나 권력의 시녀가 아니며, 멋대로 왜곡, 미화, 과장해서는 안 되며 자랑스럽든 수치스럽든 있는 그대로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건전한 의식을 지녀야 함을 깨우치게 만든다.
뉴라이트의 역사의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들은 대한민국 정통성 자체를 뿌리째 흔들고 부정한다. 제헌헌법에는 1919년 '기미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을 계승한다'고 국가 정체성을 헌법으로 분명하게 명시해 두었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1948년 의 정부수립을 1919년의 건국절로 둔갑시키려 한다. 건국은 나라를 세운 것이고 정부 수립은 나라 안에 정치 체제를 수립한 것이다. 그것은 초등학생들이라도 헷갈리래야 헷갈릴 수 없는 문제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들이 국부로 지칭하는 이승만조차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기미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천명한 제헌법에 따라 정부수립은 1919년의 대한민국을 계승 재건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은 1948년은 대한민국 원년이 아니라, 30년이 되는 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런 관점에 서면 2008년은 어떻게 됩니까? 대한민국 90년입니다. 주년으로는 89주년이지만 연호로 치면 대한민국 90년이 되는 거예요. 그걸 확실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는 없는 역사도 만들어내는 판인데 우리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왜 부정합니까?
-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중 -
1948년 8.15일 정부 수립 행사 때 축하단 뒤 펼침막에 건국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국민축하식'이라고 써 있었다고 한다. 정부를 수립했던 사람들 의지가 그대로 드러난 글이다. 그런데 국민적 공감대나 합의 없이 우리의 역사를 삼분의 일이나 잘라 없애 버리려고 하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그들이 국가의 근본을 뿌리째 흔드는 그런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 역사에는 잘못되고 비틀린 것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서 청산의 대상이 됐던 사람들이 오히려 주체가 된, 완전히 거꾸로 된 역사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북한은 남한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북한도 아주 철저하고 치밀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특히 기술을 가졌던 사람들은 북한 정권 수립 이후에도 재기용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과거 친일을 했던 사람들이 다시 권력을 잡고 통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저런 이유로 친일을 하고도 여전히 권력의 중심부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은 남한에서
뿌리를 흔들며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행동이 나온 것이다. 그들이 결사적으로 역사에 대한 부정에 나선 이유를 어떤 학자들은 친일에 대한 원죄의식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원죄 의식이 있다면 철저하게 반성하고 자숙해야 하는데 오히려 역사 왜곡을 통해 자기들의 자리를 고수하겠다는 생각으로 뿌리마저 부정하려 한다.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치곤 과한 대가다. 어쨌거나 시민들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것은 건국이 아니라 정부 수립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개인의 역사와 맥이 닿아 있기에 바로 나 자신의 역사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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