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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는 말한다. 속이 다 시원하다고. 그 말을 하는데 입이 그만 찢어지는 것 같다. 논 잃고 밭 잃고 선산마저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사람에게서 보임 직한 체념이나 달관 같은 것이려니 했는데 그것만도 아닌 듯하다.

 

"아 생각해보시오. 개뿔이나 얻어먹을 것도 없는 일을, 응? 먼 허천날 일이 있다고 그렇게나 잠도 못 자고…"

 

땅을 두고서도 농사를 짓지 않는 농사꾼을 그는 아마 상상해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땅이 있는 한 그는 어쩔 수 없는 농사꾼이었다. 다른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곧 땅을 놀린다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농사꾼의 사전에 땅을 놀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소작으로 내줄까. 아니었다. 땅을 가진 농사꾼이 그 땅을 다른 사람에게 내주고 임대료나 챙기며 자기 자신은 다른 직업을 갖는 사람이 더러 있기도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농사는 사람 세상의 근본이라는 케케묵은 말을 굳이 생각할 필요조차도 없이 그에게 농사는 사람의 희망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이었다.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그것이 사람의 희망이라 믿어온 덕분에 그는 늘 배가 고팠다. 아무리 농사꾼이라 해도 밥만 먹고 살 수는 없었다. 사십 대 초를 넘기고 중반, 후반을 넘어 오십으로 들어서면서 돈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손길도 빨라지고 있었다. 저놈의 땅만 없다면 어디 공장에 취직이라도 할 텐데, 할 텐데, 중얼중얼 중얼거리다 보면 가슴이 콱콱 막히고 목은 컬컬해져서 술을 찾게 되고, 술을 마시다 보면 다시 저놈의 땅, 저놈의 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명색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하는 일이란 게 고작 쌀가마니나 들여놓는 정도였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돈은 물론이고 집안의 대소사에 들어가는 비용에서부터 어머니의 약값에 술값까지도 모두 아내의 몫이었다.

 

가깝지도 않은 멀리 식당에까지 나가서 하루 종일 설거지통에 손을 담그고 있다가 퇴근이랍시고 밤늦게 들어오는 아내를 보노라면 목에서 굵은 것이 울컥울컥 올라왔다. 피눈물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게 뭐냐, 이렇게 살려고 태어났던 것이냐. 차라리 혼자서나 살 일이지 결혼은 무슨 사치스런 잔치였던 것이냐. 아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속으로 부르짖고 있는 그에게 어느 날 주류도매상에 배달 직원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여기 이, 내 낯짝 좀 보시오. 살 쪘당게라. 농사 때려치고 술 배달 다니면서 살 쪘어, 살. 마누라가 젤루 좋아혀. 술 적게 먹지, 대꼬챙이 같은 몸뚱이에 살 붙지, 꼬박꼬박 월급 받아오지. 으헤헷, 내가 생각해도 좋은디, 저는 얼매나 좋겠소. 이런 세상이 있는 줄을, 하이고 참, 내가 어째서 그것을 이제야 알았는지."

 

모두들 살을 빼야 살 길이 열린다고 야단인 나라에서 살이 쪘다고 좋아하는 사람을 눈앞에서 보는 기분은 각별하다. 그런데 살이 찐 동기가 농사 대신 술 배달을 직업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면서도 술 배달 같은 것을 어떻게 직업으로 하겠느냐고, 농사와 비교한다면 술 배달은 한참 아랫질이라는 관념이 있었지만, 막상 해보니 농사에 떨어질 이유가 없고, 오히려 훨씬 낫다는 생각도 든다는 그가 그토록 소망하던 농사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참으로 기막히게 찾아왔다.

 

보증이었다. 한 사람 보증을 서 주니까 이 사람도 나도, 저 사람도 나도, 하는데 모두가 절친한 친구들이거나 이웃들이었다. 그렇게 서 준 보증이 몇 건이나 되는지 기억조차 못 하는 그에게 어느 날 농협으로부터 최고통지서가 날아오더니 무슨 유행병처럼 줄을 이어 날아들었다.

 

새로운 영농법이라 해서 시설농사가 대대적으로 보급되던 시절부터 그의 보증은 시작되었다. 비닐하스로 상징되는 시설농사는 정부 차원에서 권장해 온 일종의 신기술이었다. 돈은 없고 꿈은 많은 젊은이들이 대거 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하지 못한 반쪽짜리 신기술이었고 게다가 모험사업이었다.

 

재래식 농법은 망한다 해도 인건비와 비료, 농약값 정도지만 신기술 농법은 시설비와 기름값을 고스란히 떠안아야만 한다. 국제유가 상승과 자유무역이 경쟁적으로 시설농사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망했고, 망한 사람들에게 대출을 해준 농협에서는 보증을 선 사람들의 재산을 찾아다니며 경매에 부쳤다.

 

세상이 다 망한다 해도 농협과 그 임직원들은 망할 일이 없어 보였다. 망하는 농법을 권장한 정부 당국자들을 찾아내서 책임이라도 물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 나라에는 그런 법이 없다. 고창의 경우 군 농정 담당자들이 여기저기에 시범단지를 조성하면서까지 젊은이들을 적극 끌어들였다. 그 젊은이들 중 태반이 오늘날 수억 원대의 빚쟁이로 전락했지만, 담당자들은 새로운 영농기법을 널리 보급시켰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일찌감치 상도 받고 승진도 해서 떠나버리고 지금은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생각하면 그래라. 내 손으로 그놈의 시설농사를 해보기나 하고 망했으면 원이라도 없겠는디, 허헛 참 나. 지난날 후회해봐야 뭣 하겠소. 어쨌든 나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앞으로도 안 죽을 거요."

 

담배를 뻑뻑 빨아대며 중얼거리는 아들을 그 어머니가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들의 말을 알아듣고 이해해서는 아니다. 89세. 석 달만 있으면 아흔이 된다고 가끔 헛헛하게 웃으시는 어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늙으신 어머니에게 아들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아까울 따름이다.

 

 

"아니할 말로 저놈이 그때 못된 맘이라도 먹어 부렀으면 어쨌을 것이오. 원통하고 절통해서, 눈도 못 감제, 그러엄."

 

절망에 빠진 아들이 혹 자살이라도 해버리면 어쩌나, 어머니는 아마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아들도 필경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었겠지만, 어머니가 눈에 밟혀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들 모자간의 눈빛을 보는 사람은 역력히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의 요즘 걱정은 어머니의 술이 엄청나게 늘어버렸다는 점이다. 아들이 하루가 다르게 망해가는 모습을 보는 어머니의 가슴이 온전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루 평균 이홉들이 소주 두 병을 마셔야지만 그나마 숨이 쉬어진다는 어머니의 요즘 걱정은 "똥 안 싸고 자는 듯이 죽어야 할 텐디 어쩔랑가 모르겠다"하는 바로 그것이다.

 

"내가 만일에 똥이나 싸서 여기저기 뭉개놓으면, 아 저것들이 어찌케 살 것이요."

 

아들 며느리가 모두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온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어머니가 제 앞가림도 못 한다면, 아들 며느리 모두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 아니겠느냐 하는 그런 말씀일 것이다.

 

"효자도 효자도, 저런 효자 없어라. 며느리만 해도 그러제. 아 어디서 저런 놈이 내 며느리로 왔는지, 생각하믄 그만, 짠해서 눈물만 나고 그러요."

 

어머니의 아들 자랑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아마 어머니가 하루에 소주를 두 병 이상이나 드실 경우 어떻게 해서든 줄이거나 끊는 방법에 대해 골몰할 것이다. 그러나 이 댁의 아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머니가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사실 것이냐. 드시고 싶은 것 있으면 생명에 직접적으로 영향이 없는 한 무엇이든 드리고 싶다 하는 입장이다. 술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이 없고 보면 일단은 원하시는 대로 한다는 것이다.

 

 

부창부수라 했던가. 그의 아내 또한 마찬가지. 시어머니가 술을 청하면 그녀는 "예, 알았어요" 소리도 경쾌하게 부엌으로 들어가서 간단한 안주거리를 챙긴다. 그 어떤 거리낌도 없이, 머릿속에 한 점 계산도 없이 오직 마음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녀의 그런 언행은 때로 숭고하기조차 하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차마 그녀의 얼굴을 사진에 담기는커녕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 한 번 못하고 말았다. 몇 달 전에 광주에서 어떤 여성이 블로그에 자신의 얼굴을 올렸는데 술집에서 전혀 모르는 남자가 아는 체를 하며 다가와서는 술을 권하고 노래를 청하는 등 주정을 하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들었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뭐랄까, 그녀는 어쩐지 아무나 함부로 들여다보며 이러니저러니 인물평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감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전에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그들은 밖에서도 집에서처럼 그렇게 행복할까. 아니 그보다도 그는 정말로 술 배달이 농사보다 훨씬 좋아서 날마다 신명이 나게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살이 쪘다고 좋아하는 마음은 거짓이 없는 진심으로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 살이 무슨 살인지 불현 궁금해진 것이었다. 그래서 굳이 그의 직장까지 찾아가 보았다.

 

내 예감이 맞았다고나 할까. 집에서 기세 좋게 말할 때와는 달리 그는 별로 그리 신명나 보이지 않았다. 신명은커녕  몸에도 맞지 않는 남의 옷을 급하게 빌려입고 팔려나온 노예를 연상케 한다. 그랬다. 뭔가 풀이 죽은 채로 쪼그려 앉아 있는 그에게서 나는 순간적이나마 우시장에 팔려나온 한 마리 소를 보고 있었다.

 

 

그 풀기 없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 번 더 못된 심리로 물어보았다. 이제 농사는 아주 포기한 거냐고, 다시는 안 할 거냐고, 미심쩍은 어조로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아이고 무슨 말씀을, 시방도 농사를 하기는 해요" 그런다.

 

"쉬는 날에는 밭에도 나가고 논에도 나가고, 농사해요."

 

처음 듣는 말이다. 나는 역시 건성이었던가 보다. 가끔 드나들면서도 그가 아직 농사일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하긴 그가 노는 날 그것도 대낮에 가본 적은 없었기도 했다. 굳이 내 땅이 아니라도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게 농사이기도 하다. 어쨌든 나로서는 말문이 막혔다.

 

쉬는 날이 농사짓는 날이라는 그의 말이 나로 하여금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게 하고 있었다. 쉬는 날이 일하는 날이라는 그 말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관심이 있다면 그저 지켜보기나 해라. 그는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농사란 그런 것이라는, 도대체 무슨 계산을 해본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지 않느냐 하는 그런 이야기를.


#농촌의오늘#절망과희망#행복한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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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것이 일이고 공부인, 공부가 일이고 사는 것이 되는,이 황홀한 경지는 누가 내게 선물하는 정원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우주의 일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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