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선 도로에 만들어진 신호등
도담삼봉과 석문을 보고 우리는 단양읍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단양읍은 충주호로 인해 구단양이 수몰되면서 이곳 도전리를 중심으로 새로 생겨났다. 단양읍내를 지나 남한강에 놓여있는 상진대교를 건너지 않고 우회전해 강을 따라간다. 이 길은 적성면 애곡리로 이어진다. 애곡리(艾谷里)에서 애는 쑥애자이고 골은 골곡자이다. 그러므로 에곡리의 옛이름은 쑥골이다. 애곡은 또 애실로 불리기도 했다.
이곳 애곡리 수양개 일대가 1983년 수몰되기 시작했고,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에 의해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수양개가 유명해졌다. 이곳에서 4만 년전 후기 구석기 문화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곳 수양개를 가려면 터널을 두 개 지나야 한다. 그것이 상진터널과 애곡터널이다. 그런데 이 두 터널이 일차선으로 되어있다. 그러므로 터널 안에서는 일방통행만이 가능하다. 그 때문에 신호등을 만들어 교대로 통행을 시키고 있다. 전국적으로 1차선 도로에 신호등이 설치된 예는 이곳밖에 없다고 한다.
터널을 지나 강변도로를 가다 보니 오른쪽으로 하얀 현대식 건물이 나타난다. 이곳이 애곡리 산 24-19번지에 있는 수양개 선사유물전시관이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가을날의 비는 농사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데 그동안 하도 가물어 이번 비가 밭작물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차를 주차장에 세우고 전시관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이 별로 없다. 박물관은 훌륭하게 만들어놓았지만 찾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 박물관이 겪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유물은 발굴된 장소에 그대로 있거나 전시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사람이 찾지 않는 유물은 별 의미가 없다. 이 두 가지 딜렘마를 극복할 묘수가 없다. 제자리에 전시관을 만들면 접근성이 떨어지고, 시내에 전시관을 만들면 그 의미가 퇴색하고. 수양개 선사유물전시관도 외딴 강변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외롭게 서 있다.
단양의 구석기 유적들
전시관에 들어서면 로비에 매머드와 코뿔소 화석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동물이 구석기 시대 살았음을 보여주려고 상징적으로 세워 놓았다. 이들을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실내 전시실로 이동하게 된다. 전시실은 크게 4개로 되어 있다. 세 개의 전시실은 수양개를 중심으로 한 구석기 유물이 전시되어 있고, 하나의 기획전시실에는 그때그때 다른 주제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현재 기획전시실에는 단양의 문화유산을 찍은 옛 사진들이 전시되고 있다.
1층 첫 번째 전시실에는 단양의 구석기 유적이 지도와 사진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굴 유적, 상시바위그늘 유적, 구낭굴 유적, 수양개 유적이다. 단양읍 도담리 금굴 유적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그 역사가 70만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3-85년 연세대학교 손보기 교수팀에 의해 발굴되었다. 총 7개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전기구석기(60-70만 년 전)부터 청동기까지의 유물이 나왔다. 가장 오래된 것이 제1문화층에서 나온 전기구석기 시대 주먹도끼와 짐승화석이고, 가장 최근의 것이 제7문화층에서 나온 청동기시대 민무늬토기와 간석기이다.
가곡면 여천리 구낭굴 유적은 삼태산 남쪽 중턱 석회암 동굴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다. 구낭굴 유적은 파괴되지 않고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어 구석기시대 동굴 생활문화를 밝히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1986년, 1988년, 1998년 세 차례 발굴 조사한 결과, 9개 토층에서 세 개의 문화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중 3층이 구낭굴의 중심이 되는 생활문화층으로 밝혀졌다. 이곳에서 사람의 뼈와 석기, 뼈 연모 등이 나왔고, 호랑이, 코뿔소, 곰, 사슴 등 24종의 동물화석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슴베찌르개, 주먹도끼, 긁개, 밀개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한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마을은 1983년부터 2001년까지 충북대학교 박물관팀(이융조 교수)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발굴조사 결과 이곳에서는 중기와 후기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었고 대규모 취락터가 발견되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1997년 수양개 선사유적을 사적 398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수양개 선사유적은 3개 지구로 나누어 발굴되었다. 제1지구는 다섯 차례(1983-85년, 1996년), 제2지구는 세 차례(1996-98년), 제3지구는 한 차례(2001년) 발굴 조사되었다. 제1지구에서는 중기와 후기의 구석기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중기 구석기 문화층에서는 찍개, 찌르개, 주먹대패 등 몸돌 석기가 출토되었다.
수양개 유적을 대표하는 후기 구석기 문화층에서는 석기 제작소(50곳)와 수많은 석기가 발견되었다. 석기제작소에서는 모루돌, 망치돌, 몸돌, 조각돌이 함께 발견되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석기를 제작한 과정과 방법을 유추해낼 수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석기로는 슴베찌르개, 주먹도끼, 돌날과 좀돌날, 긁개, 밀개, 새기개 등이 있다.
슴베찌르개는 뾰족한 끝날이 있는 찌르개로, 반대쪽에 나무에 끈으로 고정시킬 수 있도록 슴베를 만들었다.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가장 많이 사용된 석기이다. 위쪽 끝이 뾰족하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원형으로 넓어지거나 둥글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연천 전곡리(전기 구석기), 공주 석장리(중기 구석기), 단양 수양개(후기 구석기)의 주먹도끼가 가장 유명하다.
긁개는 돌의 한쪽에 날을 만든 석기로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나무나 뼈를 깎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돌날이란 말 그대로 돌에 날을 세워 만든 도구이다. 돌날은 그 자체가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슴베찌르개, 밀개, 긁개, 새기개 등의 소재로도 사용된다. 밀개는 돌날의 한쪽 끝을 손질하여 만든 석기로 살을 저미고 뼈를 깎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같은 보통 사람들은 긁개와 밀개, 새기개 등의 모양과 용도를 잘 구별하기가 어렵다.
수양개 제2지구 유물은 조금 알겠네.구석기시대 유적 주변 제2지구에서는 초기 철기시대 집터가 발견되었다. 시대적으로는 원삼국시대에 해당한다. 집터의 생김새가 독특할 뿐만 아니라 출토된 유물도 다양해서 중원지역 철기시대 생활상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강변을 따라 약 5만평 정도에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 조사 결과 26기의 집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집터가 밀집되어 있으며 불에 탄 흔적도 보인다. 또 집의 기본구조를 이루는 기둥, 판자, 서까래, 갈대와 붉은 흙덩이 등이 잘 남아 있어 당시 집의 구조를 복원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진흙과 강돌을 이용해 만든 불 땐 자리도 확인이 된다. 또한 불탄 쌀, 보리, 밀, 조, 콩 등 곡식들도 출토되었다.
이곳에서는 원삼국시대의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토기와 시루, 화살촉, 창과 도끼, 장신구 등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들 유물 중 토기와 시루 등은 생활용품이고, 삼지창과 쇠화살촉은 전쟁용품으로 보인다. 옥장신구도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장신구에 해당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초기철기시대 사람들도 역시 먹고 사는 문제, 전쟁 등 자기방어 문제, 치장 등 꾸미는 문제에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전시관 밖에서 느끼는 감상: 역사는 흐른다.
전시관 밖으로 나오니 찌푸린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무로 만든 계단을 따라 언덕으로 올라가니 그곳에 구석기인들의 생활상과 사냥모습이 실제처럼 만들어져 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일터로 가는듯한 일가족이다. 부부와 두 아이 모두 네 식구이다. 이들 뒤로는 나무와 짚으로 만든 근사한 집이 보인다.
조금 더 가니 구석기인들이 일종의 창인 슴베찌르개를 만들기도 하고 사냥을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앉아서 돌을 깨고 연마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사슴을 한쪽으로 몰면서 창을 던진다. 이곳이 물가에 가까우니 이러한 사냥 외에도 물고기를 잡거나 패류를 채취하기도 했을 것이다. 소위 수렵어로가 삶의 한 방법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들 야외전시물을 구경하고 우리는 수양개 유적 발굴현장으로 간다. 적성면 하진리 쪽으로 난 길을 조금 가니 왼쪽 강변으로 안내판이 하나 보인다. 이곳의 위치는 적성면 애곡리 182-1번지이다. 애곡리 수양개 마을은 남한강변의 충적지대로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기에 적당했다고 한다. 앞을 내다보니 강이 넓고 깊다. 그러나 과거 충주댐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강 안쪽으로 더 넓은 농토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수렵어로뿐 아니라 농경생활에도 꽤나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흐르고 변하는 것인가 보다. 과거에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집단이나 마을을 이뤄 이곳에 살았는데 현재는 수몰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떠나고 우리 같은 뜨내기나 찾는 곳이 되었으니 말이다. 만일 선사유물 전시관이라도 없었다면 수양개 마을은 정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나마 전시관이라도 있어 사람들이 다시 찾고 또 그 옛날을 기억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