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노인회장과 신임 노인회장 그리고 이장을 포함한 마을 사람 거의 모두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사람이 있다 해서 그를 만나보러 가던 길이었다. 2년 전에 귀농을 했다는데 도시문화를 농촌에 접목시키고자 했던 것일까. 무슨 명예를 그렇게도 엄청나게 훼손당했기에 마을 사람 모두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던 길에 키질하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그만 그 옆으로 바싹 쪼그려 앉고 말았다.
원래의 목적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키질하는 여인과 좋게 한나절을 보내고 돌아왔다. 대낮에 무슨 도깨비에 홀렸던 것도 아니겠고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있을 수 있다는 것인지. 집으로 들어선 뒤에서야 정신이 살짝 돌아와서 내 마음을 그토록 사로잡았던 게 무엇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놀라워라, 열려라 참깨하면 열린다는 산속의 보물창고라도 열린 듯 별별 것들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온다.
엄마 몰래 키질 도전했다가 얻어맞다어머니가 울고 있다. 아니다. 어머니라기보다는 엄마라 함이 옳겠다. 내 나이 몇이었을까. 여덟? 아홉? 모르겠다. 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처럼 곡식이 익어버린 만추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온 나는 그만 엄마를 울리고 말았다.
들깨 아니면 참깨였을 것이다. 마당에서 키질을 하던 엄마가 다른 무슨 볼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우고 있던 참에 내가 들어왔다. 마당에 들어선 나는 마치 으레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처럼 책보를 내던지고 두 손으로 낑낑대며 키를 들고 까불다가 그만 달팍 엎어버리고 말았다. 한 곳에 엎었다면 그나마 쓸어 담기라도 수월했을 테지만, 엎어지는 것을 엎어지지 않게 하겠다고 기우뚱 좌우뚱 옆으로 갔다가 뒤로 물러섰다가 온갖 부산을 떠는 바람에 내용물은 그야말로 마당에 온통 뿌려지고 말았다.
그 직후에 내가 취한 행동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오매, 이것이 뭔 일이다냐"하는 엄마의 기절이라도 할 것 같은 목소리, 쪼그리고 앉아 쏟아진 깨를 쓸어 담는 뒷모습, 그러다가 포기하고 주저앉아서 "이 일을 어쩐다냐"하면서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엄마의 얼굴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휙휙 지나갈 뿐이다.
꽤나 말썽장이 아들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엄마에게 얻어맞았다는 기억은 전혀 없다. 아무튼 그때부터 나는 아마 키질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을 것이다. 저놈의 키질을 내가 반드시 극복하리라 하는 각오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도 해보겠다는,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덤볐다가 매번 낭패를 당하곤 했다.
키질은 젓가락질과 같은 것이어서, 신체의 특정 부위만을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 다른 부위는 일체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또한 그것은 도덕이나 양심과 같은 것이어서 하루아침에 익숙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 원리를 아직 몰랐던 내게 키질은 거의 불가사의한 기술이었다. 이게 뭐냐. 왜 나는 안 되는 거지? 도전의식이었을까 오기였을까. 하고 또 해도 엎어지기만 하는 키질에 대한 연구(?)로 나는 학교가 싫어지고 있었고, 밤이면 천장에서 그놈의 키질이 오락가락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너는 아직 키도 작고 팔도 짧아서 안 된다"는 엄마의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물동이 인 누나들의 모습 따라하다가 또 얻어맞다그런데 무슨 욕망의 발동이었던 것인지, 키질을 완전히 습득하기도 전에 나는 물동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다. 물이 가득 찰랑거리는 동이를 번쩍 들어서 머리에 이고 한들한들 걸어가는 아직 시집갈 때가 안 된 어린 고모며 그 또래 마을 누나들의 뒷모습이 어쩌면 그리도 고운지 마치 바람에 살랑거리는 원추리꽃 같았다. 엄마나 엄마 주변의 아줌마들은 물동이를 이는 게 직업인 것 같아서 그리 크게 아름답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집 안 간 고모나 마을 누나들의 그것은, 앞에서 봐도 예쁘고 뒤에서 봐도 예뻤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름다움에는 두 개의 포인트가 있었다. 하나는 머리가 고통받지 않도록 물동이 밑에 받히는 똬리가 실수로 빠져나와도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끈을 달아서 입술로 살짝 물고 있어야 하는데 그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상한 안타까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물동이를 들어서 머리에 일 때는 두 손으로 잡고 있지만 몇 걸음 걷는 순간 한 손을 놓고, 잠시 뒤에는 다른 한 손마저 놓아버린 채 두 손을 마치 노라도 젓듯이 앞뒤로 흔들며 가고 있을 때 느껴지는 숨이 막힐 것 같은 아슬아슬함이었다.
그 아슬아슬함을, 그 안타까움을 내가 해본다 해서 안 될 이유가 있을까. 세상에 안 될 이유가 뭐란 말이냐. 그래 해보자. 해보는 거다. 키질은 내가 아직 어리고 작아서 안 된다지만 물동이야 까짓 안 될 이유가 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딴에는 혼자서 연습을 한 뒤에 누나들 속으로 당당하게 진출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남몰래 연습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게 뭔가. 물도 없는 빈 동이를 머리에 이었을 뿐인데도 손을 놓는 순간 그대로 떨어지면서 퍽, 소리도 요란하게 박살나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키질을 하다가 엎었을 때와는 성질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 이상한 배신감으로 나는 꼼짝을 못한 채 그냥 서 있어야만 했다. 그때 어느 순간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아이고오, 내가 참말로 못 살겄네에."땅이 무너지고, 하늘이 내려앉는다 해도 아마 그런 절망적인 목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굵고 긴 한숨 속에 섞인 날카로운 비명과 짜디짠 눈물기 같은 것들이 나를 부들부들 떨게 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 아마 그런 심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나를 죽이는 대신 깨진 물동이 파편들을 들고 하나하나 맞춰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멘트나 철사 같은 것으로 땜질을 할 수 있는가 알아보는 것이었겠지만, 조각이 너무 많아서 재생은 이미 불가능해 보였다. 재생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엄마는 나를 향해 "저리 가" 한 마디 하고는 파편들을 후딱후딱 정리해서 대나무 숲에 내다 버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와서 그것을 발견하고 "저놈 때려죽인다"고 소리치기 전에 치워야 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며칠 뒤에, 나는 또 하나의 물동이를 깨트리고 말았다. 그 날은 아버지가 멀리 나가신 것도 아니고 바로 옆에 고구마 밭에서 뭔가를 하고 계셨던 까닭에 정통으로 발각되고 말았다. 당시의 산골 마을에서 물동이 같은 오지그릇은 필요하다고 아무 때나 가서 간고등어 사듯이 사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따라서 나는 이제 열 번을 맞아죽어도 싼 인간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나를 두들겨팬 이유는 그런 경제적인 이유보다도 "사내자식이 계집애 짓이나 하고 있다"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나는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렇다고 이미 간을 봐버린 내 안의 탐미주의가 꼬리를 내렸을까. 아니다. 나는 얻어맞는 과정을 통해 진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때, 고백하자면 여자가 되고 싶었다. 나는 왜 사내로 태어나서 저런 것도 못하는 것인가, 심히 억울하기도 했었다. 여하튼 여자에게는 남자에게 없는 뭔가 대단한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신비감과 부러움이 아마도 나로 하여금 여자를 좋아하게 했을 것이다.
뭔가 대단해 보이던 여자들, 여자가 되고 싶었다실제로도 나는 형들과의 놀이에서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시집 안 간 고모들이나 누나들 속에서는 시간이 가는 줄을 몰랐다. 형들의 이야기는 소재가 너무나 빈약하고 하는 짓도 요새 말로 하자면 엽기적이어서 끔찍한 면이 있었다. 누나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이야기가 둘, 셋으로 새끼를 쳐 나가는 까닭에 끝이 없었고 하는 짓도 "어매 징그러라"하는 식의 괴성으로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등 무엇인가 끌어안고 싶어지게 하는 귀여움과 도발적인 면이 있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형들은 조폭 똘마니의 이미지를 풍기는 반면 누나들은 약사여래나 문수보살 같은 그림에 닿아 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일찌감치 여성편력(?)의 길을 걷게 되었다. 봄이면 나물을 캐는 그림 같은 누나들 속으로 끼어들어 뱀이 나타나면 회초리로 휘, 휘, 쫓아내는 경호원 역할 하는 한편 내 자신 그림의 한 부분이 되었고, 여름이면 친구들과 돼지 먹이용 개구리를 잡다가도 콩밭이나 고구마밭을 메고 있는 누나들을 발견하면 쫓아가서 놀아 달라고 말도 안 되는 떼를 썼고, 가을이면 벼를 베어낸 논바닥에서 우렁이를 잡는 고모와 누나들 속으로 끼어들어 누구는 몇 마리나 잡았는데 누구는 아직도 겨우 세 마리라는 둥으로 심판관 노릇을 자임했으며, 겨울이면 등잔불 밑에 모여앉아 수를 놓고 뜨개질을 하는 여인네들 틈에 끼어 남몰래 코를 킁킁거리다가 자울자울 졸기도 하고 회가 동하면 온갖 분탕질을 치기도 했다.
향기, 드디어 이 단어가 출몰했다. 내 안의 탐미주의가 가장 강력하게 위력을 발휘한 것은 역시 이 향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엄마에게서는 맡아볼 수 없는, 성질이 전혀 다른 것 같은 향기가 시집 안 간 고모나 그 또래 누나들에게 있었다. 그 향기에 취해서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사르르 잠이 오면서 느닷없는 젖 생각이 나는 것이었다. 그러면 내 자신이 문득 창피하고 몸둘 바를 모르게 되어 누나들의 다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들추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내 안의 탐미주의이불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누워 있노라면 누나들의 발목이며 발가락들이 꼼지락거린다. 꼼지락거리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톡 건드려보기도 하고 입으로 콱 깨물어보기도 한다. 그러면 누나들은 죽는다고 웃어대며 여기서 저기서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나는 느닷없이 이불을 확 젖혀내고 벌떡 일어서며 "나 젖 줘. 젖 주란 말이야, 젖 줘"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그 돌연한 행동은 나로서도 도무지 설명이 불가한 그 무엇이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나마 나를 숨 막히게 하는 여인들의 향기를 쫓아내 버리는 것인데, 내가 그렇게 '지랄발광' 같은 짓을 하며 덤벼들면 누나들은 질겁을 해서 꽥꽥 소리를 지르다가 어느새 깔깔거리며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어깨를 안아주기도 하는 등 예비 엄마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드러내곤 하던 것이었다.
그런 누나들이, 그런 고모들이 하나 둘씩 시집을 가고 어느 날 문득 젖먹이 아이를 등에 업고 나타났을 때의 막막한 절망감은, 배신감은 이루 말로는 다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고맙게도 그녀들은 나를 실망시키는 선에서 끝내 버리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친정이라고 왔으면서도 그녀들은 대충 시간이나 때우며 놀다 가버리지 않고 콩밭이건 보리밭이건 밭에 나가서 일을 한다. 그것도 젖먹이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서 일손을 돕는다고 나선다. 이마에 맺힌 구슬땀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등에 업힌 아이가 칭얼거린다. 그러면 그녀가 무엇인가 동작을 취하는데, 바로 이것, 이 순간을 구경하는 새로운 재미에 나는 푹 빠져들고 있었다.
등에 업힌 아이가 어느새 그녀의 겨드랑이를 지나 젖무덤에 머리를 처박고 젖을 빨아대며 좋다고 힝힝거리는 것이다. 그것을 보는 내 안에서 "야아 저건 또 무슨 기술이지?" 의문부호가 가득 찍힌 탄성이 절로 나오는 것이다. 깜빡 잘못 생각하면 그녀가 아이의 목을 쑥 빼서 젖가슴에 대준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이의 하체는 아직도 그녀의 등에 붙어 있는데 상체는 그녀의 앞에서 헤헤거리고 있으니 이게 대체 무슨 마술인가 하는 의문이 아니들 수가 없는 것이다. 내 유,소년 시절의 누나들은, 고모들은 그렇게도 천재적인 기술자들이었다.
그게 벌써 언제 적 그림들이었던가. 너무나도 오래 전 일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내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를 규정하고 조종하는 에너지요 모든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져 있었던 그 훌륭한 그림들이 굳게 닫힌 문 저 안쪽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키질하는 여인을 발견하는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면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그 동기가 어째서 하필 키질하는 여인인 것인가? 그것은 나도 모른다. 알았다면 아마 이런 글을 쓰겠다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키질하는 여인에게서 들었던 한 마디가 생각난다.
"기계가 아무리 좋아도 편하기만 할 뿐 재미는 없어. 기계 살 때 들인 돈 뽑는다고, 일만 죽어라고 해야지. 재미있을 틈은 없어. 이렇게 손으로 하면, 콩알 하나하나, 잘 생긴 것도 있고 못 생긴 것도 있고, 똑똑하게 여문 것도 있고 여물다 만 것도 있고, 그것들 쳐다보는 재미만도 여간이 아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