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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빛 억새물결 출렁이는 신불산 억새고원
은빛 억새물결 출렁이는 신불산 억새고원 ⓒ 이승철

 

"억새밭이 아니라 은빛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구먼, 바다야!"

"아니야. 이런 풍경을 일컬어 선경이라 하는 거야, 신선들이 사는 선경!"

 

신불산 억새 평원에 오른 일행들이 감탄을 쏟아낸다. 그러나 은빛 물결이 일렁이는 억새꽃바다는 이미 배내봉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배내봉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걷다가 간월봉을 거쳐 간월재. 그리고 신불산과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억새고원지대는 그야말로 선경이었다.

 

영남 알프스 구간 중에서도 신불산 산행은 기대와 함께 몹시 염려스러운 산행이었다. 지난 10월 9일 밤늦게 무박 코스로 서울을 출발한 산악회원들은 새벽녘에 경남 언양의 배내고개에 도착했다. 그런데 배내고개가 가까워질 무렵 산행 인솔책임자가 일행들에게 겁을 주었기 때문이다.

 

등산 시작도 하기 전에 산행리더가 겁을 주다

 

이날의 인솔책임자는 간월재에서 시작하는 조금 짧은 코스로 변경하려고 했는데 회원 중 한 사람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물론 본래계획은 배내고개에서 시작하여 배내봉, 간월산, 신불산, 영축산을 거쳐 통도사로 내려가는 코스였다.

 

회원의 항의를 받은 인솔책임자는 본래 계획된 코스를 따라 가려면 산행시간이 10시간이 넘게 걸린다고 겁을 준 것이다. 그렇잖아도 근래 들어 무릎도 상태가 좋은 편이 아닌데다가 1천 미터가 넘는 고봉 산줄기를 따라 10시간 이상 걷기에는 아무래도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걱정이 된 것이다.

 

할 수 없었다. 중론에 따를 수밖에, 산악회원 대부분이 본래 계획했던 코스로 산행하자는 것이어서 이날의 산행리더도 어쩔 수 없게 된 것이다. 본래 계획했던 산행시점인 배내고개에서 내리자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은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했다. 새벽녘이어서 기온도 제법 썰렁했다.

 

 동트는 아침
동트는 아침 ⓒ 이승철

 밝아오는 배내봉
밝아오는 배내봉 ⓒ 이승철

 

배내고개에서 배내봉으로 오르는 길은 거의 대부분 철도 침목으로 만든 나무계단 길이었다. 다행이 경사가 급하지 않은 오르막 계단길은 어두운 밤에 걷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산행을 시작하자마자 선두그룹은 바람처럼 위쪽으로 사라져버린다.

 

그 뒤를 중간 그룹이 따르고 우리들은 다른 몇 사람과 함께 후미그룹을 형성하고 천천히 걸었다. 처음부터 무리하면 머나먼 통도사까지 걸어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체력을 안배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걸어 올라갔지만 곧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호흡이 가빠진다.

 

"자, 힘을 내자고, 저 위쪽 하늘이 보이기 시작하는구먼, 저 위가 배내봉일 거야."

 

일행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계속 산을 올랐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산 위쪽 하늘이 부옇게 밝아온다. 곧 첫 번째 봉우리에 올랐다. 해발 966미터 배내봉이었다.

 

마침 태양이 떠오르며 동쪽 하늘이 빨갛게 물든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이는 골짜기 풍경이 경이롭다. 골짜기 저 아래 흰 구름이 낮게 깔려 있고, 안개까지 흐르고 있는 모습이 신비경을 연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내봉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능선길이다. 능선길엔 길옆의 소나무와 잡목들과 함께 듬성듬성 자란 억새들이 하얀 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그런 능선길을 잠깐 걷자 다시 오르막길이다. 간월산으로 오르는 길이었다.

 

생면부지 여성등산객들과 호박군고구마를 나눠먹다

 

배내봉에서 간월산은 그리 멀지 않았다. 간월산 정상에는 우리들보다 먼저 출발한 한 떼의 등산객들이 해발 1083미터 정상 표지석 근처에서 쉬고 있었다. 우리들도 근처에서 잠간 쉬며 간식을 먹었다. 간식은 전날 밤 아내가 구워줘 내가 가지고 간 호박고구마였다.

 

 간월재 풍경
간월재 풍경 ⓒ 이승철

 신불산 정상에 쌓아놓은 작은 돌산
신불산 정상에 쌓아놓은 작은 돌산 ⓒ 이승철

 

"왜, 가시지 않고 그렇게 빤히 쳐다보세요? 혹시, 이 군고구마 좀 드릴까요?"

"네, 바로 그 군고구마 때문에요. 너무 맛있어 보여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네요."

 

옆으로 지나다가 멈칫거리는 등산객에게 일행이 묻자 낯선 여성등산객이 빙긋 웃으며 고구마가 먹고 싶단다. 간월산 정상에 먼저 올랐던 40대로 보이는 다른 산악회 등산객 아주머니였다.

 

"우와! 노란 군고구마 너무 맛있게 생겼다. 저희들도 한 개씩 주시면 안 될까요?"

 

마침 군고구마가 여유가 있어 한 개 집어 주자 뒤따르던 다른 아주머니 두 사람도 손을 내민다. 우리 일행 한 사람당 두 개씩 나눠먹으려고 가지고 간 군고구마는 그렇게 다른 아주머니들에게 나눠주고 우리 일행들은 한 개씩만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멀리 안산에서 우리들처럼 전날 밤에 출발한 등산객들이었다.

 

간월산에서 간식을 먹은 다음 다시 길을 나섰다. 이번에는 내리막길이었다. 내리막길에서는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두 명의 등산객과 마주쳤다. 그들은 전날 밤 간월재 휴게소에서 야영하고 올라오는 길이라고 한다. 그들을 지나쳐 은빛으로 반짝이는 억새들 사이로 조금 더 내려가자 저 아래로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간월재 휴게소였다. 간월재 휴게소는 정말 환상적인 풍경이었다. 양쪽에 간월산과 신불산이 불쑥 솟아 있는 사이에 난 고갯길은 제법 넓은 평원이 온통 은빛 억새꽃들로 뒤덮여 있었다. 억새밭 뒤쪽은 짙푸른 소나무 숲이 더욱 멋진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신불산 바위지대
아슬아슬해 보이는 신불산 바위지대 ⓒ 이승철

 신불산 억새평원의 단조늪(붉은색 점선)
신불산 억새평원의 단조늪(붉은색 점선) ⓒ 이승철

 

간월재 휴게소엔 산장과 화장실, 전망대 시설도 갖춰져 있고, 야영장도 있어서 등산객들이 쉬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높다란 산과 산 사이에 있는 바람의 통로여서 거센 바람 때문에 야영은 결코 쉽지 않아 보이는 곳이었다.

 

간월재에서 신불산으로 오르는 길은 역시 나무 계단길이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길  옆으로 하늘거리는 억새꽃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눈과 마음을 여유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천천히 억새꽃을 즐기며 능선에 오르자 제법 넓고 길게 뻗어 있는 능선길이 시원하다.

 

신불산 정상은 그 능선의 끝부분에 있었다. 정상이랬자 뾰족하게 솟아 있는 봉우리가 아니고 길게 이어진 능선의 끝부분에서 약간 치켜 올라간 곳이어서 힘들지 않고 오를 수 있었다. 해발 1159미터인 신불산 정상에도 커다란 돌무더기와 작은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히야! 저 날카로운 바위산줄기와 그 아래 펼쳐진 작은 도시, 그리고 주변의 황금 벼논 좀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인지."

 

정상 아래쪽은 언양이었다. 언양은 주변이 온통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소도시였는데 도시 주변에 흩어져 있는 벼논들이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풍경이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더구나 언양쪽에서 신불산 정상으로 뻗어 올라온 칼바위 능선은 눈으로 보기에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고원의 억새물결에 취하고 산 아래 골짜기 풍경에 취하고

 

"저 억새평원 좀 보세요? 얼마나 장관인지. 이곳이 우리나라 최고의 억새군락지라는 곳이잖아요."

 

옆에서 경치를 둘러보던 다른 등산객이 우리들 사이로 끼어든다. 경이로운 경치를 혼자 감상하고 감탄하기에는 너무 벅찬 감흥을 감당할 수 없었던가 보았다. 정말 대단한 풍경이었다.

 

 영축산 정상
영축산 정상 ⓒ 이승철

 영축산에서 바라본 신불산
영축산에서 바라본 신불산 ⓒ 이승철

 

신불산 정상에서 완만한 내리막으로 내려가다가 영축산까지 이어진 드넓은 억새고원은 눈이 시리도록 너무나 황홀한 풍경이었다. 그 황홀한 억새평원을 통과하는 등산객들은 저마다의 감흥에 젖어 힘든 줄도 모르고 억새꽃에 취해 걷고 있었다.

 

"어, 그런데 저 둥그렇게 노란색으로 물든 곳은 왜 색깔이 다를까?"

 

억새평원을 내려가자 조금 아래쪽으로 정말 둥그렇게 색깔이 다른 지역이 내려다  보인다. 그 둥그런 곳은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꽃과는 전혀 다른 짙은 노란색이었다.

 

"저 곳이 바로 신불산 고원의 '단조늪'이네요."

"아니 이 높은 지역에 늪지대가 있단 말예요?"

 

그런데 진짜였다. 다른 등산객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는 '단조늪'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었다. 생태계 보전을 위해 훼손되지 않도록 보호하자는 내용이었다.

 

아름답게 은빛으로 물결치는 신불산 고원 억새평원을 건너자 곧 영축산이 나타났다. 영축산은 영취산 또는 취서산이라고도 하는데 고원의 끝에 불쑥 솟아오른 바위봉우리였다. 해발 1081미터, 정상에는 바위봉우리처럼 웅장한 정상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극락암 암자 앞에 있는 작은 연못
극락암 암자 앞에 있는 작은 연못 ⓒ 이승철

 극락암 뒤로 바라보이는 영축산
극락암 뒤로 바라보이는 영축산 ⓒ 이승철

 

영축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도 일품이었다. 저 멀리 신불산 정상과 능선 위로 떠오른 뭉게구름이 가을 정취를 한껏 불러온다. 산 아래쪽은 양산이었다. 양산도 언양처럼 작은 소도시였다. 역시 주변에 다락논들이 흩어져 있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어느 길로 내려가지요? 통도사로 곧장 내려가는 길도 있고, 바위봉우리들을 몇 개 더 거쳐 백운암으로 돌아 내려가는 길도 있는데..."

 

"당연히 저 바위봉우리들을 거쳐 내려가야지요. 지금까지는 높긴 하지만 평탄한 고원지대와 억새밭길만 걸었으니 저기 보이는 바위봉우리들을 거쳐 내려가면서 아기자기한 등산 맛을 즐기는 것이 좋잖아요?"

 

선두 그룹을 이끌고 앞서가던 이날의 산행리더가 우리들 후미그룹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시간도 넉넉하게 여유가 있었다. 우리 일행들은 다시 백운암을 향해 바위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그러나 바위봉우리들도 멀리서 바라보던 것처럼 위험하거나 아주 힘든 길은 아니었다.

 

1천 미터가 넘는 3개의 산과 머나먼 길을 걸어 목적지에 안착하다

 

산 중턱에 있는 백운암은 스피커에서 울려 퍼지는 염불소리가 골짜기를 울릴 뿐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급경사길을 조심조심 내려가 극락암에 아르니 암자 앞에 있는 작은 연못엔 이미 꽃이 져버린 연잎들만 푸르다. 연못을 가로질러 아치형으로 걸린 다리가 눈길을 붙잡는다. 뒤돌아보니 극락암 뒤로 바라보이는 영축산이 바위병풍을 두른 듯 웅장했다.

 

 트랙터로 벼수확하는 농부들
트랙터로 벼수확하는 농부들 ⓒ 이승철

 

산행시간은 배내고개에서 출발한 지 여섯 시간이 지나있었다. 산행리더가 공연스레 겁을 줬던 것일까? 해발 1천 미터가 넘는 세 개의 산을 넘어 머나먼 거리를 걸었지만 염려했던 다리도 괜찮았고, 그리 지치지 않은 것은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물결 선경을 걸었기 때문일 것이다.

 

주차장 근처 다랑이 논에서는 트랙터를 끌고 벼 수확을 하는 농부들의 손길이 바쁜 모습이었다. 트랙터가 논배미를 빙빙 돌아가며 트랙터 위에 있는 알곡 자루를 채우는 모습이 그래도 가을다운 풍성한 모습이다. 그래도 농부들은 쌀값이 너무 떨어졌다며 씁쓸한 표정이었다.


#신불산 #억새물결#이승철#고원지대#단조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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