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향기 그윽한 백담사
봄 불보다 깊으니라. 가을 산보다 높으니라.달보다 빛나리라. 돌보다 굳으리라.사랑을 묻는 이 있거든 이대로만 말하리.- 만해 한용운, '사랑'가을이 오면, 설악산 백담계곡의 단풍나무 숲길이 그립다. 그곳에는 오색찬란한 단풍과 기암괴석, 수정처럼 맑은 수백 개의 소(沼), 그리고 자연이 그려낸 아름다운 수채화가 담(潭) 속에 드리워진 채 너울너울 춤을 추며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단풍이 어디 백담계곡 뿐이겠는가? 천개의 기암괴석 부처를 닮은 천불동 계곡, 설악산의 등뼈 공룡능선, 오색 눈부신 주전골과 하늘 선녀들이 목욕을 한다는 12선녀탕…. 설악산은 그 어느 곳을 가나 단풍의 비경이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러나 그 어떤 곳보다도 백담계곡의 단풍나무 숲길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직도 가슴 뜨거운 시인의 숨결이 그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라고 노래한 만해 한용운.
그렇다!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세상의 온갖 그리운 것들이 다 님이 되어 아픈 가슴에 찬란하게 맺혀 오는 계절, 그래서 나는 10월이 오면 그리운 님들을 만나러 백담계곡으로 가야만 한다.
10월 11일 일요일 낮 12시, 용대리에 도착하니 만원사례다. 공영주차장은 물론 골목골목마다 자동차들이 빼곡히 들어 서 있다. 흠, 서울에 있는 자동차가 다 이리로 왔나? 교통이 마비된 용대리 길에서 넋을 잃고 있는데 어느 노인이 다가온다.
주차를 하려면 자기를 따라오라는 것. 자동차를 겨우 옆으로 빼서 그를 따라 갔다. 골목을 끼어 노인을 따라가니 옥수수 밭이 나온다. 옥수수 밭에 겨우 주차를 하고 한숨을 돌린다. 황태국으로 점심을 먹고 난 후 백담사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러 갔다.
셔틀버스를 타는 길이 길게 늘어 서 있다. 많이도 변했다. 전에는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8km의 흙길을 전에는 늘 걸어서 다녔다. 지금은 도로에 시멘트가 깔리고, 셔틀버스가 다닌 뒤부터는 초입의 걷는 운치는 사라지고 말았다.
하산하는 등산객과 숨바꼭질을 하며 버스는 계곡을 더듬듯 기어간다. 드디어 확 트인 계곡에 고래 등 같은 백담사의 기와지붕이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엔 징검다리를 건너가거나 나무로 된 다리를 건너갔는데 '수심교(修心橋)'라 거대한 다리가 계곡을 가로 막고 있다.
"나는 나룻배/당신은 行人/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엷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경내의 만해 기념관 앞뜰에는 '나룻배 行人'이라는 시비가 행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시인은 흙발로 물살이 급한 이 여울을 건너갔으리라.
대청봉에서부터 백 개의 소(沼)가 있는 자리에 세워진 유서 깊은 백담사! 시인의 향기가 그윽한 백담사는 언제부터인가 수심교가 괴물처럼 여울을 가로 지르고, 빼꼭히 들어찬 사찰건물로 들어차 있어 이제 시인의 노래처럼 나룻배 행인의 운치와 한적한 절집 분위기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수심교에는 버스를 타려는 등산객들의 줄이 꼬리를 물고 저 멀리 백담사까지 늘어 서 있다. 버스를 타는 데 2~3시간을 저렇게 서서 기다려야 한다니 기가 막힌다. 좋게 보면 형형색색으로 옷을 입은 등산객들의 움직임이 단풍처럼 보이기도 하다.
대웅전에 들어가 삼배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온다. 계곡에는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돌탑들이 여기 저기 똬리를 틀고 서 있다. 저마다 무슨 소원을 담고 있을까? 돌탑이 세워진 계곡에서 설악산을 바라보니 역시 아름답다. 산은 산! 물은 물! 계곡은 계곡! 단풍은 단풍! 이것이 설악의 아름다움이다.
백담사를 나와 수심교를 건너 수렴동계곡을 오른다. 하산을 하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길. 저마다 스틱을 들고 황급히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군대의 행렬 같기도 하고, 두 개의 스틱을 들거나 배낭에 꽂은 모습은 검객들의 모습을 연상케도 한다. 좁은 길에서는 자칫 잘 못하면, 발에 걸리거나 스틱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님의 침묵은 사라지고 등산객의 발자국 소리와 먼지만 가득한 길. 시인은 백담사와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이 숲길을 오가며 도(道)를 깨쳤다고 하는데. 등산객의 흙먼지와 발자국 소리가 어지러운 숲길은 저자거리와 흡사하다.
시인은 이 숲 길을 걸으며 나라와 겨레에 대한 '그리움'으로 노래했다. 그것이 바로 '님의 침묵'에 실린 88편의 작품이다. 등산객들의 군무 속에서 시인의 소리를 듣는다. 단풍나무숲을 향하여 그리움을 안고 떠난 시인의 '그리움'이 아직도 뜨겁게 느껴진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띠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갔습니다."
시인이 걸어간 길에는 눈이 시리도록 붉은 단풍나무가 계곡을 장식하고 있다.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는 단풍의 맹세는 가을 찬바람에 차디찬 티끌이 되어 시인의 한 숨을 싣고 어디로 날아 갔을까?
아아, 저 색깔! 정말 해도 너무 하군요! 함께 동행을 일행들은 단풍나무의 고운 빛깔에 취해 탄성을 연발한다. 아기 손바닥처럼 갈라지는 단풍나무 잎새 모두를 책갈피에 끼워두고 싶단다. 유독 단풍나무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은 동행자들에게 나는 단풍나무 숲 해설을 시작한다.
단풍나무는 당단풍, 좁은 잎단풍, 고로쇠나무, 신나무, 복자기나무, 산겨릅나무, 설탕단풍 등 그 종류만도 무려 30여 종에 이른다. 그러나 설악산에 자라는 단풍나무는 거의가 당단풍나무이다.
단풍나무는 대부분 잎의 모양을 보고 구분하는데, 당단풍나무는 잎이 아홉 개에서 열한갈래로 갈라지고,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색깔이 다른 단풍나무에 비해 유난히 곱다. 설악산의 단풍이 유난히 곱게 보이는 이유도 당단풍나무가 많기 때문이다.
단풍나무는 왜 붉게 물드는 것일까? 이는 날씨가 차가워지면 잎의 생활력이 쇠약해져 빨강 색소인 화청소가 새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단풍나무 꽃을 보았다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것은 단풍나무 꽃이 너무 작아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꽃이 지고 난 자리에는 긴 타원형의 날개를 가진 2개의 열매가 수평으로 마주하며 달린다. 날개를 가진 열매는 떨어질 때 마치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회전하며 땅에 떨어져 씨앗을 번식시키며 생존한다. 기가 막힌 나무의 생존 방법이다!
단풍나무 이야기로 열변을 토하다 보니 어느새 영시암이다. 영시암 약수터에서 목을 축이고 다시 길을 걷는다. 곧바로 오세암와 봉정암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오세암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니 매우 한적하다. 물소리, 바람소리, 다람쥐의 재롱. 바람에 단풍잎이 춤을 추며 떨어져 내린다.
비로소 조용한 가을 단풍을 감상할 수 있는 호젓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산은 산! 물은 물! 계곡은 계곡! 단풍은 단풍! 아아, 설악의 단풍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자손 만대에 이어지도록 지켜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