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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하얼빈 역의 보복>
▲ 표지 <하얼빈 역의 보복>
ⓒ 채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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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울린 여섯 발의 총격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고, 모리, 타나카, 카와카미가 각각 총상을 입었다. 권총을 쏜 젊은이는 안중근, 그가 사용한 무기는 '브라우닝 권총'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당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리한 통감부 자료를 통해 보면 대체로 두 가지 유형의 반응이 나타난다.

거리에서 만난 청년, 학생, 주막 사람들은 이토의 죽음은 보호정치를 강요한 죄의 대가라며 환호했다.

반면에 일진회나 대한협회 등의 친일적 모습을 드러냈던 조직에서는 이토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본의 이토 저택까지 가서 위문을 하거나, 이번 일이 미치광이가 저지른 짓에 불과하고 결코 대한국민 전체의 뜻이 아니었음을 강조했다. 더구나 나름대로 항일의 대열에 섰다고 전해지는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양기탁 등의 사원들을 불러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 조차도 동양의 불행이며 한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일이라 우려하는 입장을 발표했다.

일본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1909년이란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런 상반된 반응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다만 청년, 학생이나 주막거리 사람들은 환호했던 반면, 이름깨나 날린 단체와 종교에서 활동했던 명망가들은 우려와 탄식을 하고 있는 상황이 무얼 의미하는지는 곰곰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안중근 의사 의거로 불똥 맞은 러시아

안중근의 의거가 일어난 하얼빈은 중국 영토였지만 러시아의 조차지였다. 러시아 조차지에서 한국인에 의해 일본의 정치적 거물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으니 외교적으로도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한지 4년 만에 러시아 사법권의 효력이 미치는 지역에서 발생한 이 일로 러시아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자칫 잘못해서 일본과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고, 일본과의 관계 개선 및 동북아 일대에서의 세력 분할에 관한 약속이 결렬될 것을 우려했다.

따라서 러시아가 이토의 경호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자신들의 사법권이 미치는 곳에서 발생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의거가 일어났던 10월 26일 저녁 안중근, 우덕순, 조도순 등 체포된 한국인과 관련 서류 일체를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넘겨주었다. 사실상 러시아의 사법권을 포기한 것이다.

당시 연해주를 중심으로 살고 있던 한인 동포사회와 독립운동가들은 안중근 의사의 재판이 일본 법정으로 넘어가는 걸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안 의사가 일본 사법부로 넘어갈 경우 자행될지도 모를 잔혹한 고문 등으로 인한 고초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러시아의 신속한 대응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눈에 비친 안중근

러시아 이르쿠츠크 국립사범대학에서 한․러 관계사와 러시아 이주 한국인사 분야에서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박 보리스의 <하얼빈 역의 보복>은 러시아의 관점에서 연구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연구서다.

러시아 중앙국립기록보존소(러시아 국립 역사기록보존소, 러시아 연방국립기록보존소, 극동 국립역사기록보존소, 제국러시아 대외정책기록보존소)의 자료들과 러시아에서 발행된 중앙과 지방의 신문 잡지들에 게재된 기사들을 활용해서 연구한 <하얼빈 역의 보복>은 러시아인의 눈에 비친 안중근과 한국의 독립 투쟁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얼빈 역 의거 이후 러시아 곳곳에 남아 있는 자료 분석을 통해 안중근과 한국인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러시아인들의 인식이 어떤 모습인지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의 반응, 이토 히로부미 사살 사건의 예심 수행과 관계가 있는 러시아 측의 활동, 그리고 러시아 일본에 미친 영향 등을 분석했다.

일본에서는 테러리스트로 폄하되고 있지만, 남과 북에서 모두 독립 투쟁의 영웅으로, 진정한 우리 민족의 기백을 보여준 위인으로 평가를 받고 있는 안중근 의사 의거가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었다.

이 시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아닌 러시아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안중근 의사의 모습을 확인해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러시아 또한 하얼빈의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던 국가였고, 일본 정치인 이토가 러시아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었기 때문에 한국, 일본과 더불어 하얼빈 의거의 관련 국가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얼빈 역 의거 직후 러시아 관리들을 중심으로 안중근의 행위를 비난하는 분위기가 주도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냉정을 되찾게 되면서 좀더 냉정한 관점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하얼빈 역의 보복>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시선 변화를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박 보리스 지음/신운용, 이병조 옮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편/채륜/2009.7/15,000원



하얼빈 역의 보복 -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안중근의 총성

박 보리스 지음, 신운용.이병조 옮김, 채륜(2009)


#하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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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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