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18년은 고스란히 내 삶의 유·청소년기와 일치한다. 한마디로 가난과 구호에 익숙한 시절이었다. 그 18년은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사회적 인식의 근본을 만들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삭줍기, 쏘시개용 솔방울 따기, 폐품 모으기, 혼·분식 도시락 싸기, 반공 웅변·글짓기·포스터 그리기, 교련 시간의 열병분열 연습, 애국조회, 그 밖에도 상·하급생간의 구타. 심지어 우리 학교 구호는 '유신'이었으니 우리의 초·중·고의 생활은 일제시대 같기도 하고 군대생활 같기도 하고, 가난과 무지로 인해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도 1000불 소득과 100억 불 수출의 그 날 80년이 되면 모든 삶이 추억이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살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민주주의적 사고나 시스템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 없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일방주의 교육, 주입식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386들이 '저항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도 모른다. 1000불 소득과 100억 불 수출의 선진국이 눈앞에 보이던 79년 10월 26일 우리의 위대한 '지도자', '독재자' 박정희는 한 발의 총성에 그의 삶을 마감했다. 마치 2009년 코리안 시리즈에서 나지완의 9회 말 끝내기 홈런처럼 유신 통치는 그렇게 한방으로 끝났다.
그러나 궁정동의 10·26 총성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우발적 일도 더더욱 아니었다. 1000불 소득과 100억 불 수출을 달성한 박정희 정권은 그 경제 성장이 사람들의 의식도 발전시킨다는 사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지식인들이나 깨어있던 사람들은 유신체제에 온몸으로 저항하기도 했지만 내가 살던 포천 연천까지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가난과 무지 탓이라 생각한다. 그 중에도 가난이 인간을 얼마나 무지하게 하는지 지금에서야 절실히 느낀다.
박정희의 통치시스템은 더 이상 1000불 소득과 100억 불 수출과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일 수도 있다. 10·26을 계기로 박정희 체제는 전두환에 의해 연장되지만 이때는 노도와 같은 저항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일방주의 주입식 군사교육을 받은 386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저항 조직을 만들었다. 그들은 잘 조직되었고, 일사불란했고, 어떤 폭력도 두려워하지 않고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섰다. 결국 박정희 체제는 87년에 실질적인 막을 내리게 된다. 이제 더 이상 일방적인 주입식 교육이 먹혀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 많은 젊은이들은 도저히 386세대처럼 조직하고 싸울 수 없다. 촛불시위가 바로 이를 증명한다. 요즘 대학생들은 폭력을 모르고 조직도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자랐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의식 세계가 발전했다고 확신한다. 물론 요즘의 젊은이들도 자신들의 생존이 절박함에 처한다면 그들이 배운 방식대로 저항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날이 오지 않길 바란다. 아무튼 박정희 체제는 그가 이룩한 경제성장에 의해 무너지는 형국이 되었다.
지금 10·26 30주년을 맞이해서 온갖 평가가 난무한다. 위대한 경제 지도자에서부터 독재자에 이르기까지 제 입맛대로 떠들고 있다. 박정희를 논하는 입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라. 박정희보다 그 입술의 처지와 의식상태가 더 잘 보일 테니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다. 18년이나 나라를 좌지우지 했는데 어찌 잘한 일이 없겠는가? 또 어찌 못한 일이 없겠는가? 아직도 박정희 찬가를 부르고 있다면 그의 머리는 유아적일 수밖에 없고 아직도 박정희의 독재만을 증오하고 있다면 그의 마음은 병들어 있는 것이리라.
박정희는 꼭 한 세대 전에 우리에게 참 많은 유산을 물려주고 갔다. 소양댐, 경부고속도로, 아산방조제. 어디 그 뿐이랴. 고문 학살 음모 부패 등 온갖 독재의 찌꺼기들도 물려주고 갔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고 또 털어내면서 살아왔다. 박정희 칭송이 우익의 자랑도 아니고 박정희 증오가 좌익의 자랑도 아니다. 이제 박정희는 박정희일 뿐이다.
나는 유년시절의 박정희, 청년시절의 박정희. 그리고 오늘 내 장년시절의 박정희를 생각해 본다. 일제와 분단과 가난과 무지가 뒤범벅이 되어 있던 1960년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박정희는 분단 반쪽의 권력자가 되었다. 내 삶의 지대한 영향을 준 권력자였다. 그 때문에 386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치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너무나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있다. 그들에게는 박정희도 전두환도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은 최소한 민주화된 사회에서 자랐다. 군사문화도 아니고 가난하지도 않았고 이전 보다는 자유스럽게 자랐다. 물론 그들에게도 부족한 것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해두자.
우리의 아이들은 박정희를 일방적으로 칭송하는 세력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증오하는 세력도 거부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10·26 30주년을 맞이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독재의 경험과 피압박의 경험을 가진 세대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진정한 민주주의 시대가 올까? 전쟁을 겪은 세대가 사라지면 남북의 증오도 함께 사라질 수 있을까? 이 땅에서 깨어서 산다는 것. 참 힘든 일인 것 같다.
79년 10월 26일 나는 남산도서관에 있었다. 대학입시를 위해서 말이다.
지금은 그저 유난히 은행잎이 많이 떨어진 날로 기억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철우 기자는 전 국회의원입니다. 이글은 필자의 블로그에 같이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