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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열혈(熱血), 하마터면 델 뻔했다. 겨우 자기 앞가림이나 하고 사는 주제가 부끄러웠던 탓이다.

책 <내 인생의 첫 수업> 순수한 열정으로 삶을 일궈온 것은 그들 몫의 축복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축복은 그들로 인해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 '시민 대중'이다.
책 <내 인생의 첫 수업>순수한 열정으로 삶을 일궈온 것은 그들 몫의 축복이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축복은 그들로 인해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 '시민 대중'이다. ⓒ 두리미디어
안온(安穩)한 학창, 어버이를 기쁘게 하고 싶었던 얌전한 대학 새내기의 상식이 군홧발의 폭력에 뒤집어지던 그 날을 그는 끝내 잊지 않고 살고 있었다. 아마 회갑 나이 부근에 이르렀을 그가 여태 지니고 산, 붉고 뜨거운 피를 뿜어 올린 심장의 용솟음을 읽은 그날 밤을 필자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 그날 새벽이 되어서야 풀려나와 내 작은 자취방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 내가 한갓 군홧발에도 자근자근 짓밟힐 수 있는 나약하고 하찮은 존재라는 것이 너무 슬퍼서, 그 비참함에 울었다. 나라란 나를 지켜준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 첫 수업이었다. 정부도 군대도 경찰도 나를 짓밟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배운 거였다.'

이런 '배움'을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에 적용(適用)하였던가.

'... 나는 다짐하였다. 권력이 부당하게 국민을 짓밟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고. 그 새벽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 뒤로 오늘까지 사람이 온전하게 대우받는 세상을 향한 미완의 꿈은 오늘도 내가 살아가는 중요한 존재 이유이다.'(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 이학영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 刊) 목차
[1부] 희망을 말해주던 스승
그의 질긴 삶 _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 / 싸가지 없던 학생의 스승 _오창익(인권연대 사무국장) / '소도둑놈' 선생님의 혼 _정찬용(전 청와대 인사수석) / 교도소에서 배운 삶 _김제선(풀뿌리사람들 상임이사) / 어머니의 수업 치매 _고은광순(종교법인법제정추진시민연대 대표) / 동양고전과 정치학자 _배병삼(영산대 교수) / 내 이름의 자존감 _김금옥(여성단체연합 사무처장) / 데모도 못하는 대학 _송재봉(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 사무처장) / 영국인 스승 _서순탁(시립대 교수) / 친구의 충고 _권미혁(여성민우회 대표) / 나눔을 실천하는 책임 _김혜경(지구촌나눔운동 사무총장) / "남의 행복을 생각하라."_김영호(유한대 총장) / 유머를 잊지 말라 _나효우(아시안브릿지 운영위원장) / 학문의 즐거움 _조명래(단국대 교수)
[2부] 시대와 역사, 나
독일에서의 '5월 광주' _정범구(전 국회의원) / 중대장의 눈물 _이지문(전국민주공무원노동조합 정책연구원) / '보도지침사건'이라는 인생수업_김주언(시민사회신문 편집인) / 단칸방 아이들의 죽음 _이은애(함께일하는재단 사무국장) / '여자 공원'에서 '여성노동자'로 _최순영(민노당 최고위원) / '똥물세례' 노동자와의 만남 _남윤인순(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 / 군홧발 아래서 배운 민주주의 _이학영(YMCA전국연맹 정책기획실장) / 노조결성 2시간 만의 계엄령 _배옥병(학교급식전국네트워크 상임대표) / 피 흘리던 현실 _권영국(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인권현안대응팀장) / 촛불바다의 무대 _노정렬(개그맨)
[3부] 실천과 배움을 나누는 꿈
고난의 수업 _박원순(희망제작소 상임이사) / 학생들로부터 배운다 _정진화(전 전교조 위원장) / 꼬리치레도롱뇽과 막걸리 _박병상(인천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 농촌학교 지키기 _전성환(YMCA전국연맹 정책기획실장) / 부족함 속의 여유 _김혜애(녹색연합 녹색교육센터 소장) / 본전 뽑은 수업 _김언경(전 민주언론시민연합 협동사무처장) / 사회 변화의 목적 _오성규(환경정의 사무처장) / 아토피 아이들 _박진섭(생태지평연구소 부소장) / 백혈병에서 살아남기 _강주성(전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 IMF를 딛고 선 마음들 _위정희(경실련 기획실장) / 후회 없는 선택 _이화영(서울여성의전화 가정폭력상담센터 국장) / 희생은 안 된다 _이호(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소장)
[4부] 삶, 새로운 깨달음
아직도 갚지 못한 인생의 빚 _김성훈(환경정의 이사장) / 가난한 이웃으로 온 예수 _문창식(간디문화센터 대표) / 의약분업 논쟁의 광기 _이상윤(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기획국장) / 택시기사들과의 연대 _박세길(전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부원장) / '짜고 치던' 수업 _김성인(광주참여자치21 대표) / 농활서 먹은 꿀맛 감자 _이유정(민주사회를여는변호사모임 과거사위원장) / 하늘나라 어머니와 _정청래(전 국회의원) / 대안은 우리 안에 _조희연(성공회대 통합대학원 원장) / 산골서 찾은 한 수 _곽노현(방송통신대 교수) / "차라리 유학 가게나" _김남근(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장, 변호사) / 다방 디제이가 겪은 열병 _지금종(전 새진보연대 대변인) / 어쭙잖은 '위장취업' _오관영(함께하는시민행동 사무처장) / 산자락에 뿌린 청춘 _김성희(비정규노동센터 소장) / 사람들 속으로 _남효선(시인) / 낙선의 결과 _이장희(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수업은 계속된다 _최승국(녹색연합 사무처장) / 인생의 중간성적표 _이승희(경제개혁연대 사무국장)

시민사회를 위한 절대적인 헌신(獻身)으로 삶의 뜻을 삼는 이들을 이 책은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사회 디자이너'라고 정의했다. 박원순씨가 자신을 소셜 디자이너라고 칭한 것을 염두(念頭)에 둔 것이리라.

명칭이 어떤 것이든 간에 이들에게 우리는 빚을 지고 산다. 이 책은 그 빚의 구체적인 명세표인 셈이다. 시민운동과 시민운동가들에 대한 우리 사회 일부의 비뚤어진 시각과 험구(險口)에 대한 경쾌한 대답이라고나 할까.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삶의 모습은 들여다보니 또 새로운 경지(境地)였다. 서너 명도 아니고 53명이나 되는 그 빚쟁이들을 감당하기가 어찌 쉬운 일이었을까, 책을 들고 내내 속으로 '고맙소' '참 고맙소'를 연발(連發)해야만 했다.

처음 들어보는 스승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얘기는 그 때를 짐작할 수 있는 나이인 이 제자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독일어를 더 잘하게 된 이유가 가난 때문이었다니, 또 당신이 세상에 진 빚이 얼마나 큰 것인지 등을 토로(吐露)하는 낮은 목청에서 대한민국의 생명농업과 환경을 새롭게 디자인한 동력(動力)을 새삼 다시 읽었다.

'... 그 때 오종근 한문선생님이 오시더니 근처 당신의 댁에 가서 사모님께 쪽지를 전해달라고 하셨다. 눈물을 훔치며 달려간 나에게 사모님은 돈을 담은 누런 봉투를 주시며 얼른 서무과에 가서 의무금을 내라고 하셨다. 내 인생은 이렇게 빚을 지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돈을 못내 못 본 독일어 시험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험을 다 볼 수 있었다.'(아직도 갚지 못한 인생의 빚 - 환경정의 이사장 김성훈 교수)

자신의 병(病)을 터전으로 고달픈 모두를 돕는 역할을 해 낸 이 인사의 위무(慰撫)와 노고는 '동료' 환자들에게 참 큰 힘이 됐겠다.

'... 병은 내게 가장 강력한 첫 수업이었다. 이 병은 나를 질병의 '당사자'로 만들고 시민운동을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환자의 '관점과 입장'을 만들게 했다.'(백혈병에서 살아남기 - 강주성 전 건강세상네트워크 대표)

언젠가 나이 지긋한 택시 운전사가 라디오 뉴스를 들으며 "박원순이란 사람, 대통령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거 아니요?"하고 물었다. 이런 질문, 특히 택시에서의 이런 대화를 싫어하는 성격인데도 필자는 대뜸 "그 양반, 뜻 그릇은 큰데 욕심 그릇이 작아서 대통령쯤은 생각조차 안 할 거요"하고 답해줬다. 허망한 취객(醉客)이라고 여겼겠다. 그 '문제의' 박 변호사가 이 책에서 직접 대답했다.

'... 시민운동가가 된다는 것은 온갖 영역에서 팔방미인이 되지 않으며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돈도 벌어 와야 한다. 이런 이중고에서 해방되기가 어렵다. 월급은 없거나 작게 받는다. 그야말로 풍찬노숙의 길을 걷던 독립운동가나 다름이 없다.'(고난의 수업은 계속된다 -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을 반찬 삼고 한데서 잔다는 말이 '대통령 생각 하는지도 모르는' 명사(名士)에게 가당키나 한 표현인가? 박원순은 '뻥'이 센 사람인가? 뜻은 곱지만, 얼마나 배고프고 식구들 자손들 못살게 하는 것이 독립운동 아닌가. 참 못 믿을 쪼잔한 사람일세. 이런 생각이 어쩌면 일반 시민들에게는 가능할 것이다. 생각의 차이, 그 괴리(乖離)는 심각할 수 있다.

시민사회운동의 여러 모습을 꽤 오래 지켜봐온 고참 기자의 생각으로는 이런 '대중(大衆)'들의 생각에 운동가들 스스로의 탓도 없지 않다. 민초(民草) 풀뿌리 인구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동의와 사랑을 얻어내고, 그 토대에 굳건하게 선 것이 아닌 이상 지금의 '이름'이 사상누각(砂上樓閣)은 아닌지 저어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더 많이 자신의 상황을 알리는 노력도 부족하다는 느낌을 오래 가져왔다. 이 부분 변화는 여전히 없고. 이 책의 출간은 그들도 스스로 이런 '부족'을 보완하고자 하는 의욕이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가. 구차한 느낌 들 정도로 솔직한 고백이 마음을 흔들기도 했다.

내가 나서지 않아도 이 인사(人士)가 있어서 내심 안심이 된다는, 좀 비겁하고 엉큼한 생각을 가능하게 해주는 이들, 특히 전두환 정권의 언론보도지침을 폭로한 시민사회신문 김주언 편집인이나 '파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과 같은 언론 동네 '동업자'들의 얘기도 반가웠다. 어찌 그들뿐이랴?

그들 삶의 전환점(轉換點)이 된 귀한 수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축복이었겠다. 그 수업의 교훈(敎訓)을 내내 지니고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더 큰 축복이었겠다. 그러나 가장 큰 축복은 이 사회 디자이너들의 헌신으로 행복(幸福)을 누리는 필자를 비롯한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이 책 <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 刊)은 우리 사회의 시민운동가들이 그들의 언덕인 시민들에게 보낸 유쾌한 인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www.ingo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시민사회신문 논설주간 겸 한자교육원 예지서원 원장입니다.



내 인생의 첫 수업

박원순, 홍세화 지음, 두리미디어(2009)


#박원순#김성훈#홍세화#언론#택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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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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