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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대로 이해한다는 것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 창작과 비평사, 1993, 6쪽)라는 말이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에 관한 사람들의 대답은 제각각일 것이다. 그렇다고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배려, 올바른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상식에 맞게 행동하는 것 또한 아름다운 사랑을 가꾸어 가는 중요한 토대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으로 들어가면 그리 쉽게 답을 내릴 수 없다. 잘못된 사랑을 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에서 벗어난 이해를 하고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이 보인다. 조금만 돌려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는 것임에도 무심코 넘어가는 것도 많다. 일본이 우리 땅에서 물러간 지 60여 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우리는 식민주의사관의 마수에서 제대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도리어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상식을 벗어난 주장들이 기승을 부리는 실정이다. '뉴라이트'의 역사인식과 이 계열의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균형을 잃은 비판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에 대해서는 신주백, '교과서포럼의 역사인식 비판', <역사비평> 제76호, 역사비평사, 2006년 가을 참조. ; 궁궐의 파괴, 변형, 왜곡이라는 것도 거시적인 시각(담론)에서 이와 연관이 있기에 이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잘못된 사랑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일까?

궁궐을 답사하다 보면 상식대로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한 해 수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궁궐을 답사한다. 궁궐에 대한 인식 수준은 훨씬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궁궐에 관한 깊이 있는 연구서들의 출간, 혼신과 열정을 가지고 궁궐의 참된 가치를 알리고 있는 수많은 자원봉사 선생님들, 궁궐을 사랑하고 아끼며 내 집처럼 가꾸는 사람들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답사를 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에서 적지 않은 아쉬움을 가지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과거 아무 것도 모를 때의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오해, 무지, 편견이라는 두께는 그렇게 무서운 것임을 새삼 깨닫는다.

'궁'(宮)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곳은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궁궐'이라 할 때에는 국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면서 일상생활을 하고 정치를 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국왕은 삶의 대부분을 궁궐에서 보내며, 궁궐 밖으로 나가는 일은 매우 드물다. 서울에는 그런 궁궐이 다섯 개가 남아 있다.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창경궁(昌慶宮), 경희궁(慶熙宮), 경운궁(慶運宮, 덕수궁)이 그것이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이 다섯 궁궐을 찾는다. 그리고 엄청난 수난을 겪었다는 사실도 대체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 남아 있는 모습에 대해 좀 더 세심한 모습을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는 다소 인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우리 궁궐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상황에서 좀 더 세심하게 살펴 봐 달라 하는 주문이 무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금만 쉽게 생각하면 궁궐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것은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우리 역사교육의 문제로 역사의 여정을 함께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빠져 있음을 든다. 최근 들어 문화사, 생활사가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사람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사람을 만든다.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빠져 있으니 역사의 올바른 이해와 사랑이 쉽지 않은 것이다.

궁궐은 국왕이 일상생활도 하면서 정치도 하는 곳이다. 그러나 국왕도 가정을 이루고 가족이 있다. 그뿐인가? 국왕을 비롯한 이른바 왕실 가족들은 환관(宦官), 궁녀(宮女) 등 수많은 사람들의 시중을 받는다. 정치와 행정의 공간이기에 관원들도 수없이 들락거린다. 수백 명에서 수천 명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공간이다. 그들이 생활하고 일하는 데 필요한 온갖 시설들이 다 있었다. 그렇게 궁궐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갔고, 그들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수많은 자취를 남기고 갔다는 평범한 사실에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근정전, 경회루 등 위용을 자랑하는 건물뿐 아니라 무심코 지나치는 우물 하나에서도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궁궐의 짜임새를 새삼 살펴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교태전 영역에 있는 우물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교태전을 주로 보면서 이 우물은 무심히 지나친다. 비록 이 우물은 사소한 유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렸던 공간이 궁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이러한 우물 하나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보면 향기나는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우물 교태전 영역에 있는 우물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교태전을 주로 보면서 이 우물은 무심히 지나친다. 비록 이 우물은 사소한 유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렸던 공간이 궁궐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이러한 우물 하나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 보면 향기나는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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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 사람들의 삶의 공간  

궁궐을 짓는 데는 일정한 법식, 제도가 있다. 지존(至尊)이 사는 지엄(至嚴)한 궁궐을 아무렇게나 짓는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시간, 공간, 환경 등등에 따라 이러한 법식, 제도가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음 또한 상식이다. 경복궁을 자금성의 아류라고 보는 것을 무식하다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법식, 제도를 갖추되 우리들 나름의 여건, 생각, 기준 등에 따라 우리 궁궐은 만들어진 것이다.

한 궁궐의 공간을 안다는 것은 그 궁궐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기준으로 살펴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그에 따른 구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사람 자체에 기준을 두어 이야기할 것이다.

궁궐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국왕(國王)과 왕비(王妃)이다. 그러니 국왕과 왕비가 머무는 공간이 가장 중심의 위치에 있으며, 크고 화려할 것이다. 국왕과 왕비의 공간은 법전(法殿) 영역, 편전(便殿) 영역, 침전(寢殿) 영역으로 나뉜다. 법전 영역은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나 의례가 펼쳐진 곳이다. 법전과 조정(朝廷)의 사방을 행각이 둘러싸고 있다. 편전 영역은 국왕이 평상시에 집무하면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의하는 공간이다.

법전 영역과 편전 영역은 국왕이 정치하는 공간이다. 그렇기에 편액을 보면 가운데 '정'(政)이 들어간다. 경복궁의 근정전(勤政殿)과 사정전(思政殿), 창덕궁의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 등이 그러한 예이다. 물론 경운궁의 중화전(中和殿)처럼 예외도 있다.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이다. 백악을 든든한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근정전의 당당한 위용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가 그랬던가? 경복궁은 바로 저 자리에 앉아 있기에 경복궁이라고.
▲ 근정전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이다. 백악을 든든한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근정전의 당당한 위용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가 그랬던가? 경복궁은 바로 저 자리에 앉아 있기에 경복궁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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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침전 영역은 국왕과 왕비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물론 공적인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주로 일상생활이 이루어진다. 경복궁의 강녕전(康寧殿)과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창경궁의 통명전(通明殿)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침전에는 (대체로) 용마루를 두지 않는 특징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된다. "왕비가 공적 활동이 있었어?" 왜 없을까? 왕비만의 의례도 있을 것이다. 아울러 왕비는 내명부(內命婦)를 통솔한다. 궁궐 안 수백 명의 여인을 통솔하는 것이다. 왕비에게도 공적 활동이 있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궁중 여인들을 암투의 대상으로만 바라봐온 대부분의 사극들이 이상한 것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왕세자(王世子)와 왕세자빈(王世子嬪)의 공간도 중요하다. 이들이 머무는 공간을 흔히 동궁(東宮)이라 부르는데, 춘저(春邸), 춘궁(春宮)이라고도 한다. 왕세자가 다음 왕위를 잇는 떠오르는 해와 같은 존재임을 상징한다 하겠다.

아울러 국왕과 왕비에 대해 비중은 적지만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라는 무거운 상징을 지닌 대비(大妃, 왕대비, 대왕대비)가 머무는 공간 또한 중요했다. 흔히 대비전(大妃殿)이라 부르는 이곳은 대체로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 동조(東朝)라고도 한다. 이 밖에 후궁(後宮)들이 머무는 공간도 있는데, 주요한 공간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궁궐 안에는 국왕과 왕비가 머무른 주요 공간은 (원래부터 있었거나 복원되었거나 온전한 모습은 아니라 해도) 거의 대부분 남아 있다. 대비나 왕세자가 머무른 공간도 어느 정도 남아 있다. 그러나 후궁이라든지 왕실의 자녀들, 이들 왕실 가족을 받들거나 호위하는 환관, 궁녀, 군인 등이 머물렀던 공간은 남아 있지 않거나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렵다. 남아 있는 문헌자료나 궁궐도(宮闕圖)를 통해, 또는 이들이 맡은 일이 어땠는가를 살펴 생각해볼 따름이다. 그래도 경복궁에서는 대대적인 복원 정비 사업으로 강녕전 영역, 교태전 영역, 동궁 영역 등이 복원되었는데, 이들 영역에 부속된 행각들을 보면서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나름대로 떠올려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환관들의 공간이다. 우리는 환관들에 대한 선입견으로 이들도 엄연한 관원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 하지만 이들도 관원이었으며, 역시 출퇴근을 했다. 궁궐 안에서만 살았던 궁녀들의 삶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들이 맡은 일들은 궁궐을 잠시라도 비워둘 수 없는 일들이기에 근무 형식이 독특했는데, 장번(長番)과 출입번(出入番)으로 나뉜다. 장번은 비교적 오랜 기간 궁궐에 머물면서 근무하는 방식이고, 출입번은 하루나 며칠을 기한으로 교대하면서 출퇴근하여 근무하는 방식이다. 이들의 관서를 내반원(內班院) 또는 내시부(內侍府)라고 했으며, 환관들은 여기에 머물렀다.

정차와 행정의 공간, 궐내각사

궁궐은 정치와 행정의 본산, 중심지였다. 정치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대부분이 궁궐 안에서 일어났다. 따라서 (관원들이 업무를 보는) 각사(各司)의 비중 또한 매우 컸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궁궐을 답사할 때 매우 흥미로운 이 부분이 사실은 학창시절 국사 시간 때 가장 재미없고 따분하다고 여겨졌다는 게 아이러니한 사실이다. 의정부가 뭐했느니 승정원이 뭐했느니 하는 식으로 그저 외우는 대상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학창시절 규장각에 관해 공부할 때는 그렇게 따분할 수가 없던 것이 사극을 접하면서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 사실이 나는 그저 혼란스럽다. 우리의 역사교육이 지니는 문제도 아쉽지만 우리들의 공부하는 자세도 돌이켜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각사는 궁궐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에 따라 궐내각사(闕內各司)와 궐외각사(闕外各司)로 나눌 수 있다. 궐내각사는 국정의 원활한 운영을 위하여 궁궐 안에 마련된 관서로 승정원(承政院), 내의원(內醫院), 홍문관(弘文館), 내반원 등 적지 않은 관서들이 들어섰다.

한편 궐외각사 가운데서 육조거리에 자리한 의정부(議政府), 육조(六曹), 사헌부(司憲府) 등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하지만 이에 소속된 관원들 또한 국왕과 함께 국정운영을 하기 위해 궁궐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지존이 궐 밖으로 나가 신하들을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신하들이 궁궐 안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궁궐 안에 들어와 회의를 하거나 머무르는 공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청(政廳), 대청(臺廳) 등이며, 이들이 궐내각사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궁궐 안에서 궐내각사의 자취를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 지금 궁궐 안에는 잔디밭이 굉장히 많다. 수백 수천 명이 한데 어울리는 공간이기에 그들에게 필요한 건물, 시설들이 엄청나게 많았을 터인데 그러면 그러한 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역시 우리는 잔디밭, 너른 공터, 쓸데없이 넓은 길 등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누군가의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불법적이고 부당한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의 정치상을 가려버리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가 뻗쳤던 것은 아닐까? 여러 정황이나 증거로 보아 일본이 저지른 일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궁궐 곳곳에 박힌 상처는 궁궐을 청량하고 호젓한 느낌을 주는 곳으로만 여길 수 없게 한다. 궁궐은 공원이나 쉼터가 아니기 때문이다.

창경궁의 선인문 안쪽으로 동물원이 넓게 들어섰으니 이 곳 또한 동물원이 있었던 자리일 것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궁궐 사람들의 삶을 위한 각종 건물, 시설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궁궐이 정치와 행정의 본산임을 의도적으로 지우기 위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두고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면서까지 유원지로 만들어버렸다.
▲ 동물원터 창경궁의 선인문 안쪽으로 동물원이 넓게 들어섰으니 이 곳 또한 동물원이 있었던 자리일 것이다. 이곳에서 수많은 궁궐 사람들의 삶을 위한 각종 건물, 시설들이 가득했을 것이다. 일본은 그들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궁궐이 정치와 행정의 본산임을 의도적으로 지우기 위해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두고 이름마저 창경원으로 바꾸면서까지 유원지로 만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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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향기 나는 공간, 궁궐 - 궁중의 화장실 문화 

궁궐은 정치와 행정의 공간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았던, 사람 향기가 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궁중의 화장실 문화는 그 좋은 사례이다.

우리 궁궐에서 화장실 문화를 맛보기란 쉽지 않다. 복원된 뒷간도 있고 매우틀도 보이기는 하지만 일부일 뿐. 그래서 우리 궁궐에 화장실이 없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과연 그럴까?

세계적인 도시 파리. 아름답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보내는 이 도시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러나 18세기, 19세기는 그러했다. 그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 정원의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하수구는 냄새로 진동했음은 물론 쥐나 각종 해충이 득실해 당시의 파리가 마치 지옥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참 이해가 안가고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러했다고 한다.

파리가 이 지경이라면 우리는 더하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견을 가지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사가에도 있는 측간이 지엄한 궁궐에 없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궁궐 그림이나 도형을 보면 뒷간을 쉽게 찾을 수 있으며, 그 수도 적지 않다.

다만 국왕과 왕비 등 궁궐 안 중요한 인물들은 매우틀을 썼다. 하기야 생각을 해보자. 국왕이 집무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내 잠시 뒷간에 다녀오리다." 이런 모습도 이상할 뿐더러 뒷간에 쭈그리고 앉아 볼일을 보는 국왕의 모습도 어찌 보면 참 모양새 안 나는 것이다. '매우'(梅雨는 소변, '매화'(梅花)는 대변을 뜻한다. 이것을 건강 체크를 위해 내의원으로 가져가기도 했다.

여기서 잠시 떠오르는 생각. 내의원에서 이 '매우', '매화'를 가지고 가 체크할 때 과연 입으로 맛을 보았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사람과 그 사람이 만드는 역사의 균형 있는 이해      

우리가 과거에 궁궐을 보러 간다 할 때에는 주로 거기에 남아 있는 일부의 건물들을 보러 간다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일제의 잔재를 고스란히 알고 있었을 때의 궁궐에 대한 우리의 오해, 무지는 매우 심각했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등의 이름보다는 국립중앙박물관, 비원(秘苑), 창경원(昌慶苑) 등의 이름이 우리에게 더 익숙해있었다. 애초에 궁궐이 지니는 역사적 무게,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자취와 향기를 느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었다.

이제 궁궐은 그러한 잔재를 하나씩 없애가면서 궁궐다운 모습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의 궁궐 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반성할 부분은 적지 않다. 사람과 그 사람이 만드는 역사의 균형 있는 이해, 그것이 우리 역사와 문화를 올바로 사랑하는 중요한 길이 아닐까 싶다. 궁궐은 우리에게 그런 무언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

♧ 참 고 문 헌 ♧

신주백, '교과서포럼의 역사인식 비판', <역사비평> 제76호, 역사비평사, 2006년 가을.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창작과 비평사, 1993, 쪽
야콥 블루메 지음, 박정미 옮김, <화장실의 역사>, 이룸, 2005.
이강근, <한국의 궁궐>, 대원사, 1991.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지음, <한국생활사박물관> 10, 사계절, 2004.
홍순민, '궁궐의 뒷간',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개정판), 청년사, 2005.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수개월 전 경복궁, 창덕궁을 비롯한 서울의 다섯 궁궐을 개별적으로 답사한 뒤 그 때의 느낌을 포함하여 나름대로 정리한 글입니다. 기존에 저의 블로그나 클럽에 올렸던 글들은 물론 여러 기본적인 문헌들을 다시 참고하여 새로 쓴 것입니다. 대중들이 우리 궁궐이 지닌 매력을 쉽게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지극히 간단한 몇몇 기본적인 문헌만을 활용하여 나름대로 쓴 글임을 양해바랍니다. 이번에 가졌던 답사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했기에 지난 2008년 10월 폰카로 찍었던 몇 개의 사진을 추려 올립니다. 양해 바랍니다.



태그:#궁궐, #상식,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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