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났다. 여느 선거처럼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 합리적 분석도 있고, 알찬 정리도 있다. 하지만 개중엔 기가 막힌 자화자찬도 있고, 어이없는 견강부회도 있다. 심지어 선의의 착각도 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인 이른바 '박근혜의 힘'에 대한 과신이다. 이번 재·보궐 선거를 통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힘이 다시 한 번 확인됐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착각이거나 무지다. 관점을 단순화시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여권의 패배는 누적된 실정에 의해 민심을 광범위하게 위반한 탓이다. 즉, 민심이반은 거역할 수 없는 추세였다. 헌데, 이런 흐름을 한 개인이 막아낼 수 있을까? 이것부터가 의문이다. 개인의 힘이 아무리 커도 큰 흐름 앞에서는 무력할 따름이다. 당랑거철이라,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 서 있는 사마귀의 꼴이다.
한 개인이 민심의 향배를 거스를 수는 없다
또 하나 묻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박 전 대표는 엄연히 여권의 일원, 한나라당 소속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 역시 여권의 실정과 잘못에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비록 친이 대 친박 대립이라는 프레임(frame)으로 일부 책임을 피해가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면책 사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차기 대권주자로서 누리는 부동의 1위 위상을 감안하면, 여권이나 당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막지 못한 책임을 당연히 나눠 져야 한다.
어떤 여론조사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 미디어법에 대한 국민들의 일관된 반대다. 미디어법이 논란이 됐을 때, 그 내용에 대한 찬성여론은 33.2%에 불과했다. 반대여론은 60.8%였다. 지난 7월의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조사에서 확인된 사실이다. 직권상정해서 표결처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78.9%가 부정적 의견을 밝혔다. 7월 22일 미디어법이 강행처리 된 뒤, 여론의 64.5%가 잘못된 일이라고 했다. KSOI의 7월 27일 조사다. 이 조사에선, 대리투표로 인해 표결 자체가 무효라는 주장에 대해 64.2%가 공감을 표시했다.
헌재 판결을 앞둔 10월 14일의 조사에서도 이런 여론구도는 바뀌지 않았다. 국회의 표결처리에 대해 70.9%가 문제 있었다고 대답했다. 문제 없었다는 의견은 고작 21.1%였다. 헌재가 무효취지의 결정을 해야 한다는 입장은 60.8%였다. 유효취지의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은 20.6%에 그쳤다. 이처럼 국민 여론의 거의 절대 다수가 반대하는 것이 미디어법이다.
그런데, 박 전대표는 어떤 태도를 취했나? 이 법의 통과를 용인했다. 그런 그에게 여권의 실정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미디어법 통과 이후 박 전대표에 대한 여론조사에서 실망한 여론이 적지 않았다. KSOI 7월 28일 조사에 의하면, 실망여론이 60.3%였다. 그 때문에 8월 25일 조사에서 박 전 대표의 차기 대권 주자 적합도가 6월에 비해 3.5% 포인트 떨어졌다. 따라서 박 전대표가 직접 유세에 나선다고 해서 미디어법 때문에 형성된 반여 정서를 무마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착각이거나 무지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선거운동 유세장에서 박 전 대표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을 것
물론 이렇게 가정해 볼 수는 있다. 박 전 대표가 선거운동을 지원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다. 예컨대, 세종시는 원안대로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 하고 다니는 것이다. 실제로 박 전대표의 원안 고수 발언에 대해 '문제없다'는 여론(58.0%)이 '신중치 못했다'는 것(22.3%)를 압도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박 전 대표가 이런 목소리를 현장에서 계속 내고 다녔다면 사정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정황상 박 전 대표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할 말이 없어서 선거운동 지원에 나서진 않은 측면도 없지 않다. 설사 가능성만 놓고 보더라도 충북의 선거에선 가능했겠으나, 수도권 선거에선 아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당위를 떠나 기왕에 가지고 있던 것을 내놓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대놓고 그렇게 말하는 것은 바보짓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를 통해 찬반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또 다른 쟁점이 4대강 문제다. KSOI가 6월 22일 실시한 조사에서 4대강 사업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는 여론은 30.0%였다. 반대로, 중단하거나 그 예산을 다른 것에 써야 한다는 여론은 66.7%였다. 10월 6일에는 조금 다르게 물어봤다. '적극 추진'이 22.5%, '충분한 공감대 형성 후 추진'이 47.1%, '중단'이 26.4%였다. 두 입장으로 나눠 보면, 지금처럼 밀어붙이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73.5%가 되는 셈이다. 4대강 사업을 막으려고 박 전대표가 정면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밝힌 적이 있던가? 없다. 그런 그가 유세 다니면서 국민여론에 호응해 4대강 사업 반대를 외칠 수 있다고 상상하기는 힘들다.
유세에 나선다면 박 전 대표가 입장을 밝혀야 할 이슈는 수 없이 많다.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66.3%인 용산참사에 대해, 82.3%의 국민이 별 도움을 못 느끼고 있는 이른바 친서민 정책에 대해,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것이므로 문제가 있다는 여론이 49.9%인 방송인 김제동의 프로그램 하차 등에 대해 소신을 밝혀야 한다. 박 전 대표가 과연 이런 이슈들에 대해 국민들의 입장을 속 시원하게 대변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요'다. 사실 이게 합리적인 판단이다.
10월 초에 실시한 KSOI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10.28 재·보선에 대한 입장에서 여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39.4%, 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46.8%였다. 10월 12일 R&R 조사에서 이명박 대통령 지지율이 54.3%로 나올 정도로 MB의 기세가 대단할 때다. 그런데도 견제론이 더 많이 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견제론은 20대에서 52.3%, 30대에서 66.5%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60세 이상의 23.6%에 거의 2~3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그만큼 견제론은 강했다.
이번 재·보선 투표율 추이를 보면, 이들이 대거 투표장에 나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4.29 재·보선 때부터 시작된 변화다. 이들 연령대는 주로 출근 전이나 퇴근 후에 투표한다. 특히 퇴근 후가 많다. 지난 4.29 인천 부평을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6시 이후 투표자가 전체 투표자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8%였다. 과거의 재·보궐 선거에 비해 높은 수치다.
변화의 동력이 되고 있는 20~30대의 투표
10.28 수원 장안 국회의원 재선거에서의 오후 6시 이후 투표자의 전체 대비 비중은 17%였다. 4.29와 같은 흐름인 것이다. 이들의 투표율이 올라갔기 때문에 4.29나 10.28이나 보기 드물게 투표율이 높아진 것이다. 설사 박 전 대표가 유세장에 얼굴 비친다고 해서 이들이 투표장에 나가는 결심을 접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주장은 가능하다. 박 전 대표가 등장했으면 보수표나 친여성향의 표가 결집했을 것이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가 등장함으로써 반대진영의 표 또한 결집할 것이다. 어느 쪽의 규모가 더 많은 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은 수원 장안에서 7%포인트 차이, 안산 상록에서 8%포인트, 충북 4개 군에서 12%포인트 뒤졌다. 여야가 달라지고, 반MB 정서가 광범위한 데 아무리 박 전대표라도 이 정도 차이(gap)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리하면, '박근혜의 힘'은 지나간 추억이다. 그것은 야당 시절에 보여준 위력이다. 보수 언론 등이 진시황의 기마군단처럼 여론을 쥐락펴락 휩쓸고 다니면서 전적으로 그의 편을 들어줄 때 가능했던 이야기다. 이제는 아니다. 그가 공격할 수 있는 대상이 적이 아니라 아군이고, 그 역시 실정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망한 보수도 적지 않다. 도대체 이런 착각이나 무지가 왜 지속되는지….
양보해서, 박 전 대표의 대중적 파워에 대해 인정하더라도 그의 힘이 발휘되는 '조건'에 대해 면밀히 따져보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박 전 대표의 힘이란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무조건 발휘되는 마법이 아니다. 상황에 맞아야 하고,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지금 민심의 기저에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의 힘' 주장은 게으른 착각이거나, 자학적 무지일 뿐이다. 또는 소심함이나 열등의식의 발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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