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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저녁 비가 온다는 예보에 사실 약간 짜증이 났다. 한 달에 한번 하는 서울 도보 답사 여행을 망칠 것 같다는 생각에 특히 이번에 계획된 고궁의 단풍여행은 1년을 더 기다리거나 개인적으로 사나흘 안에 다시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서다.

하지만 31일(토) 아침 서울에서 비는 내리지 않았다. 일기예보를 자세히 보니 경북 북부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정오를 지날 무렵부터 서울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고 한다.

비가 온다는 소식에 원래 약속을 했던 참가자 몇 명은 펑크를 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래가사로 20년 넘게 바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가수 이용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나는 버스를 타고 창경궁의 홍화문 앞으로 갔다.
                  
홍화문, 동쪽을 보고 있는 창경궁의 정문이다
▲ 창경궁 홍화문, 동쪽을 보고 있는 창경궁의 정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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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명의 인원이 빠른 걸음으로 창경궁과 종묘를 둘러보고 점심을 먹고 해산할 생각이다. 평소 같으면 4~5시간은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지만, 오늘은 비를 피해서 빨리 걷고 주마간산으로 고궁의 가을 단풍을 감상하도록 한다.

세종대왕이 살아있는 상왕인 태종을 위해 수강궁을 지은 것에서부터 유래를 하지만, 사실 고려시대 남경이었던 한양의 이궁 터이다. 따라서 고려의 궁궐이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궁궐의 자격은 조선 성종임금부터이다.

창덕궁이 좁아 세 명의 대비를 모시는 것이 힘들어 성종이 수강궁을 증축하면서 창경궁이라고 이름을 바꾸게 된다. 당초부터 창경궁은 창덕궁과 나란히 하고 있는 궁궐이라 둘을 합쳐 동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역시도 동쪽을 바라보는 궁궐의 중심이다
▲ 명정전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 역시도 동쪽을 바라보는 궁궐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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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의 특이한 점은 홍화문과 명정전 등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라는 것이다. 보통 궁궐이 남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데 비해 창경궁은 자연지리를 그대로 이용한 때문인지 동향으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갖추어 지어져 있다.

정문인 홍화문은 동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고, 다른 궁궐의 정문보다는 작은 규모로 3칸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작은 규모지만 아담하면서도 날렵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홍화문은 보물 384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성과 늘 가깝게 지내던 정조임금은 1795년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이하여 홍화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쌀을 나누어주기도 했으며, 그의 조부인 영조임금은 1750년 균역법을 시행하기 직전 홍화문 앞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균역법에 관한 의견을 수렴하기도 했다.

홍화문을 지나면 궁내를 흐르는 금천이 있고, 500년도 더 된 보물인 옥천교가 놓여있다. 옥천교 난간 아래에는 궁궐에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도깨비 상이 조각되어 있다.

옥천교를 지나 바로 간 곳은 명정문을 지나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의 정전으로 400년가량 되었다.

조선 왕조의 정궁이 아니었던 창경궁은 주로 대비들의 주거지로 이용되었고, 명정전 역시도 왕이 정사를 논하던 자리보다는 과거시험이나 경로잔치, 생신잔치 등 각종 행사장으로 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용상 뒤에 위치한 오봉일월도, 약간 초라한 것이 서글프다
▲ 명정전의 그림 용상 뒤에 위치한 오봉일월도, 약간 초라한 것이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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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인지, 이미 100년에 망한 왕조의 아픔 때문이지, 명정전의 오봉일월도는 용상의 뒤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너무 초라해 보였다.

명정전의 좌측에는 남향으로 문정전이 자리 잡고 있다.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으로 정전인 명정전과는 등을 대고 있는 특이한 구조이다. 이곳 마당에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명을 받고 뒤주에 갇혀 8일 동안 신음하다가 28세의 생을 마감한 슬픔이 남아 있는 곳이다.

문정전을 돌아서면 숭문당과 빈양문, 함인정이 있다. 숭문당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나누던 곳이고, 빈양문을 지나 함인정에서도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나누기도 했다.
            
왕실의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다.
▲ 창경궁의 통명전 왕실의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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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왕실의 가족들이 기거하던 경춘전, 환경전, 통명전, 양화당, 영춘헌, 집복헌 등을 둘러  본다. 특히 정조대왕이 독서실과 집무실로 쓰던 영춘헌은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을 갖추고 있어 놀랐다.
       
작고 소박한 모습이 놀랍다
▲ 정조임금이 거처하던 영춘헌 작고 소박한 모습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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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헌을 둘러 본 다음 궁궐의 여인들이 기거하던 처소가 모여 있던 내전 터 일원을 둘러 본 다음 단풍이 좋은 창덕궁 쪽 언덕에 올라 잠시 쉰다. 생각보다 단풍이 너무 좋다.

잠시 쉰 다음 바람의 풍향을 알아보는 풍기대를 본 다음, 성종임금의 태실비를 둘러본다.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옮겨온 것이다.
▲ 성종임금 태실비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일제가 옮겨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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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 무덤은 왕실의 일가의 경우 본인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 아이가 태어난 지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어 술로 갈무리한 항아리를 담은 다음, 전국의 명산대처에 태실을 선정하여 봉안한 것에 유래하는 것이다.

성종임금의 태실비는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닌데, 일제가 이왕가박물관(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태실비에도 일제의 만행이 숨어 있다니 놀랍다.
                    
이번 걷기 모임에 참가한 연극배우인 사촌 동생 재용이와 약혼자
▲ 창경궁의 단풍 이번 걷기 모임에 참가한 연극배우인 사촌 동생 재용이와 약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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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직도 창경궁을 창경원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이 하나 둘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고 상당 부분이 복원되었지만, 아직도 식물원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원래 일부가 논이었는데, 일제가 연못으로 바꾸었다
▲ 춘당지 원래 일부가 논이었는데, 일제가 연못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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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임금 태실비를 본 다음 춘당지로 향한다. 앞쪽의 대춘당지와 뒤쪽의 소춘당지로 나뉘는 이 연못은 원래는 앞쪽의 논과 뒤쪽의 연못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임금이 직접 농사를 짓던 앞의 논은 일제가 연못을 만들어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었다.
        
연못가의 단풍이 최고다
▲ 춘당지 연못가의 단풍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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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창경궁 안에는 임금이 농사를 짓던 논과 왕비와 여인들이 양잠을 하던 뽕밭이 있었다고 한다. 연못가의 단풍은 최상이었다. 사진을 잔뜩 찍어 왔다.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는 중국식 석탑으로 일제가 구입하여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박물관의 하나의 소장품으로
▲ 팔각칠층석탑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는 중국식 석탑으로 일제가 구입하여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이다. 박물관의 하나의 소장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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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에 라마불교의 영향을 받은 중국식 팔각칠층석탑이 일제 시대에 들여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역사 문화적으로 별로 가치가 없어 보이는 석탑을 백년 넘게 존치하고 있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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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역사, 문화와 함께 하는 서울 걷기 모임 , #창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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榴林 김수종입니다. 사람 이야기를 주로 쓰고 있으며, 간혹 독후감(서평), 여행기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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