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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친구, 가족, 회사 동료들과 모이고 있다.
▲ 대회장에 모여드는 사람들 걷기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친구, 가족, 회사 동료들과 모이고 있다.
ⓒ 최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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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100km 행군도 했는데 까짓 66km 정도가 문제되겠어."
"그건 젊을 때 이야기지요. 지금은 나이도 있으니 참으시지요."

시월의 마지막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망연자실 아픈 다리를 어루만지며, 금요일, 직장에서 동료와 나눈 대화가 뇌리를 스쳤다.

나이 40 중반을 넘겼지만, 아직 남은 젊은 호기로 걷기대회에 참여하려는 나를 걱정하는 동료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더 떠밀었다. 도전한다는 것은 가슴 떨리는 설렘을 동반한다. 결국은 신청을 하고 말았고, 그 도전의 한 자락에서 있는 것이다.

' 아! 옛날엔 이렇지 않았는데.'

옛날에 심하게 다친 발목에 통증이 몰려 왔다. 그래도 1주일에 3일은 매일 5km씩 구보를 하며 단련시킨 몸인데도 불구하고 장시간 누적된 충격에 가장 약한 부위부터 신호가 온 것이다.

순조로운 출발

황룡사 구층탑 모형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주최측 관계자가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 황성공원 내 황룡사 구층탑 모형 황룡사 구층탑 모형이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주최측 관계자가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 최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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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1일, 경주 황성공원에는 작지만 재미있는 행사가 열렸다. 실내체육관 앞에 무대가 들어서고, 하얀 천막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내빈을 위한 간이 의자들이 무대 왼편에 나란히 두 겹으로 자리 잡았다. '제8회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대회' 식전행사를 위한 시설들이다.

저녁 6시부터 1시간 30분가량 식전행사가 시작되었다. 댄스와 노래 등으로 분위기가 무르익고 무대 옆 천막에서는 행사진행요원들이 배번과 약간의 간식을 나누어주고, 당일 접수자들을 받고 있었다. 분주한 분위기가 시골의 잔치 집 분위기를 연상시켰다. 때를 맞춰 설치한 간이 음식점들이 분주히 손님을 맞고 있었다.

경상북도 지사, 경주시장, 국회의원, 도의회 의원 등이 차례로 소개되고 한국수력원자력 본부 임원들도 소개되었다. 드디어 몸 풀기를 하고, 이 대회를 주최한 경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 이종률씨의 출발 선언과 함께 걷기대회 본행사가 시작되었다.

식전행사가 열렸다. 춤, 전통 민요 등 볼거리를 제공하여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도  재미를 더해 주었다.
 식전행사가 열렸다. 춤, 전통 민요 등 볼거리를 제공하여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도 재미를 더해 주었다.
ⓒ 최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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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리(66km)를 걷는 사람들과 75리(30km)를 걷는 사람이 동시에 출발했다. 약 3000명의 참가자들이 봇물 밀리듯 대로를 가득 메웠다. 하늘의 달빛이 구름사이로 왔다 갔다 하며 차가운 은빛을 흘리고 있었다.

대로를 따라 조금 가서 북천을 따라 만들어진 도보 길로 내려섰다. 길을 따라 조성된 아기자기한 풍광은 달빛을 받아 운치를 더했다. 시민들을 위해 만들어진 체육공원도 보이고 작은 다리도 서너 군데 지났다. 가족, 친구들끼리 같이 참가한 사람들은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 보따리를 끝없이 쏟아 내었다.

"개미 떼 같다."

구불구불 줄지어가는 대열을 보고 참가자 누군가 한 말이다. 드디어 보문호수를 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

'경주에 이런 길도 있었구나.'

수십 년을 경주에서 살았지만 처음 밟아보는 길이다. 보문호수의 야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주말이라 그런지 보문호수가에서 경치를 즐기는 관광객들이 많이 보였다.

산길에 접어들어

현대호텔과 대명콘도 콩코드호텔을 지나 75리 참가자들과 165리 참가자들이 갈라졌다. 암곡으로 이어지는 길은 호젓한 산길이었다. 165리 참가자들만 참여해서인지 참여자 모습은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순위다툼이 없는 경기라 쉬어갈 수도 있기 때문에 경치 좋은 보문에서 준비한 먹거리를 풀고 쉬고 있는 사람도 많으리라. 마침 보름 하루전날이라 달이 밝았기에 망정이지 달이 어두웠으면 무서울 길이었다.

드문드문 호젓한 산길을 그나마 심심하지 않게 해주는 것은 참가 단체 팀들을 위한 응원이었다. 커피와 먹거리를 펼쳐 놓고 같은 팀이 오면 먹거리들을 제공하고 있었다. 필자는 소속된 팀이 없었기 때문에 먼발치서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산길은 험하지 않아도 힘든 길이었다. 아직 30km도 가지 않았는데 힘에 부친다. 가끔씩 산속에는 작은 마을들이 나타났다. 상점도 있었다. 등산객을 손님으로 받을 작정으로 만든 곳일 것이다.

산길을 돌고 돌아 갔더니 덕동호를 비켜 지나가는 길이 나왔다. 추령재를 넘는 도로를 만나니 경찰들이 안전을 위해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20km 지점에서 나누어준 야광봉을 착용하고 참가자들이 걸어가는데 조금만 떨어져도 사람 형체는 보이지 않고 반딧불만한 불빛만 어둠속에서 반짝였다. 달빛은 어느새 구름 속으로 숨어들어 어둠이 짙어져 있었다.

서서히 노곤해지는 다리를 이끌고 추령재 꼭대기에 위치한 쉼터로 향했다. 그 길도 만만치가 않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산모퉁이에서 불빛과 함께 새어나왔다. 드디어 쉼터에 도착했다. 큰 찜통에는 더운 물이 끓고 있었고, 곁에는 줄지어 컵라면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그 가운데 하나를 차지하고 앉을 곳을 찾았다. 노곤해진 다리도 쉬고 출출한 배도 채울 수 있다. 평소 컵라면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국물까지 남김없이 먹어버렸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양말을 갈아 신기도 하고 바세린을 바르기도 한다.

달콤한 휴식을 떨치고 일어나 추령재 고개 길을 내리 숙여 걸었다. 동행인이 없는 깊은 산길에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쓰였다. 걸음을 재촉하여 내려오니 앞에서 몇 개의 야광봉이 눈에 띄었다. 안심이 되었다. 그 때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돌아보니 연세가 지긋하신 남자 분이 뛴 걸음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예전 같지 않구먼, 산을 좋아해서, 늦기 전에 해보고 싶어 신청했지만 이렇게 힘들 줄 몰랐네."

산을 많이 타셔서인지 날씬한 몸매를 한 자태가 건강해 보였다. 평생 발에 물집이 생긴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물집이 잡혔단다. 그래서 뛰어보니 훨씬 발에 부담이 적어 살짝 살짝 뛰는 중이란다. 얼마간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며 동행했는데 어느새 저 앞까지 성큼 성큼 걸어가고 있다.

체력의 극한과 맞서다

차로만 다니던 길이라 거리 감각이 달랐다. 지금쯤 나타나야 할 곳이 한참을 걸어도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렴풋한 윤곽으로 보아 허브랜드가 분명했다. 이 거리가 이렇게 길었던가. 새삼 자동차의 고마움을 느껴본다. 고개 숙이던 고갯길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점점 가팔라지는 길의 경사는 더욱 지치게 만들었고 이번 대회에 굳이 165리를 고집했던 나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달빛이 없는 산길을 따라 오르는 길에 불빛이라고는 앞서가는 참가자의 야광봉 불빛뿐이었다. 까만 밤길에 만나는 불빛은 어느 것이라도 반가웠다. 토함산 자연휴양림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진 표석을 밝히는 조명 아래 두 번째 확인 도장을 찍었다. 40km 지점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장항사지 곁에 진행요원들이 만들어 놓은 쉼터가 있었다. 따뜻한 꿀 차가 가슴을 타고 내려갔다. 새벽이라 그런지 기온이 많이 내려가 있었다.

다음 목표지점은 석굴암, 2~3km 남짓한 길, 더 가팔라서인지 몸이 피곤해서인지 멀게만 느껴졌다. 몇 차례나 길가에 앉아 쉬기를 거듭하며 오르고 또 올랐다. 몇 발자국만 가도 힘에 겨워 자꾸만 주저앉게 되었다. 길가에 털썩 주저앉아 사람들을 몇이나 지나보내고 나서야 겨우 일어났다.

어두워진 하늘에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려나! 돌풍을 동반한 비가 올 거라고 일기예보에서 예보한 것이었다. 서둘러 미리 준비한 우의를 챙겨 입었다. 다행이 큰비는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석굴암 주차장에는 하얀 대형 천막들이 줄지어 처져 있었다. 그 곳에는 시래기국과 밥을 제공했다. 피곤한 탓에 입맛을 잃어 국만 부탁했다. 따뜻함이 좋았다.

석굴암을 내려와 불국사 경내를 통과한 다음 불국사역을 지나 남산 통일전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오전 6시. 졸음까지 밀려왔다. 준비한 초콜릿으로 잠을 쫓으며 계속 걸었다.

'진정 이 길이 신라시대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한 길이었을까?'

주최 측이 이 길을 그렇게 유추했다. 정말 신문왕이 지나간 길일까? 추령제는 경주시내에서 감포 바다로 연결되는 도로 중 하나다. 포항으로 돌아가는 길과 추령제로 가는 길이 감포 바다로 가는 길인데 감은사지와 문무대왕릉으로 가는 길을 따지면 포항으로 돌아 갔을리는 없을 터. 그렇다면 이 길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이야 도로를 크게 뚫어 차들이 쉽게 다니지만 옛날에야 그럴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 옛날 신라인들도 이 길을 왕래했을 터. 그 험준한 산길을 왕도 지나다녔는데 젊은 내가 이렇게 힘들어 해서야 자존심이 서질 않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마지막 목적지를 향하여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고 주변이 환해졌다. 절뚝거리는 대회 참가자들의 모습이 멀리 있어도 보인다.

'아!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었구나.'

통일전으로 탁 트인 도로가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들이 한꺼번에 가슴에 안기었다.

통일전 앞에는 진행요원들이 만든 쉼터가 보였다. 트럭 가득 실은 바나나를 하나 쥐고 길을 재촉했다. 이어서 남천을 끼고 돌아 경주국립박물관 곁을 비켜 반월성으로 올랐다. 선덕여왕 촬영지라는 간판이 행인을 맞이했다. 반월성 풀밭 한 가운데 멀뚱히 서있는 선덕여왕(이요원 분) 사진이 보였다. 포토존을 만들어 놓았나 보다. 반월성을 내려와 계림과 첨성대를 거쳐 대릉원을 통과했다. 60km 세 번째 확인 도장이 찍혔다. 이제 6km만 가면 최종 목적지다.

봉황로는 공사가 한창이다. 신라토우를 소재로 한 설치물들이 도로변에 줄지어 있고 경주의 옛 사진들이 안내문과 함께 설치되어 있었다. 봉황로를 지나 시가지를 가로질러 통과하니 북천을 사이에 두고 황성공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골인! 완보 메달과 완보증을 받았다. 기념촬영을 마치고 대회 덕분에 사귄 친구와 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아, 드디어 해냈다!'

14시간의 도보여행은 나에게 새로움을 안겨 주었다. 끝까지 인내한 보람은 나에게 큰 보석보다 값진 선물을 안겨 주었고, 고된 시간은 지나면 달콤한 추억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것이다.

완보를 한 후 골인 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목에는 완보 메달을, 가슴에는 완보증을 들었다.
▲ 완보 기념 완보를 한 후 골인 지점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목에는 완보 메달을, 가슴에는 완보증을 들었다.
ⓒ 최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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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걷기대회, #경주, #신라달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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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을 사랑합니다. 그 영롱함을 사랑합니다. 잡초 위에 맺힌 작은 물방울이 아침이면 얼마나 아름다운 빛의 향연을 벌이는 지 아십니까? 이 잡초는 하루 종일 고단함을 까만 맘에 뉘여 버리고 찬연히 빛나는 나만의 영광인 작은 물방울의 빛의 향연의축복을 받고 다시 귀한 하루에 감사하며, 눈을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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