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북촌한옥 지킴이로 알려진 영국인 데이비드 킬번(66)씨 일가의 비극적인 기사를 보았다. 그는 20년 전, 한옥을 처음 본 순간 한옥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 집을 바로 사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러나 서울시는 한옥 재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재개발을 시도했다.
삶의 터전이기도 한 아름다운 집들을 허물지 못하게 지키려고 애썼으나 개발 찬성파들의 협박과 함께 힘들게 지내다가 앞집이 콘크리트를 사용해서 한옥을 개축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려다 개발업자한테 떠밀려 넘어져서 실명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인은 자궁경부암에 걸렸고, 남편은 실명해 더 이상 아름다운 한옥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성북구 동소문동 6가 한옥에서 사는 피터 바돌로뮤(61)씨와 이 지역 재개발 반대 주민들 역시 힘들게 싸우고 있다. 미국인 피터 바돌로뮤(61)씨는 1974년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 6가 한옥에 정착했다. 그러나 서울시가 주택재개발 정비구역으로 정함에 따라 한옥을 지키기 위해 지난 5년 동안 재개발에 맞서 싸워왔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서 어렵사리 1심 재판에서 승소해 한숨을 돌렸지만, 지금은 개발 찬성파들의 위협과 시위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외국인이 한옥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는 현실이 아이러니컬하기도 하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세계디자인의 가치선도 위한 실마리를 제시하고, 세계적 디자인 도시로서 개최지 문화ㆍ산업기반 육성기틀 마련한다는 것을 기본방향으로 하여, The Clue_더할 나위 없는' 이라는 주제로 2009. 9. 18(금) - 11. 4(수)까지 48일간 열렸던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가 끝났다. 이번 디자인 비엔날레는 5가지의 주제로 열렸다.
Clothing- [衣]-의생활 디자인 : 더할 나위 없는 '옷'
Tasting - [食]-식생활 디자인 : 더할 나위 없는 '맛'
Living - [住]-주생활 디자인 : 더할 나위 없는 '집'
Enlightening- [學]-깨침을 위한 디자인 : 더할 나위 없는 '글'
Enjoying- [樂]-즐김을 위한 디자인 : 더할 나위 없는 '소리'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라져가는 한옥에 대한 그들의 아픔을 안고 광주 디자인 비엔날레 5개의 주제전 중 "住" 전시공간인 양림동의 이장우, 최승효씨 고택을 찾았다. 지은 지 100년이 넘는 고택은 아직도 튼실해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한옥들이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행히 두 가옥은 광주시가 민속자료로 지정해 잘 보존되고 있었다. 1989년 광주시는 이장우씨 고택을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1호로, 최승효씨 고택을 제2호로 지정했다.
이장우씨 고택(1899년 건립)은 과거와 현재의 만남으로 한옥의 분위기를 그대로 살리면서 실생활을 할 수 있도록 펌프 안에 수도꼭지를 만들어 현대생활을 하는데 불편 없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한옥에 어울리는 각종 디자인들을 전시해 놓았다.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이었다.
차실에는 10人10色展으로 도자기 공예가 10인의 작품인 1인용 다구(茶具) 세트를 전시해놓았는데 앙증스럽게 나무로 깎아 만든 젓가락이며 새총같은 젓가락 받침대가 눈길을 잡아 끌었다. 참 고왔다.
그중 내 눈길을 오래도록 잡았던 것은 어머니의 방이었다. 모든 것을 수놓아 사용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섬돌을 딛고 툇마루를 올라 안채에 있는 어머니의 방에 들어서니 섬세하고 아름다운 가구들이 나를 사로잡았다. 부채에까지 수를 놓은 것을 비롯하여 하나하나 살펴보니 그 옛날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은 마음에 옛여인들의 고달프고 가녀린 숨결이 느껴졌다.
안채에 딸린 방 하나에는 "윤회매"라는 밀납매화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밤에 보면 더 아름답다는 것을, 낮에 손바닥보다 더 작은 창으로 캄캄한 방을 들여다 보아야 했다. 몇 번을 보아도 제대로 보지 못해 아쉬움을 안고 돌아섰다. 돌아와서 보니 다행히 카메라에 선명하게 담겨있어 감사했다. 윤회매란 벌이 화정을 채취하여 꿀을 빚고, 꿀에서 밀랍이 생기고, 다시 매화가 되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마당에는 디지털 우물이 있었는데 참으로 흥미로웠다. 들여다보고 있으니 깊은 우물 밑바닥의 그림들이 수시로 변했다. 신기해서 어린아이처럼 보고 또 보았다. 과거와 현재의 만남이 피부로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이장우씨 고택이 편안하고 여성적이라 한다면 최승효씨 고택(1920년 건립)은 남성적 기상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특히 이곳은 아득한 초등학교 시절 최 부잣집이라고 하여 소풍을 가기도 했던 추억이 어린 곳이다.
화가인 셋째 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 가옥에는 그의 작업실이 그대로 있었다. 후손이 거처하는 곳이라 사람 기운이 느껴졌다. 이 가옥은 독립투사들이 모여 회의하고 독립자금을 조달했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하니 다가오는 그 무게가 한층 더했다. 후원에는 고 백남준씨와 함께 찍은 커다란 사진이 작업실 벽에 걸려있었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최씨 가족과 비엔날레 재단과의 사전 협의가 안되어 전시작품은 없었으나 고택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관람의 의미가 있었다.
2층에는 다락처럼 생긴 천정 낮은 방이 있었는데 이곳은 독립운동할 때 모여서 회의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계단이 만들어져 있으나 당시에는 계단이 없어 일본인의 눈을 피할 수 있었으리라. 올라가보니 숙연해졌다. 역사의 현장에 내가 서있었다.
울창한 나무들에 둘러싸인 한옥은 후원이 넓고 아름다워 긴 산책로까지 있었고, 산책로에서는 시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당에는 빨간 고기들이 사는 호수도 있었고, 정원에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탁자와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곳곳마다 그윽한 품격이 느껴지는 가옥이었다.
뒤돌아 나오면서 우리의 한옥이 왜 보존되어야 하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생활공간으로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가치를 지닌 문화재로 후손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옥은 보존되어야 한다. 이렇게 훌륭하게 보존되어 조상들의 숨결과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준 고택에 깊은 고마움을 남기며 귀향하는 마음이 흐뭇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