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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10.26의거를 기념하여 얼마 전 동양평화론 조명 논의가 있었다. 아직은 그가 테러를 결심했지만 사상적으로는 평화주의였다는 수준이나, '평화'뿐 아니라 '동양'에도 앞으로 곱씹을 거리 하나가 있다. 안중근은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아시아주의자라는 점이다. 이 아시아주의가 제국주의와 단절적이거나 차별적이지는 않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개화기 아시아주의는 개화된 일본과 함께 한국과 중국이 공영해야 한다는 사상이며, 많은 지식인들이 품은 사유에는 앞서 나간 사회에 대한 동경, 그러니까 사회진화론이 깃들어 있다.

 

위암 장지연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다는 소식에 그 유족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사법부는 유족들의 가처분신청을 기각하였지만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우뚱할지 모른다. 을사조약을 맹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은 유명하다. 하지만 장지연의 일제부역행위는 진실이다. 그는 1911년 11월 2일자 <경남일보> 지면에서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기념시를 실었으며, 1915년 초에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서 총독부를 칭찬하였다.

 

  일왕 생일을 축하하는 장지연의 시
일왕 생일을 축하하는 장지연의 시 ⓒ 자료사진

 

장지연은 변절자인가? 그렇지 않다. 한일병합 이후 그의 행보는 필연이었다. '시일야방성대곡'이 대표적인 민족주의적, 애국적 사설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반제 또는 반일라고 하기는 어렵다. 개화기부터 일제시대까지 민족주의와 애국은 곧 반일이라는 등식부터가 잘못되었다. 장지연은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 <황성신문>에서 일본의 승리를 염원했다. 황성신문과 당대 개신 유림은 백인종에 대항하는 황인종의 단결을 강조하고 있었을 뿐 국제적인 패권주의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았고, <대한매일신보>와는 달리 꿋꿋이 반일적이지도 않았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이토 히로부미에게 건 동양평화의 비전이 무산되면서 새어나온 배신감의 표현이었다. 안중근의 이토 저격과 닮았다. <황성신문>의 친일 논조는 을사조약 직후에도 그치지 않았다. 물론 한국의 독립 유지를 전제하고 있었지만, 제국주의를 비판하지 않은 채 일본과의 공영에 몰두하였다. 이는 힘 센 나라, 먼저 개화한 나라와 더불어 부국강병을 도모하자는 사회진화론의 발로였다. 많은 민족 인사들은 이렇듯 전쟁찬양과 인종주의에 협력하면서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와 달리 태생적으로 저항적, 해방적이었다는 통설을 개화기 역사는 반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독일, 일본의 파시즘과 제국주의도 그 출발은 외세에 대한 저항이었다.)

 

반박 뿐인가. 일제의 통치가 본격화될수록 뚜렷이 입증된다. 3.1운동에 앞서 잠시나마 이완용조차 '민족대표'의 일원으로 영입될 기미가 있었다. 그걸 사양한 건 이완용 자신이었다. 국가대표 친일파마저 민족대표로 자리매김하는 마당에 일면 반일적인 듯한 인사가 일제부역자가 되는 건 별 일도 아니었다. 최남선이나 이광수처럼 일본의 강성함을 찬탄하며 자민족의 현실에 절망한 지식인들은 철두철미한 약육강식론자로 거듭나 제국주의를 합리화했다. 피해대중의 고통보다 자신의 명망과 이익이 더 소중했던 지주, 자본가들도 독립을 포기한 뒤 자치론을 펴는 '타협적 민족주의'에 그쳤다. 심지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조차 1930년대 후반께 잠시 일본이 모색했던 새로운 길, 동아신질서론에 현혹되어 전향하는 사례도 있었다.

 

신채호는 이와 정반대의 길로 고집스레 걸어간 인물이다. 그는 사회진화론자였으나 그것이 식민지배를 정당화함을 간파하고 사회진화론을 버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민족주의자였지만 말기 그 민족주의에는 무정부주의까지 섞여들어갔다. 식민지배뿐 아니라 자본가계급의 독재에 저항한 좌익들(물론 이들이 정녕 사회진화론을 떨쳤는지는 좀 더 세심한 연구가 있어야 한다. 소비에트연합에 기댄 일부의 행태는 '사대주의'의 새로운 버전이 아닌지 상당히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중도파로서 '균등'을 앞세운 조소앙, 국제주의적인 신민족주의를 제시한 안재홍 등이 모두 사회진화론에 반대한 지식인들에 속한다. 사회진화론에 반대하지 않고서 온전히 반제국주의자가 될 수는 없었다.

 

일제 말기 김활란, 백낙준 등이 내심은 친미파였으나 일제 권력에 굴종한 '전쟁협력자'였다면, 장지연 같은 인물은 민족중심적 사고를 갖춘 동시에 아시아 인종주의자, 사회진화론자였다. 양쪽 모두 민족/반민족, 애국/매국, 친일/반일이라는 기존의 구도로는 논거들의 우격다짐만 계속될 따름이다. 개화기 우국지사들에게서 지나치게 반제국주의의 모범을 찾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욕을 을사오적에게만 퍼붓고 있지는 않은지, 본심은 다른 쪽이었다는 변명으로 구체적인 부역행동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등등을 되돌아볼 때다. 궁극적으로 친일청산의 동력은 민족주의가 아니라 좀 더 보편적인 가치들-평화, 자유, 평등, 인권, 민주주의에서 나와야 한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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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친일#민족주의#사회진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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