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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적지 살아오면서 애도 낳아보지 못했고 시집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와서 그 세월을 돌릴 수는 없겠지만 사과라도 받고 죽으면 한이 없겠지요."

 

김복득 할머니(92)는 눈물이 자꾸 앞을 가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지난 2일 아침, 김 할머니는 힘든 몸을 이끌고 시청을 찾아 많은 사람들 앞에 섰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일본의 만행에 대한 증언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김 할머니가 일본군에게 끌려가 인간으로서, 여인으로서 끔찍하리만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은 지도 어느덧 64년이 흐른 지금, 할머니를 그 자리에까지 세운 건 대체 누구였을까? 할머니의 뜨거운 눈물 앞에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서명을 통해 뜻을 모아 준 많은 사람들의 진심 밖에는….

 

통영에는 김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할머니가 두 명이 더 있다. 그러나 이 숫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할머니들의 수치일 뿐이다. 실제 많은 할머니들이 수치스러움 혹은 가족의 반대로 이같은 사실을 숨기고 살고 있다.

 

또 당초 통영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할머니는 6명에 달했으나 일본과의 힘겨운 싸움을 이어오는 동안 3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남은 할머니들도 연세가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이라 내일을 기약할 수 없고, 김 할머니를 제외한 다른 할머니들은 노환, 치매 등의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전국에서도 4개에 불과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가 마침 통영지역에 버티고 있어 피해 할머니의 복지와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후원회원의 도움만으로 8년간 활동해 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대표 송도자)은 최근 큰일을 해냈다. 3개월간 이리 뛰고 저리 뛰어 3339명의 시민 서명을 받아 통영시의회에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10명 남짓한 회원들이 생업에 종사하면서 이뤄낸 뜻 깊은 결실이었다.

 

송도자 대표는 "원래는 만명을 목표로 했었는데 모든 회원들이 일을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촉박했다. 일본에서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지금 해결을 해야 했기에 결의안 청원을 서둘렀다"고 밝혔다.

 

시민단체에서 바라보는 현 정세는 보다 예리했다. 일본 민주당에서 과거 10여년 간 일본군 '위안부'의 문제해결을 위해 '전시성적강제피해자문제해결촉진법안'을 발의한 점, 하토야마총리가 공식석상에서 과거사를 직시하겠다고 밝힌 점 등을 들어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 아래 하루 빨리 잘못된 모든 것을 바로잡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소극적인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의 논조가 강했다. 1965년에 작성한 한일협정 전문을 공개하고 "과거사에 대해 사죄할 건 사죄하고 배상할 건 배상하라"며 일본의 조속한 입장표명을 요구했던 노무현 정부에 비해 발전은커녕 오히려 후퇴한 외교를 펼친다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했고 그때 "과거사를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얘기했다는 보도가 여러 외신을 통해 전달됐다. 당시 우리를 비롯한 많은 피해할머니들은 "감히 누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느냐"며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그때 청와대는 궁색한 변명을 했지만 당장 내년부터 일제시대 문제를 조사하던 '과거사 위원회'가 일괄 폐지된다. 피해할머니들을 위한 어떠한 조치도 없이 비굴하기 짝이 없는 외교를 해 나가는 정부의 모습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분노하고 있다"고 송도자 대표가 말했다.

 

이번에 제출한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 채택 청원서에 대해서는 "UN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소녀와 여성들을 성노예화한 이 파렴치한 범죄에 대해서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법적배상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 민주당정권 출범의 희망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작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회피와 무관심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에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우리는 피해생존자들과 지역민의 뜻을 모아 이렇게 청원을 하게 됐다. 통영시의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반드시 채택하여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고, 피해자들의 짓밟힌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고, 미래세대에세 평화로운 세상을 물려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결의안에 담을 사항으로는 △일본 정부의 반인륜적 범죄사실에 대한 공식인정, 관련자료 전면 공개 촉구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에 따른 법적책임 △일본 정부의 올바른 역사교육 △일본 의회가 특별법을 제정할 것 △대한민국정부가 외교적 협상에 나설 것 △대한민국 국회가 양국 의회 간 협상에 나설 것 △통영시의회가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에 노력할 것 △통영시의회가 지역피해자들을 위해 지원할 것 등 8개 항목을 제시했다.

 

한편, 지난 2일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함께하는통영거제시민모임으로부터 청원서를 전달받은 통영시의회(의장 구상식)에서는 의원 간담회에서 결의안을 논의한 후 내달 말에 열리는 123회 임시회에 정식안건으로 상정시키기로 했다.

 

시의회 관계자는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곳이 의회이고 주민들의 뜻을 모은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무난히 가결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모든 의원들도 결의안에 공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에 송도자 대표는 "통영시의회 결의안 통과를 시발점으로 거제시의회, 경남도의회 통과를 위해서 노력할 것"이라며 "전국적으로 피해할머니들을 위한 복지 지원이 시급하고, 역사자료관, 기념비 등의 기념사업도 병행해 나갈려고 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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