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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이 이 세상에 태어나

아름답게 살기를 힘쓰며 기쁘게 살다가

희망의 열매로 다시 태어날 그날을 기다리며

여기에 잠들다. (여, 77세)

 

행복의 작은 역을 향해

아름다운 추억을 싣고 가노라. (여, 63세)

 

동행하는 자 없으니 현재에 만족하며 성실히 살자

남을 의식하지 말고 정도의 길을 걷자. (남, 71세)

 

 

지난 11월 4일과 5일 이틀동안 가평의 한 펜션에서 <제12기 아름다운 생애 마감을 위한 senior(시니어) 죽음준비학교> 캠프가 열렸다. 총 15회의 수업 가운데 두 번의 수업은 평소 수업을 하는 복지관을 떠나 공기 맑은 곳에서 하룻밤 같이 지내면서 해오고 있는데, 나는 죽음준비교육 전문 강사로서 캠프 프로그램의 전 과정을 맡아 진행한다.

 

영화 '버킷 리스트' 감상, 가장 심각한 노인문제에 관한 토론과 역할극, 내 삶이 한 달 남았을 때 버리고 싶은 것과 꼭 하고 싶은 일 발표, 촛불 명상과 세상 떠나기 전 만나고 싶은 사람 초대하기 등으로 첫날을 보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날을 맞은 아침, 첫 수업은 <묘비명 쓰기>다.

 

역사에 기록된 유명한 사람들의 묘비명에서 그들의 삶의 태도와 죽음에 임하는 자세, 살면서 품어온 생각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아 어르신들도 한 번 써보시면 좋을 것 같아 시작한 수업이다. 평범한 어르신들의 즉석 묘비명에서 나는 늘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감동을 느끼곤 한다.

 

화장해서 '납골(봉안)'해 줬으면 좋겠다는 분이나 그냥 흩어 뿌리는 '산골' 혹은 '수목장'을 원한다며 묘비 세울 일 없을 거라고 하시는 분들께도 묘비명 쓰기를 권하는 것은 짧은 글 속에 그동안 살아온 삶의 흔적이 자연스레 담기기 때문이다.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묘비명 쓰기를 마친 다음에는 둥글게 둘러앉아 서로의 묘비명을 발표하고 소감을 나눈다. 때론 웃음이 퍼지기도 하고, 때론 숙연함이 감돌기도 한다. 

 

강ㅇㅇ 여기 잠들다.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때론 너무 강직하기도 했다.

이젠 모든 것 접어두고 편하게 쉬고 싶어

여기 이렇게 잠들었노라. (남, 68세)

 

한 많은 인생, 그러나 행복했노라. (여, 67세)

 

자연의 흐름에 따라 나는 열심히 살다 가노라. (여, 62세)

 

아름다운 세상

아름답게 살다 갔노라

더 아름다운 세계로... (여, 71세)

 

'한 많은 인생이었지만 행복했노라'고 쓰신 어르신은 스물아홉에 혼자 되어 남매 기르느라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고 했다. 그 마음 서로 알기에 힘들었을 지난 날을 헤아려보고 그래도 행복했다고 자족하는 그 마음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작성해본 적은 더더구나 없는 어르신들이 막막해 하면서도 한 줄 혹은 몇 줄로 적어보는 묘비명에는 이렇게 어르신들 살아온 인생이 많은 적든 담겨있다. 살아보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인생의 간난신고(艱難辛苦)를 넘어 모든 것 다 받아들인 노년은 그래서 위대하며 눈물겹다.   

 

나는 유언장 등등 죽음준비에 필요한 것들을 어르신들과 같이 수업하면서 이미 작성하고 준비해 두었지만, 이상하게 아직 묘비명은 쓰지 못했다. 이렇게 쓰기 어려운 것을 짧은 시간 동안 써내시는 어르신들이 존경스러울 뿐이다.

 

아직 작성하지 못한 묘비명이 가슴에 자리잡고 있어서인지 가끔 '내 묘비명은 뭐라고 쓰지?'하고 스스로에게 묻곤 하는데, 어르신들의 묘비명에서 이렇게 배우고 있으니 조만간 쓸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어렵게 느껴짐을 고백한다.

    

그 날 묘비명 발표 시간에 모두가 저절로 박수를 친 묘비명은 72세 여자 어르신의 묘비명이었다.

 

이제 인연 다하여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네

행복했던 여행 끝 마치고

하늘나라로 돌아가네

근심 걱정 없는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나세!

덧붙이는 글 | 서울시립노원노인종합복지관 <아름다운 생애 마감을 위한 senior(시니어) 죽음준비학교> 02-948-2745


태그:#죽음준비, #죽음준비학교, #묘비명, #웰다잉,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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