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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는 요술을 부린다고 한다. 한 차례 비가 지날 때마다 기온을 뚝뚝 떨어뜨린다. 옷깃을 스치는 바람결이 선뜩하다.

 

간당간당 힘겹게 버티던 감나무 감잎이 몸을 날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매칠 새 감나무가 옷을 홀랑 벗었다. 옷 벗은 감나무에 노란 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앙상한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감! 늦가을 정취로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스산하게 부는 바람에서 초겨울이 느껴진다. 우리 동네 뒷산인 마니산에도 단풍이 막바지이다.

 

가을은 풍요의 계절이라지만, 결실이 끝난 뒤에는 허허로움이 느껴진다. 쓸쓸함이 묻어있다. 늘 푸를 것만 같았던 식물들이 쇠락하고 시들어간다. 그래도 가을은 곱게 떠나려는 듯 아름다운 자태로 가슴을 열어 보인다.

 

따스한 가을햇살을 벗 삼아!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옆집아저씨이다.

 

"전 선생, 쉬는 날인데 산에 안 가?"

"좋죠! 오늘은 어디로 갈까요?"

"멀리 갈 거 있나? 마니산 장군봉에 가지. 마지막 가을 모습이 멋져!"

"그럼, 서둘자구요. 새집할아버지께도 연락드릴게요."

 

가까운 강화도 산행을 함께하는 옆집아저씨와 새집할아버지가 오늘도 산행을 동행한다.

 

아내가 간단한 요깃거리를 챙겨준다. 간단하다. 음료수와 집에서 거둔 고구마와 밤을 찌고, 떡을 약간 준비하였다. 산에 간다고 하면 이웃 어른들을 위해 간단한 간식을 챙겨주는 마음이 고맙다.

 

배낭을 꾸려 가까운 곳으로 산행을 떠나는 게 소풍가는 것처럼 재미가 있다. 산 들머리에 들어서자 햇살이 따사롭다. 아침의 한기는 저만큼 달아났다.

 

새집할아버지와 옆집아저씨가 대화를 나눈다.

 

"장씨, 봄볕엔 며느리 내보내고, 가을볕엔 딸 내보낸다는 말 들어봤어?"

"그런 말이 있지요. 가을볕이 봄볕보다 좋다는 말이죠."

"오늘 같은 따스한 가을햇살은 돈 주고도 못 살 것 같네 그려."

"가을볕을 맘껏 쬐고 싶은 날이네요!"

 

나무숲을 뚫고 비추는 햇살이 너무 좋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부드럽게 내리쬐는 가을볕이 참 좋다. 기러기 떼가 "끼룩끼룩" 소리를 지르며 머리 위로 날아간다.

 

오르막길에 숨이 가쁘다. 이마엔 적당히 땀이 난다. 산행의 묘미는 땀에 있다. 느릿느릿 바쁠 것 없는 발걸음으로 여유를 부린다.

 

할아버지께서 뒤따르는 내게도 말을 걸어오신다.

 

"야! 일년이 금세야. 전 선생은 세월 가는 거 크게 못 느끼지?"

"아뇨! 저도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게 바로 엊그제 같은 걸요."

"그래도 늙은 내가 느끼는 것과는 다를 거야. 생각 같아선 세월을 붙잡고 싶어!"

"세상사는 사람 모두가 같은 생각일 걸요."

 

팔순을 넘기신 새집할아버지는 가는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하신다. 꽃피던 춘 삼월이 어제 일 같다는 것이다. 구부정한 자세로 산을 오르는 어르신의 모습에서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낙엽 긁어모아 군불 때던 시절이 있었다

 

수북이 떨어진 낙엽이 온 산을 덮고 있다. 차가운 겨울 산의 맨살을 따뜻하게 감싸려는 것 같다. 나무는 자라면서 이렇게 많은 이파리를 떠안고 어떻게 살았을까?

 

산에 잎이 가는 상수리나무잎, 좀 널찍한 것은 신갈나무잎, 더 넓적한 것은 떡갈나무잎, 그리고 온갖 잡목의 나뭇잎과 바늘 모양의 솔잎이 쌓여 융단을 깔아놓은 듯싶다.

 

쌓인 낙엽을 보니 계절은 겨울로 치닫고 있는 게 분명하다. 자연은 겨울을 날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다. 찬 바람이 싫은 나무는 벌써 죄다 잎을 떨어뜨리고 눈을 만들어 겨우살이 준비를 한다. 풀은 씨를 만들어 땅 속에 몸을 숨겨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자연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고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너무도 잘하는 것 같다.

 

두 분의 이야기가 또 이어진다.

 

"어렸을 적, 이맘때가 생각이 나네! 갈퀴로 낙엽 긁어 때던 일 말이야!"

"그렇지요. 낙엽 모아 둥치를 만들어 땔 감하던 일요?"

"크게 한 동하고 짐을 부려놓으면 마음까지 넉넉했는데!"

"군불 때 밥하고, 군불 땐 방은 등짝이 따뜻하고!"

 

할아버지께서 말씀 끝에 뒤 따르는 나를 보며 묻는다.

 

"전 선생,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했지? 이렇게 수북이 낙엽이 쌓이도록 놔두는 걸 보면 너무 편한 세상이야. 지금 젊은 사람들한테 떨어진 낙엽을 긁어 밥하고 구들장을 데워 따뜻한 겨울을 났다고 하면 곧이들을까 싶어!"

 

이야기꽃을 피우며 오르는 산행이 그리 힘들지 않다. 숨이 가쁘면 바위에 걸터앉는다. 이마에 스치는 바람결이 신선하다.

 

"오늘 원 없이 낙엽을 밟았네!"

 

마니산 장군봉 정상이 코앞이다. 수십 번 오른 장군봉이지만 오늘도 새롭게 느껴진다.

 

정상 큰 바위에 미리 올라온 등산객들이 보인다. 카메라로 산 아래 펼쳐진 가을을 담아내느라 부산하다.

 

확 트인 시야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 같다. 들녘 쪽으로 눈으로 돌리자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이 드러난다. 야금야금 비어지더니 어느새 허허벌판이다. 참성단이 있는 정상 쪽 마니산은 온통 붉은 빛이다. 만산홍엽의 가을이 느껴진다. 바다 쪽엔 물 빠진 시원한 개펄이 펼쳐지고 그 너머 큰 섬, 작은 섬들이 형제처럼 모여 있다.

 

산에 오르면 처음 보는 사람들도 낯설지 않다. 인사를 나누고, 막걸리 한 잔을 나누는 데도 정이 오간다.

 

기분이 좋아진 등산객 한 분이 즐거움에 한 마디 한다.

 

"마니산 정상을 향해 고개를 쳐들면 산바람이, 바다로 팔을 벌리면 바닷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네요."

 

옆집아저씨도 맞장구를 친다.

 

"수북이 쌓인 낙엽을 원 없이 밟아본 산행의 묘미는 어떻고요!"


태그:#마니산, #가을산, #늦가을, #낙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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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마니산 밑동네 작은 농부로 살고 있습니다. 소박한 우리네 삶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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