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8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이 새롭게 조명되던 날이었습니다. 이날 민족문제연구소가 지난 8년간 작업해온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했다며 국민보고대회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 전대통령의 친일행적이 백일하에 드러나는게 싫었던지 그의 아들 박지만씨 등은 법원에 친일인명사전에서 박정희 부분은 배포해서는 안된다는 가처분신청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법원이 이 같은 가처분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서 박정희 친일논란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기도 했습니다.

어쨓든 이날 민족문제연구소는 당초 예정되어 있던 보고대회장이 대관이 취소되는 바람에 파행적으로 운영되다 백범 김구선생 묘역 앞에서 500여명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국민보고대회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좌측이 박정희-육영수 묘역, 우측이 김대중 묘역
 좌측이 박정희-육영수 묘역, 우측이 김대중 묘역
ⓒ 추광규

관련사진보기


동작 국립묘지, 김대중 전대통령 지지 카페회원들 추모행사

같은날(8일) 오후 2시였습니다. 이날은 다음카페에 개설되어 있는 '후광김대중마을'(카페지기 종아니)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신 후 처음으로 이 단체회원들의 추모행사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되었던 천둥번개를 동반한 굵은 빗줄기는 모임 예정시각인 오후 들어서는 비도 그치고 선선한 바람만 부는게 야외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던 추모행사가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게끔 되더군요.

당초 2시에 모이기로 했지만 몇몇 회원들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30분이 늦은 이날 오후 2시 30분경 동작동 국립묘지 만남의 광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이 있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입구에서 도보로 15분여 걸리는 거리에 있었습니다. 지난 10월 6일 제막식을 시작으로 묘역은 완전하게 그 단장을 끝마치고 추모객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인 관계로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다니고 있었고 김 전대통령 묘역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곤 했습니다.

 묘역 경비원이 들고 있던 방문객 숫자를 헤아리는 카운터
 묘역 경비원이 들고 있던 방문객 숫자를 헤아리는 카운터
ⓒ 추광규

관련사진보기

이날 열두시부터 묘역 경비를 서고 있던 국립묘지 관리소의 한 직원은 손에 들고 있던 카운터기를 보여주면서 약 600여 명쯤 다녀가지 않을까 예상하더군요.

많은때는 약 800여 명이 방문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추모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보수단체들의 묘역 훼손시도도 이제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추모객들은 연령대가 다양하더군요. 주로 가족단위 참배객들이 많았습니다.

자신에게는 할아버지인 고 최병집 중위의 묘역을 참배왔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에도 들렀다는 유다혜(고암중 1)학생은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내신 분이 묻혀 계신다고 해 들렀다"고 말했습니다.

흑석동에 거주하는 부모님과 함께 일요일 나들이를 나왔다가 묘역에 들렀다는 나산유(흑석초3) 학생은 "TV로 봤어요. 김대중 대통령님이 편히 잠들었으면 좋겠다"며 소박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후광김대중마을 회원들은 자신들 회원들 외에도 이날 가족단위로 참석한 일반추모객들과 함께 추모행사를 진행 했습니다. 또한 이들 회원들이 행사를 진행하던 중 정세현 전 통일부장관도 우연하게 마주쳐 함께 묵념을 올리는 등 참배순서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가운데 잡바를 입으신 분이 정세현 전통일부장관 입니다.
 가운데 잡바를 입으신 분이 정세현 전통일부장관 입니다.
ⓒ 추광규

관련사진보기


같은날(8일) 오후 동작동 국립묘지 박정희 묘역에는

동작동 국립묘지 방문은 이날까지 두번째 방문입니다. 그 첫번째 방문은 35년전인 1975년 무렵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다면서 초등학교에서 단체로 참배를 갔던 기억이 납니다. 

당시 기억으로 육여사 묘역은 높다란 산에 있었다는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김대중 전대통령 묘역 참배행사를 마친후 박정희 전대통령 묘역을 찾아가 보니 동작동 국립묘지 가장 안쪽 언덕 위에 안장되어 있더군요.

묘역의 위치는 척 보기에도 이곳 국립묘지에서 가장 좋은 자리인 듯했습니다. 도로가 바로 앞까지 이어져 있어 접근하기 가장 좋은 곳이고 국립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방문하지 않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목 좋은 곳에 묘역이 위치해 있는 듯했습니다. 이와 반해 김대중 전 대통령 묘역은 좁은 길을 따라 올라오다 우측편에 자리하고 있어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더군요.

어쨓든 이날 2시 이곳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불과 몇km 떨어져 있지 않은 효창공원에서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친일행적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었습니다. 그 시각 박정희 묘역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김대중 전대통령 묘역 참배객들보다 그 숫자가 많아 보였습니다. 한 참배객에게 오늘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을 발간 보고대회를 하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60대 남성은 저를 빤히 쳐다 보면서 되묻더군요.

"그래요? 그래 봤자 뭘할건데요. 경제를 살렸으면 되는 것 아닌가요?"

또 다른 사람에게 물었지만 그는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로 쳐다만 보고는 대답을 피했습니다. 아마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일행적이 논란거리로 등장한 것이 그리 달갑지 않은것 같았습니다.

 국립묘지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국립묘지에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 추광규

관련사진보기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에 묻힌 두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는 그 발자취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제하의 엄혹한 시기에 만주에서 그리고 목포에서, 또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의 이념갈등 속에서 살아남은 두 사람.

그후 한 사람은 빨갱이 때려잡는 반공투사로 각인되어 6,70년대 보릿고개에 시달리던 경제를 살렸다는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생애 내내 빨갱이로 내몰려야만 했고 IMF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풀어 다시 한번 경제 도약을 만들었던 대통령. 두 사람의 극과극을 달리는 사상의 괴리만큼 국립묘지 단풍이 무척이나 빨갛던게 묘하게 대비되는 하루였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세현#박정희#김대중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화물차는 굴러가는게 아니라 뛰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물론 화물칸도 없을 수 있습니다. <신문고 뉴스> 편집장 입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