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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세균 <정치 에너지>
정세균 <정치 에너지> ⓒ 후마니타스

정치세계는 천변만화가 일어나는 생물의 세계이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수도 없이 일어났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덧없는 일시성의 세계이기도 하고, 이념적 지형에 따라 대립과 타협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주기적 반복의 세계이기도 하다. 권력의 변동을 허용하는,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딛고 서있는 물화된 구조적 시공간이 있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법칙정립적인 현자들의 세계도 있다.

 

일시성의 세계는 생겨났다 사라지는 사건들이 먼지와 같기 때문에, 그리고 사건들에 대한 어떤 이해든 정확성을 확보하기가 어렵고 가치판단이 내포되기 때문에 종종 관찰자들을 자기 본위적인 허구에 빠지게 만든다. 현자들의 세계는 도덕적 정치 지향점을 내포하고 있으나 형이상학적이며 메타이론적 성격을 띠기 때문에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로 안내하곤 한다. 주기적 반복의 세계는 명백히 사회적으로 창출된 문제들, 특히 이념적인 공간의 구분을 의미하고 정치사의 특정한 국면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정치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준다. 구조적 시공간은 양적 및 질적 변화의 변증법적 발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 주며, 일시성의 세계, 주기적 반복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인식론적 토대가 된다.

 

정치세계를 이해하고 규정한다는 것은 구조적 시공간 속에서 주기적으로 되풀이 되는 이념적 지형의 변화들과 수시로 일어나는 사건들을 제대로 해석해내고, 그것들의 상향적 작용 및 반작용 과정 전체를 통찰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제1야당 대표 정세균이 <정치에너지>라는 책을 통해 현실 정치세계를 진단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우리 정치, 우리 민주주의에 대해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고 누구보다 깊은 책임감을 느껴야 할 사람이 자신이기에 성장과정에서부터 정치에 입문하게 된 동기, 입문하고 나서의 경험,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진솔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 진지한 성찰,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를 통해 밝은 정치세상을 열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정치에너지>는 개별 정치 현안들에 대한 정책이나 비전을 담은 여타 정치인들의 책들과는 달리, 현자들의 세계에서 사건들, 주기적ㆍ구조적 차원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용기있는 도전이다. 야당 대표가 구체적인 정책이나 비전이 아니라 정치적 신념을 담은 자전적 에세이 성격의 책을 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내용이 보수나 진보를 가리지 않고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신선하고 흥미롭다.

 

현실정치 비판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 소명, 정직한 사회, 약자들의 삶의 개선, 책임정치, 정당정치로 요약되는 <정치에너지>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대화와 타협'에 대한 확고한 민주적 신념을 바탕으로 정치 지도자와 현실정치를 비판한다. 정치와의 운명적인 조우, 직업으로서 정치를 택하게 된 이유, 현실정치에 참여하여 겪은 경험을 통해 "믿고 따를 지도자가 드문 시대가 되었다"는 정세균의 문제의식은 다른 모든 과학은 진보하고 있는데도 정치만은 그대로인 이유를 독선과 아집에서 찾았던 <바보들의 행진>의 저자 바버라 터치먼(Barbara Tuchman)을 떠올리게 한다.

 

현 정부 이명박 대통령의 비타협성, 절차의 무시, 조직을 선호하는 태도에 대한 비판은 정치를 모르는 지도자의 선택이 민주주의를 퇴보시킬 수 있다는 계고(稽考)를 담고 있다. 이 범주에서 바버라 터치먼의 '바보들', 즉 틀에 박힌 생각에 매달려 꾀와 재주를 부리는 부동적 지도자, 시련을 겁내고 사회나 조직의 통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인기에만 집착하는 지도자는 바른 정치 지도자가 아니며, 무능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고, 정체상태를 지속시켜 사회의 건전성을 훼손하는 지도자, 권력만을 추구하여 압박과 통제로 다수를 짓누르는 독재적 지도자는 퇴출되어야 할 대상이다.

 

지도자의 자리는 아무나 차지할 수도 없고 아무나 해서도 안되는 위치라는 것, 지도자가 되겠다고 뛰어드는 그 순간부터 헌신과 봉사와 고통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며, 맑고 투명한 영혼을 국민과 조직에게 송두리째 바치는 사람만이 진정한 지도자라 할까? <정치에너지>는 말이 앞서는 지도자, 권력에 연연하고 명성에 집착함으로써 죽음에 입 맞추는 실수를 저지르는 지도자 대신에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지도자, 권력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지도자, 정직한 지도자, 책임지는 지도자, 서민의 편에 서는 지도자를 옹호한다.

 

정세균은 현 정권의 독단의 정치를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당장 필요한 것은 대화와 타협의 정치이다. <정치에너지>에는 대화와 타협이 실종된 정치는 없다. 정치인은 정책을 주고받으며 옳고 그름을 다투어야 하고, 다수결의 원칙은 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고 뜻대로 결정하는 쪽수 정치를 하라는 말이 아니다. 대의제이므로 다수가 항상 선이라고 생각하는 논리, 다수결 원칙에 따라 법들을 통과시키고 4년 후에 심판을 받으면 된다는 현 정권의 논리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부정하겠다는 자백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사회의 상식인 줄 알았던 민주주의와 다양성, 표현의 자유, 집회ㆍ결사의 자유 등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커다란 위기에 봉착했다고 생각한다. 언론악법이 통과되어 언론이 권력과 기득권에 포위당하면 여론의 다양성과 민주적 평등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정세균은 이런 후진적 정치를 "정치제도와 일상적인 정치적 실천을 통해서 느리지만 단단한 변화를 도모하는 정치가"가 되어 격한 용어를 쓰지 않는 부드러움의 정치로 개선해 나가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민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정치가 목표가 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대화와 타협의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보세력의 비타협성도 비판한다. "눈감고 추상적 이념에만 몰두하는 일부 진보파의 주장을 볼 때마다 책임성의 결핍을 느낀다." "우리는 더 진보적이고, 더 민주적이고, 더 서민적이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진보가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진보 정치의 길을 걸어야 한다. 목표만 알고 방법을 모른다면 변화는 요원하다."

 

"우리는 맞서 싸워야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현 정권이 국민과 동떨어져 있는데, 우리도 그들과 붙어서 싸우고만 있으면 누가 국민들을 대표해 준단 말인가. 국민들의 눈높이에 맞는, 국민들이 진정 원하는 대안을 마련하고 대안이 되는 데에 우리의 목표가 있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서로의 자세가 달라지는 과정을 만들어 낼 수 없다면, 정치는 존재이유를 잃고 말 것이다. 상대를 절멸시키려는 것이면 전쟁을 해야지 정치로는 풀 수 없는 것이다."

 

포용의 리더십, 생산적 정치의 필요성

 

<정치에너지>는 아무도 억압하지 않으며 지적인 게임을 벌이지도 않는 정치, 잘못된 일은 지적하기는 하나 공격하지 않으며 기만하지 않는 정치, 수단과 방법을 가려 목적달성을 추구하며 위협을 통치수단으로 사용하지 않는 정치,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사소한 문제에 목숨 걸지도 않는 정치, 권력을 남용하지도 권력에 의존하지도 않는 정치, 형식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으며 권위로 부드럽게 다스리는 정치, 생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정치를 제시한다. 포용의 리더십을 통해 새로운 정치를 열어가야 한다는 것이고, 정세균 스스로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고 천명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을 거둬내고 희망의 빛을 비춰 줄 에너지는 정치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치가 국민들의 밥이 되고 꿈이 되고, 한국 사회를 밝힐 에너지원이 되게 하려니, 나는 할 일이 많은 정치가가 되었다." "포용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민주당의 가치에 동의하는 세력을 넓게 아우르고 싶다. 변화를 희구하는 정치적 열정이 메아리 없는 아우성에 머물지 않고 정치의 장에서 발휘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서로 차이를 드러내고 경쟁하되 힘을 모아 이룰 수 있는 변화에 대한 비전이 커다랗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변화를 도모하는 정치적 상상력과 재능이 제각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뒷받침할 것이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순진한 생각이고, 과정의 정치를 중시하는 자유주의자나 전통적 가치관에 젖은 보수주의자의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날카로운 진보주의자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이야기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이라는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지향해 나가야 할 현자들의 정치세계를 열고, 그에 기초해서 현실 정치세계를 비판적으로 파헤치는 그런 방법의 선택이 자연스럽게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문제들, 구조적 차원의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는 점에서 행간에 숨겨진 내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치에너지>는 목표를 분명하게 제시한다. "기회와 가능성을 소중히 여기는 자세야 말로 정치에서 으뜸이 되는 덕목이다." "피땀으로 이룬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자랑이고, 희망이 되도록 만드는 일이 내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리로 나온 시민들이 꿈꿨던 사회를 이루는 일이다. 자유의 질서, 행복과 돌봄, 번영과 정의가 어우러진 나라로 만드는 일이다. 사람들이 먹고살 걱정을 덜고, 인간적 품위를 지키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말이다."

 

인식론적ㆍ방법론적 지평의 확대 그리고 해결해야 할 과제들

 

정세균은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가 바로 정치이며, 비록 많은 국민들이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변화를 이끄는 에너지로서의 정치를 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고, 우리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는 연대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권을 내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으로서 근본적인 문제를 고민했을 것이고, 그 실마리를 <정치에너지>에 담았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정치에너지>는 완결판이 아니라 정상성을 회복하는가의 여부가 관건이라는 사실, 그래서 그것의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기에 앞서 지금은 그것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문제제기이고, 인식론적ㆍ방법론적 지평을 확대하자는 요청이자 제안으로 보인다. 즉, 우리의 정치를 '의미 있는 객관성'의 방향으로 밀고 나가자는 호소이고, 모든 정치현상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우리의 이론적 모델 속에 있는 주관적 요소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져야 한다는 요청이며, 제대로 된 정치인들의 충원,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 합법적인 행위라는 차원에서 내포성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겠다는 선언이다.

 

구조를 포함해 정치 제반 현상이 의문시되고 그것을 대체하는 대안적인 정치를 모색해야 하는 시점에서 시의적절하고 혁신적인 제안이고,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요청에 대한 가능성의 영역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기저에 깔려 있는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새로운 분석방법 나아가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창출과 관련한 과제를 달성해낼 가능성이 있는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고려해야 할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각종 영역주의를 타파하여 새로운 정치를 여는 총체적 접근을 시도할 수 있는가이다. <정치에너지>에서는 "지역을 넘어서는 새로운 연합"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연대 이상이어야 한다. 내부에 인위적으로 구획된 경계를 허물어트림으로써 내부의 대화를 촉진하고 열린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 신입생들에게 정치현상의 다양성과 삼투성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혀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외부 세력과의 대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내부에서의 대화가 중요하다. <정치에너지>에서 내부의 대화에 대한 얘기는 많지 않다. 후속판을 위해 남겨두었을 것이란 추측은 들지만 지나치게 절제함으로써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했다.

 

둘째, 우리의 정치 역사와의 교류와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의 근대 정치사는 부침의 역사였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승만 정부는 무지와 가난, 이념과 군정의 혼란으로부터 반쪽 자유민주주의 나라를 세웠지만, 상식을 뛰어넘은 사사오입 같은 부정부패와 권력남용을 저질렀다. 유신정권은 국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했지만, 전대미문의 유신헌법과 독선의 정치로 부하에게 저격당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군정 대통령 두 사람은 문을 활짝 열어 세계 속의 한국을 만들었지만 곳간을 바닥내고 사리사욕만 채우다 철창신세를 졌다. 문민정부는 최초로 문민시대를 열었으나 무지와 편견의 정치로 국가를 도산시켰다. 국민의 정부는 잃어버렸던 밥통은 찾았으나 날씨가 덥거나 춥거나 웃통 벗어 햇볕정책을 고집하다 좌파와 우파라는 사회적 분열상을 심화시켰다. 참여정부는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문화 시대를 열었으나 조력자들에 대한 고마움에 집착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현 정권은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퇴각시키고 있고 평등의 개선없이 자유를 제한시키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고, <정치에너지>도 비판자 중의 하나이다.

 

우리의 정치가 진보해 왔는지 퇴보해 왔는지를 가늠하는 잣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자산이며, 이런 지난 역사적 자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현실정치에 대한 심층적 분석을 보다 심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명박 정권이 정상성으로부터 이탈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역사를 등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치가 '역사적 정치'로 재정립되지 않고는 대안부재의 해소는 요원하다.

 

셋째, 제도적 차원의 연계 작업을 병행할 수 있는가이다. 여러 이념들 기저에 깔려 있는 쟁점들을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여기에 더하여 지적 해명과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의 보다 완전한 재구축을 향한 유용한 방법들로서 제도적 개선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치세력들을 아우를 수 있는 제도의 확대, 통합정책의 입안, 공동작업의 확대 등이 그것이다. 세력 간 이해관계의 단순한 합이 되어서는 안된다. 기능적으로 연결되어 상호 작용하는 조직들, 계층, 지역, 이념 모두를 포괄해야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전체와 부분의 총체성 측면에서 합일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정치에너지>에는 이 세 가지 과제에 대한 내용이 없다. 독자들의 몫으로 남겼든 후속판에 담을 계획이었든, 이 조건들이 우리의 정치를 국민들이 원하는 정치로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시급히 달성해야 할 과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정세균은 <정치에너지>를 통해 인식론적ㆍ방법론적 지평의 확대를 요청했고, 자청하여 정치 지도자로서의 성공과 실패를 가름하는 시험대에 올라섰다. 흘러가는 강물과도 같은 인기에 연연하는 지도자가 될 것인지, 결단이 필요할 때 위험부담을 떠안고 결단하는 지도자, 추구하는 가치가 일관된 지도자, 시대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는 지도자, 대의를 좇는 지도자가 될 것인지는 이제부터 할 일들의 성과에 달려 있다. 많은 내용들, 특히 의미있는 결실들이 담긴 후속판을 기대해 본다.


정치 에너지 2.0 - 개정판

정세균 지음, 후마니타스(2011)


#정치에너지#현실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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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을 전공했고, 사회과학 관련 책과 산악 관련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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