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자동차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안전성이다. 특히 최근 강화되고 있는 각국의 자동차 안전 관련 규제는 탑승자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당장 유럽의 경우 2010년부터 보행자 안전 시스템이 의무화된다. 제조 차량의 70%를 해외로 수출하고 있는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들에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셈이다.
게다가 최근 국내 시장에 진출하고 있는 수입 신차들은 '팝업 보닛' 등 보행자 안전을 위한 다양한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현대기아차 등 국내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보행자 안전 장치를 개발 중이지만, 볼보·BMW 등 수입차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소비자 처지에서는 탑승자 뿐 아니라 보행자 안전도 신차 선택에서 중요한 요소가 될 전망이다.
'탑승자 안전'에서 '보행자 안전'으로 변화전 세계적으로 해마다 120만 명이 자동차 사고로 죽고, 1000만 명이 다친다. 이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보행자다. 그럼에도 그동안 자동차의 안전장치는 탑승자 위주였다. 안전벨트, 프리텐셔너(pre-tensioners), 에어백 등이 대표적이다. 모두 탑승자의 위치가 예측 가능하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조치다.
반면 보행자의 위치는 예측하기 어렵다. 다양한 부분에서 다양한 형태의 충돌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사고 시 보행자를 보호하기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최근 교통안전 연구의 초점은 보행자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에 맞춰져 변화하고 있다. 보행자를 위한 안전 장치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기능과 사고 후에 상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기능으로 나뉜다.
자동차 안전의 대명사로 불리는 볼보의 '보행자 안전 1단계'는 교통사고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예방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 몇 년간 볼보는 운전자의 집중력을 높이는 일련의 신기술을 개발해왔다.
휴대폰으로 걸려오는 전화나 메시지 수신 등을 보류시키는 지능형 운전자 정보시스템(Intelligent Driver Information System), 코너를 돌 때 커브를 따라 비추는 액티브 바이제논 라이트(Active Bi-Xenon Lights), 운전자의 음주 상태를 측정해 음주운전을 사전에 방지하는 알코가드(Alcoguard) 등이 대표적이다. 볼보를 비롯해 다른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운전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발행할 수 있는 사고를 막기 위해 차선이탈 경고시스템(Lane Departure Warning), 운전자 경보 시스템(Driver Alert Control) 등을 장착하고 있다.
운전자가 스스로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경우를 대비한 안전 기술도 개발했다. 이른바 세계 최초의 '알아서 서는 자동차'를 개발한 볼보는 올해 S60 콘셉트카에서 충돌경고 및 자동제어시스템(CWFAB: Collision Warning with Full Auto Brake)과 보행자 감지 기능을 선보였다. 차의 진행범위에 들어오는 보행자를 감지해 만일 운전자가 미처 반응하지 못하면 자동으로 브레이크를 작동시켜주는 안전장치다.
BMW, 메르세데스 벤츠, 혼다 등은 차량 앞부분에 설치되어 있는 원적외선 카메라를 이용, 전방 300m까지 열을 방출하는 사람이나 동물 또는 장애물을 포착해 실내 모니터에 보여주는 나이트 비전(Night Vision)을 장착했다. 운전자는 어두운 밤에도 대낮처럼 훤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육안으로 인식이 불가능한 잠재된 위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고급 차량에만 장착되는 등 보급률이 낮은 편이다.
운전자의 눈에 보이지 않는 '사각 감시 시스템'도 있다. 국내 소비자들에게는 기아차의 '뉴 오피러스' TV 광고로 익숙한 장치다. 차량 전방의 좌우사각 지대와 후방에 소형 카메라를 장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곳의 모습을 운전석 앞쪽 모니터에 표시해 주기 때문에 운전자의 사각지대에 위치해 있는 아동, 노약자, 장애인 등 보행약자들의 안전을 지켜준다. 현대차에서는 그랜저, 에쿠스 등에 적용됐다.
최근 BMW는 관련업체,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보행자를 보호할 새로운 첨단장비 'Car-2 X커뮤니케이션'을 개발했다. 보행자가 가진 송수신기의 전파를 차량의 레이더가 감지해 운전자에게 알려줘 보행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보행자용 송수신기는 초소형으로 만들어져 가방이나 휴대전화, 지갑 등 소지품에 부착이 가능하다.
보행자 충돌 시 상해 최소화가 관건보행자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보행자의 상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미국 교통국에 따르면 보행자가 부상을 입거나 사망하는 원인의 70% 이상이 정면충돌 때문이다.
일단 보행자가 자동차와 정면충돌하게 되면 0.03초 만에 무릎 아래 다리가 꺾이고 0.23초 뒤에는 온 몸, 특히 머리가 자동차의 엔진룸 덮개인 보닛과 앞 유리에 충돌한다. 뇌진탕 등 보행자가 입는 중상의 80%가 머리에 집중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동차 보닛 자체는 얇은 판금이어서 충격이 크지 않지만, 그 아래 있는 엔진이 문제다. GM대우 등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보행자의 머리가 보닛에 부딪혔을 때 엔진 및 엔진룸 일부로부터 충격을 받지 않도록, 보닛과 엔진룸 간의 공간을 일정간격 이상 유지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보행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을 모두 흡수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포드, 재규어, 혼다 등은 차량이 보행자와 충돌 시 스프링의 장력 또는 가스식 인젝터에 의해 상단 또는 후면으로 보닛을 젖혀 보행자의 머리와 어깨부분에 가해지는 충격을 감소시키는 이른바 '팝업 보닛'을 장착했다. 재규어 뉴XK는 보행자와 부딪쳤을 때 18kg의 보닛이 0.03초 내에 17cm까지 들어 올려진다.
충돌 시 보닛이 올라가면 엔진과 보닛 사이의 공간이 훨씬 커지는 것은 물론, 보행자의 머리가 자동차 앞 유리에 부딪히는 것도 막을 수 있다. 특히 들어 올려진 보닛과 앞 유리 사이에 에어백을 터뜨려 보행자에게 가해지는 충격을 더욱 감소시키는 장치도 개발 중이다. 이 장치는 도요타가 개발 중인 '고등안전차량(ASV)' 등에 도입될 전망이다.
현대·기아차에 에어백을 공급하고 있는 현대모비스측도 "탑승객을 보호한다는 에어백의 기존 개념을 뛰어넘어, 충돌 시 보행자도 보호할 수 있는 '보행자 보호에어백' 선행기술 개발도 활발히 진행 중에 있다"고 밝혔다.
팝업 보닛이나 보행자용 에어백만큼의 효과는 아니지만, 보행자의 하체를 보호하기 위한 범퍼의 재질이나 형태도 상당히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범퍼의 재질에 따라 보행자의 부상 정도가 몇 십 배 이상 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포드는 범퍼를 복합밀도 재질과 언더 트레이 형태로 설계해 충돌강도를 줄여주고, 보행자의 발을 지지해 발 또는 발목 부상의 위험을 감소시켰다. 또한 변형 가능한 하우징을 사용한 헤드램프는 충돌 시 차체로 밀려들어가도록 설계되어 깨진 유리 파편이 보행자 다리에 박히는 것을 방지한다.
볼보도 범퍼 앞에 알맞은 비율로 제작된 부드러운 구조물을 포함, 충돌 에너지를 흡수하는 여러 가지 기능을 장착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 차량보다 다소 높은 곳에 보닛이 위치해, 보닛 아래에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하중을 분산시키는 벌집 모양의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
현대차도 신형 쏘나타에 '후드(보닛)인너 스틸 멀티콘'이라는 보행자 상해 저감 기술을 적용했다. 보닛에 멀티콘 형상을 지닌 인너골절을 적용, 보행자와 충돌이 있을 경우 충격에너지를 흡수해 보행자의 상해를 최소화한다.
GE플라스틱과 현대차가 공동 개발해, 지난 2007년 첫 선을 보인 콘셉트카 카르막(HED-4)에는 일래스틱 프론트(Elastic Front)가 적용됐다. 일래스틱 프론트는 3중 에너지 흡수구조로 만들어져 보행자와의 충돌 시 보행자의 심각한 상해를 획기적으로 감소시키기 위한 기술이다.
GM대우는 보행자의 하체를 보호하기 위해 범퍼와 임팩트빔 간에 일정 간격을 띄워 충격 에너지를 낮췄다. 이 밖에 접히는 엠블렘, 2중 범퍼 사용금지 등도 보행자 안전을 위한 조치이다.
보행자 안전 평가, 대부분의 차량 '미흡' 평가자동차 충돌시험 등을 통해 자동차 안전성을 평가하고 있는 국토해양부는 지난 2006년부터 보행자 안전성 평가 항목을 추가했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실시한 보행자 안전성 평가에서 대부분의 차량은 보행자 보호 기능이 상당히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보행자 안전성 평가는 어른과 아이의 머리·다리 모형을 각각 시속 40km의 속도로 평가차량에 충돌시켜 그 결과로 발생하는 상해 정도를 별(★)의 개수(1~5개)로 나타낸다. 별 개수가 많을수록 안전성이 높은 것인데, 당시 실험 결과 현대차 i30, 르노삼성차 QM5, 혼다 CR-V는 별 3개로 평가됐고, 기아차 모닝ㆍ모하비, 현대차 제네시스는 별 2개, BMW 528i와 쌍용차 액티언은 별 1개로 각각 평가됐다.
앞서 국토해양부는 지난해 8월 '자동차안전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 했다. 자동차 개발단계부터 보행자 안전을 고려하도록 하기 위해 자동차 안전 기준에 보행자 보호 기준을 도입하는 것이 골자다. 하지만 보행자보호 안전기준은 2013년부터 적용된다.
반면 유럽의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자발적인 협약을 맺고 2010년 이후 도입되는 차량은 '유럽 자동차 안전성 강화 위원회(EEVC)'의 보행자안전 요구사항을 준수하기로 했다. 일본도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충격완화 보닛을 의무 사용토록 하는 법안을 추진 중이다. 앞으로 보행자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자동차는 유럽이나 일본 등에 수출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필수 대림대(자동차학) 교수는 "유럽, 일본 등은 내년부터 주간 주행등이 의무화 되는 등 빠르게 보행자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는데, 국내는 아직 법규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현대·기아차도 국내 85% 점유율을 가지고 있지만, 생산차 4대 중 3대를 수출하는 기업으로서 세계적인 흐름에 민감해야 한다"며 "(보행자 안전 기술과 관련) 빨리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영영 뒤처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와 관련, 현대·기아차측은 "유럽 수출용 사양에 대해 유럽 법규 대응을 위한 보행자 보호시스템을 적용 중"이라며 "베르나와 프라이드에 보행자 보호 설계 개념을 도입, 2005년부터 적용하고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