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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용왕의 도움으로 지상에 환생하고 있다. 국립창극단 심청전의 한 장면
심청이 인당수에 빠져 옥황상제의 명을 받은 용왕의 도움으로 지상에 환생하고 있다. 국립창극단 심청전의 한 장면 ⓒ 국립창극단

예전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었지만(읽으시려면 클릭) 그 주제에 대해 한 번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최근 가까운 친구와 한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동화이며 학교에서도 배우고 있는 심청전에 대해 얘길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청전의 주요 포인트는 한국 문화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개념인 '효'로, 이에 따르면 아이들은 부모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의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이미 자신은 어떻게 행동하든지 간에 자식에게 있어서는 자신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부모들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이 이야기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아마도 한국인이 아니거나 한국 밖에서 자란 사람들) 대강의 줄거리를 말하면 이렇다.

효녀심청은 장님이라서 걸인으로 살아야 하는 홀아비 아버지 아래에서 태어났다. 불교 승려가 상당한 양의 기부를 하면 아버지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단 이야기를 듣고 심청은 인간 재물로 바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매매한다.

그 뒤 처형 날까지 남은 날들을 아버지 걱정을 하고, 집의 이모저모를 수리하고, 밤낮으로 아버지를 위한 새옷을 만들며 보낸다. 그러는 동안 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고 그 일은 비밀에 부친다. 희생의 날 아버지에게 진실을 밝히자 아버지는 슬퍼하며 울지만 딸을 붙잡기 위해 그다지 노력하지는 않는다.

아이가 바다로 뛰어들었을 때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동한 용왕이 환대를 하여 심청을 연꽃 위에 놓고 바다 위로 띄워보낸다. 그리고 그녀를 발견한 왕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이런 예기치 못한 행운에도 심청은 아버지 걱정 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국의 맹인들을 계속 초대해서 결국 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그러자 기적적으로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눈을 뜨게 된다.

심청에게 '효'외에 다른 감정은 없나?

처음 이 얘길 들었을 때 나는 사실 소름이 끼쳤다. 특히 대부분 한국인들이 이 얘기가 어린이들에게 아주 고결하고 교육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그랬다. 인간을 산재물로 바치는 것을 한마디 비판 없이 미화하고 있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더 도착적으로 느껴진 것은 한국에서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의 근본적인 메시지였다.

역시 그리 좋다고 생각될 것이 없는 서양의 동화들은 보통 가난한 소녀가 왕자와 결혼하거나(신데렐라), 겉모습 말고 그 속의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라는 얘기(미녀와 야수), 혹은 낯선 사람에게서 사탕을 받지 말라(헨젤과 그레텔)는 얘기 등을 다루지만, 부모를 위해 자식에게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야기는 하나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심청은 아버지를 기쁘게 하려는 욕망 외에 다른 감정은 없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자신의 인생도 아버지를 섬기는 데 쓰는 것외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그녀는 단순히 부모의 소유물로만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끝까지 그렇게 이용되는 것도 괜찮아 보일지 모른다.

그것은 이 이야기가 아이들을 즐겁게 하거나 삶의 어려움에 대해 용기를 주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란 증거다. 대신 이 이야기는 아이들의 사고 방식을 조작하여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만들고, 삶의 목적은 자신보다 부모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오랫동안 가르치면서 많은 한국 부모들은 이런 희생을 평범하게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기대하는 심정을 배워오게 된다.

그럼 처음 언급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효에 대대 "아이들이 부모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느낌"이라고 한 내 정의는 좀 모자란 것 같다. 심청의 아버지는 분명 심청에게 희생하라고 명령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보다 이 부자연스럽고, 여기서는 자기 파괴적이 된 행동의 근본은 죄책감에 있다 (사랑은 전혀 관계 없는 감정이고, 공포도 답은 아니라 죄책감에 제일 가깝다). 마치 한국의 아이들은 부모가 생명이란 선물을 준 데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배우게 되는 것과 같다. 어쩐지 웃기는 얘기 아닌가. 선물이란 정의상 공짜인데 그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면 선물이 아니라 구매에 가깝지 않은지.

하지만 아이들이 자기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모의 선택에 의해 태어났다는 점을 보면 아이가 자신의 생을 구매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지지 않는가? 거기서 사실 선택을 하는 것이 부모라면, 아이를 갖기로 결정하는 순간 그에 따르는 모든 의무들을 감당하기로 결정했다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여기에는 출산의 육체적 고통과 경제적으로는 음식, 집을 제공하고, 아이의 정서적 안녕까지 보살피는 의무들이 모두 포함된다.

나에게는 매우 당연한 얘기로 들린다. 또한 제대로 사랑받고 대우받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본질적인 사랑과 애정을 갖게 되리란 것도 매우 당연하다. 사랑받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들이 머릿속에 이유없는 기대들만 키우는 우스꽝스런 얘기들을 주입시키지 않아도 최선을 다하게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또 다른 얘기이지만, 아이의 머릿속에 계속 주입시켜 아이가 꾸지람이나 체벌을 피하기 위해 복종하게 만들기보다는, 그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부모님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느낀다면 그게 더 고결한 것 아닐까?

덧붙이는 글 | 마티아스 슈페히트 기자는 독일에서 태어나 10여 년 전 첫 방한한 후 거의 매년 한국을 방문하다 2006년 서울로 이주했다. 독일 유러피안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영학 학위를 2008년엔 연세대에서 MBA를 취득했다. 그 후 서울에서 '스텔렌스 인터내셔널(www.stelence.co.kr)'을 설립하여 수출입 사업에 종사중이다. 최근 한국에서의 경험을 쓰기 시작한 개인 블로그는 http://underneaththewater.tistory.com/이다.



#효#심청#효녀#부모#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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