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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쓰이는 인터넷 용어로 가장 '흥하는 떡밥(누리꾼들의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는 민감한 주제를 가리키는 용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키 떡밥'이다. 키 작은 남자, 이른바 호빗남은 살인자보다 나쁘다는 인터넷 투표 결과가 캡처돼 돌아다니는 세상. 키 작은 게 '죄'가 되는 세상. 다소 웃기지만 황당하며 씁쓸하기도 한 이 모습들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한 단면이다.

 

지난 9일 방송된 KBS <미녀들의 수다>(이하 <미수다>)에 우리나라 여대생들이 나왔다. '미녀, 여대생을 만나다'라는 타이틀로 시작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묻는다는 질문이 '나는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다!'라니…. 질문의 수준에서부터 숨이 턱 하고 막힌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이번주 <미수다>는 방송에 대해 최소한의 '고민'조차 하지 않은 제작진이 얼마나 방송을 처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그 끝을 보여준 방송이었다.

 

질문이 이 모양이라도 좀 제대로 된 대답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출연한 우리 여대생들. 거침없이 당당했다. 한 여대생의 입에서 "외모가 중요해진 세상에서 키는 경쟁력이다"는 대답이 나왔다. 여기까진 들어줄만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래서 키 작은 남자는 루저(loser:패배자)라고 생각한다"는 표현에, 그녀 앞에 앉아있던 게스트도, 미녀들도, 그리고 시청자들도 할 말을 잃었다.

 

'루저' 비판과 희화화가 넘쳐나는 인터넷

 

방송이 끝나고 며칠 동안, 예상대로 루저 발언을 한 여대생, 소위 홍대녀는 그야말로 누리꾼들로부터 융단폭격을 맞았다. 미니홈피부터 시작해서 고교 졸업사진, 심지어 과거에 그녀가 인터넷에서 썼던 사소한 글귀까지 모든 게 까발려져 인터넷에 뿌려졌다. 네티즌들은 포탈 사이트로도 모자라 그녀의 학교 게시판, 학과 교수들의 이메일 등을 통해 그녀를 학교에서 제적시키라며 분노를 표출했다.

 

화를 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재미있다고 웃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금 인터넷엔 루저 패러디가 넘쳐난다. 키가 작았던 역사 속 인물들을 희화화하거나, 할리우드 스타 혹은 유명 스포츠 선수들을 총 망라해 키가 작은 사람들에게 '루저' 타이틀을 붙이는 일도 유행처럼 번졌다. 인터넷 쇼핑몰에선 루저들을 위한 신발 깔창을 팔고 있고, 신문기사 제목에도 루저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의 반응이 이처럼 뜨겁고 격해지자 다른 한 쪽에선 역시나 '마녀사냥'을 들고 나와 누리꾼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적 행태를 지적하고 나섰다.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이 TV에 출연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너무 심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이번 일을 통해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외모 지상주의를 꼬집으며 키 발언에만 욱하지 말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충고성 발언도 등장했다.

 

누구의 잘못이고 무엇이 문제인가?

 

일차적 책임은 홍대녀에게 있다. 키가 작은 대다수의 남성을 순식간에 패배자, 낙오자로 낙인 찍어버린 홍대녀의 루저 발언은 엄연한 폭력이었다. 주먹을 쥐고 얼굴을 때려야만 폭력인가? 말로써 상대방을 모욕하고 불쾌감을 주는 행위도 하나의 폭력이다.

 

갈수록 심해져가는 우리 사회의 외모 지상주의도 배제할 순 없겠다. 여자에게 키 떡밥이 있다면 남자에겐 외모 떡밥이 있지 않은가. 인터넷을 돌아다니다보면 호빗남 타령 못지않게 볼 수 있는 게 바로 오크녀 타령이다. 판타지 세상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인터넷에선 호빗남과 오크녀가 넘쳐난다. 차이라면, 최첨단 의학 기술의 힘을 빌려 개선의 여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점일 뿐, 본질적으로 둘은 같은 의미다.

 

다소 인물이 떨어져도 키가 크면 못해도 훈남이 되는 세상. 반대로 키 작으면 장동건급 미남이 와도 호빗남이라 싫다는 세상. 풍만한 가슴에 잘록한 허리, 매끈한 힙라인으로 이어지는 S라인에 열광하고 V라인까지 강조하는 세상. 가슴이 작으면 절벽녀로 불리며 무시당하고 얼굴 못생기면 오크 취급받는 세상. 알게 모르게 외모에 신경 쓰고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가는 대중에게 어느 날 메가톤급 핵주먹을 날린 우리의 홍대녀.

 

그래서 아주 가끔이지만, 홍대녀가 안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로, 키 작은 남자 선호하는 여자가 어디 그리 많겠으며, 못생긴 여자 좋아하는 남자가 어디 그리 흔하겠는가.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라면서 보고 들은 게 그것뿐인데, 홍대녀 만의 잘못이라고 하며 뒤로 슬쩍 빠져나가기엔 낯 뜨거워지는 게 사실이다. 단지 홍대녀와 나의 차이가 있다면, 키 작다고 루저라고 말하지 않은 것 정도일까.

 

그러나 그냥 싫어하는 남자에서 졸지에 패배자가 되어 버린 대한민국의 숱한 키 작은 남자들의 분노 또한 정당치 못하다고 비난받을 까닭은 없다. 단지 그 분노의 표현 수위에 대하여 지나치다거나 과하다는 논쟁은 있을 수 있으되, 분노의 표출 자체가 부당하다고 폄하 받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인터넷 시대의 또 다른 공개처형 논란. 이 문제는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앞으로 꾸준히 논의해야 할 일이다.

 

유통기한 지난 <미수다> 그만 버리자

 

마지막으로 이번 사건에서 홍대녀의 뒤에 숨어 조용히 비난의 집중 포화를 피해간 <미수다>와 그 제작진에겐 존경과는 다른 의미의 박수를 쳐주고 싶다. 그렇게, 시청률이 궁하셨쎄요? 하기야 그들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화요일 밤의 맹주였던 <긴급출동 SOS 24>가 이사 오는 바람에 그렇잖아도 밀리던 시청률, 확실하게 꼴찌로 자리 잡았지, 소재 떨어져가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편집하기는커녕 굵은 글씨로 'loser' 자막을 친절하게 깔아 주는 센스를 보여준 제작진. 의도했건 안 했건 어쨌거나 그동안 무관심에 가까웠던 대중의 이목을 <미수다>로 쏠리게 하는 데는 대성공했다. 그러나 동시에 <미수다>가 가진 한계를 고스란히 노출한, 제작진이 방송과 자막의 힘을 빌어 '우린 이 정도 수준밖에 안 됩니다'라고 전국민 앞에 고백한 웃지 못 할 사건이었다.

 

대본이다 아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강요하지 않았다면 잘못이 없는가? 중요한 건 뻔히 논란이 될 줄 알면서도 방송에 그대로 내보냈다는 사실이다. 키 작은 남자와 사귈 수 있느냐, 데이트 비용은 남자가 내는 게 매너 아니냐 따위의 수준 이하의 것들을 질문으로 던져놓고서는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발뺌하는 <미수다> 제작진의 사과문에 누리꾼들이 냉담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젠 정말 그만할 때가 온 것 같다. 한 소리 또 하고 또 하고, 그게 벌써 3년째다. 글로벌 시대에 각국 미녀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보자며 시작한 <미수다>의 기획 의도는 이제 그 수명이 다해, 어느 샌가 가십과 8등신 미녀들만 남아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청자도 이제 지쳤다. 사골을 우리면 진한 맛이라도 나지, 유통기한 지난 음식은, 아까워하지 말고 버리는 게 몸에 이롭다.


태그:#미수다, #호빗남, #루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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