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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절 당일 황제묘 앞에서 참배객을 위해 나팔 부는 황링의 한 주민.
 청명절 당일 황제묘 앞에서 참배객을 위해 나팔 부는 황링의 한 주민.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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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릉의 헌원묘 감실 안에 모셔져 있는 황제 석상.
 황제릉의 헌원묘 감실 안에 모셔져 있는 황제 석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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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4월 5일은 중국 전통 명절인 청명절(淸明節)이다. 청명절에 중국인들은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고 종이돈을 태우는 풍습이 있다.

중국을 대표하는 명절 중 하나였지만, 청명절은 오랫동안 잊혔었다.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래 중국은 청명절을 국가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았다. 청명절 풍습도 미신이라 여겨 한동안 성묘조차 철저히 금지했다.

이런 청명절이 되살아 난 것은 지난 2008년이다. 중국정부는 청명절, 단오(端午), 중추절(中秋節)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전통 명절과 풍습의 의의를 되살리고 이를 줄곧 지켜온 대만, 홍콩, 마카오 주민과 해외 화교를 아우르려는 의도였다.

중국 각지의 청명절 행사 중 가장 성대한 것은 단연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황링(黃陵)현 황제릉에서 거행되는 공제(公祭)다. 황제릉 공제는 '중국인의 시조'라 불리는 황제에 대한 제사 의식이다.

청명절 공제가 열리는 날이면 거대한 황제릉은 참배객으로 들끓는다. 중국 각지에서 온 사람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려든 화교로 발 딛을 틈이 없다. 황제릉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각종 플래카드로 나부낀다.

"황제는 영원히 변치 않는 중화민족의 시조(始祖)다" "황제의 혼과 정신을 받들어 민족혼을 불러일으키자"…. 공제가 중화민족의 단결과 부활을 고취시키는 한마당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공제 행사 내용은 이런 정치적 색깔이 더욱 짙게 표출한다. 중국 중앙 및 지방정부의 당․정․군 지도자들이 참석한 채 거행되는데, 행사 시작 시 도우미들이 56개의 누런 깃발을 먼저 들고 입장한다. 황색은 중국을, 깃발은 56개 민족이 하나로 단결하자는 뜻을 담고 있다.

제사 도중에 황제의 혼령을 부르기 위한 초혼(招魂)으로 북을 34번 친다. 이는 대만을 포함해 홍콩, 마카오와 중국 31개 성·시·구를 황제의 이름 아래 묶겠다는 의도다.

거대하게 성역화 된 황제릉 광장. 시안시에서 한참 떨어진 위치임에도, 1년 내내 황제를 찾아 제사 지내기 위한 중국인으로 붐빈다.
 거대하게 성역화 된 황제릉 광장. 시안시에서 한참 떨어진 위치임에도, 1년 내내 황제를 찾아 제사 지내기 위한 중국인으로 붐빈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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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묘 앞에 서 있는 측백나무인 괘갑백. 전설에 따르면 황제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헌원묘 앞에 서 있는 측백나무인 괘갑백. 전설에 따르면 황제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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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중국 상고시대 전설에 나오는 3황5제(三皇五帝)의 한 명이다. 중국은 이들이 다스린 시기를 원시시대에서 문명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라 여기고 있다.

3황5제 중 황제의 존재는 단연 으뜸이다. 중국인은 황제가 오늘날 한자의 기초가 되는 문자를 창조해 문명사회를 열었다고 믿고 있다. 방직기술을 개발하고 마차를 발명했으며 처음으로 화살을 사용한 것도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황제는 서북 지방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부락민들의 수령이 되어 중원에 진출했고, 염제(炎帝)와 연합해 치우(蚩尤)를 물리쳤다고 여겨지고 있다. 이를 통해 한족은 황허(黃河)에서 양쯔강(長江) 하류까지 영역을 미치게 됐다. 나중에는 염제와의 전쟁도 이겨 중화민족을 최초로 통일했다고 전해진다.

중국인들은 황제가 118세까지 살고 백룡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굳게 믿는다. 떠나기 전 백성들에게는 입었던 겉옷을 기념으로 남겼다고 전설로 전해진다.

황제묘가 조성된 것은 황제가 승천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황제가 떠난 뒤 백성들은 그리움을 못 이겼다. 지금의 묘 자리인 교산(橋山)에 사당을 짓고 황제가 남긴 겉옷을 곱게 모셔 두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오늘날 황제릉에서 처음 제사를 지낸 기록은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남겨져 있다.

무엇보다 황제가 보편화된 명칭으로 굳어진 것은 진나라 때부터다. 전국시대의 분열을 통일한 진의 영정은 각국에서 사용한 대왕이나 왕보다 권위 있는 칭호를 사용하고 싶었다.

예부터 중국은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린다는 천명(天命)사상이 있었다. 영정은 상고시대 황제가 천명사상의 근원이자 천제(天帝)의 아들로 여겨지는 천자(天子)임을 주목했다.

영정은 통일제국의 권위와 역사성을 높이고자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자신은 만대불변의 제국인 진나라 첫 황제로서 '시황제'(始皇帝)라 불렸다. 시황제가 황제의 칭호와 의미를 정립한 뒤 중국 역대 왕조는 최고 군주를 곧 황제라 부르게 됐다.

전쟁 와중에서도 장제스는 황제를 기리어 직접 제문을 쓴 비석을 남겼다.
 전쟁 와중에서도 장제스는 황제를 기리어 직접 제문을 쓴 비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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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묘 대전에 전시된 황제의 족인. 후대인이 만든 상징물로 여겨진다.
 헌원묘 대전에 전시된 황제의 족인. 후대인이 만든 상징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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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릉이 국가적인 성지로 변모한 것은 기원전 2세기 한나라 때부터다. 한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 나가기 전에 직접 교산에 들러 황제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오늘날 황제릉에는 한무제가 남긴 흔적이 많다. 황제묘 앞에는 한무제가 제사를 지낸 뒤 신선에 장생불로를 기원하며 쌓은 높이 20m의 제단 한무선대(漢武仙臺)가 있다. 한무선대에서 100여m 아래로 내려오면 성심정(誠心亭)이 있다.

성심정은 한무제가 제사 전 의관을 갖추었던 곳이다. 봉건시대에는 이곳부터 임금이건 신하건 반드시 말에서 내려 복장을 단정히 하고 황제묘를 찾았다고 한다.

성심점 바로 밑에는 거대한 측백나무가 서 있다. 이 나무는 한무가갑백(漢武挂甲柏)이라 불리는데, 한무제가 제사를 올리기 전 입고 있던 갑옷을 걸어둔 나무라 전해진다. 이 일대에는 측백나무 수백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대부분 한무제의 군대가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국가 지도자가 황제릉을 찾는 전통은 20세기 들어서도 변치 않았다. 1912년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이 된 쑨원(孫文)은 사람을 보내 황제릉에서 제사를 지냈다.

1937년 시안(西安)사변 후 제2차 국공합작을 이룬 뒤 국민당 장제스(蔣介石)와 공산당 마오쩌둥(毛澤東)도 앞 다투어 황제릉을 찾았다. 장제스는 친필로 써내려 간 제문을 통해 "황제께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고 추악한 치우를 주살하여 화(華)와 이(夷)를 구분 지었다"고 남겼다.

마오쩌둥은 "황제가 위대한 창업을 하셨으나 후예들은 용맹스럽지 못해 나라를 망쳤다"며 황제의 위대함을 기리었다. 1942년 중일전쟁이 격화되는 상황 속에도 장제스는 다시 직접 글을 써 '황제릉'이라는 비석을 보냈다.

문화대혁명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鄧小平)도 1988년 '염황자손'(炎皇子孫)이라는 제문을 쓴 비석을 남겼다. 이들이 쓴 비석은 지금도 황제릉 입구 앞 정자에 모셔져 있다.

헌원묘 감실 앞에서 황제 석상을 향해 절을 하는 중국인들.
 헌원묘 감실 앞에서 황제 석상을 향해 절을 하는 중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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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절 공제 행사장으로 이용되는 헌원전. 황제릉 성역화 사업에 따라 지어졌다.
 청명절 공제 행사장으로 이용되는 헌원전. 황제릉 성역화 사업에 따라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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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 시기 돌보지 않아 황폐화 됐던 황제릉을 다시 성역화한 것은 지난 1992년이다. 중국정부는 황제릉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작업에 나섰다.

12년 동안 쏟아 부은 사업비만 무려 3억4000만 위안(한화 약 578억원)에 달했다. 황제릉 성역화에 해외에 거주하는 화교들도 발 벗고 나섰다. 황제릉기금회를 통해 내놓은 헌금만 2억 위안(약 340억원)을 넘어섰다.

2004년 오랜 대역사 끝에 황제릉은 문을 열었다. 새로이 단장된 전체 면적은 56만7000㎡에 달한다. 가히 '천하제일릉'(天下第一陵)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거대한 규모다.

성역화를 마치면서 중국정부는 오랫동안 중단해왔던 청명절 공제도 재개했다. 사회주의 정권 아래 첫 청명절 공제가 열리자, 해외 화교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2004년 공제에서는 홍콩 영화배우 청룽(成龍)이 사회를 자청하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왔다.

황제릉 보수작업이 시작되면서 해외 화교들은 옌안시 정부와 공동으로 황제묘 일대에 염황자손림을 조성했다. 과거 울창했던 황제릉 주변 산림이 문혁 시기 무차별 벌목으로 민둥산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지속된 식수사업은 황제릉 일대를 다시 울창하게 변모시켰다. 산시성 해외우호회에 따르면, 해외 화교들은 매년 100만 위안(약 1억7000만원) 이상을 식수 비용으로 헌금하고 있다. 중국정부도 식수사업을 확대해, 2010년 황제릉 외곽 지역의 산림 복개율을 24%에서 50%로 올릴 계획이다.

황제릉이 제 모습을 찾으면서 참배객도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다. 참배객 수는 1999년에는 30만 명에서 2008년에는 두 배인 60여만 명으로 늘어났다. 1992년 이래 황제릉을 찾은 대만, 홍콩, 마카오 주민과 해외 화교도 100만 명을 돌파했다.

황제묘 앞 한무선대는 한무제가 신선에게 장생불로를 기원하며 쌓은 제단이다.
 황제묘 앞 한무선대는 한무제가 신선에게 장생불로를 기원하며 쌓은 제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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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묘는 황제가 백룡을 타고 하늘에 올라간 지점에 조성했다.
 황제묘는 황제가 백룡을 타고 하늘에 올라간 지점에 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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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가 심혈을 기울여 재단장했지만, 황제릉은 그리 매력적인 관광지는 아니다. 입장료는 비싸지만 볼거리는 그리 많지 않다.

황제릉 앞은 총 면적 10만여㎡로, 거대한 광장과 호수로 꾸며졌다. 광장 바닥은 큰 조약돌 5000여 개가 깔려져 있는데, 황제부터 시작된 중국 역사 5000여년을 상징한다.

황제릉의 주요 건축물은 산문(山門), 과청(過廳), 헌원묘(軒轅廟), 헌원전(殿軒轅) 등과 황제묘다. 입구 격인 산문은 단첨헐산식(单檐歇山式) 건축물로 모두 다섯 칸이다. 단첨헐산식은 중국 고대 건축구조의 하나로, 처마가 하나이고 좌우에 네 경사면이 있고 경사면에는 수직면이 있어 추녀가 아홉 개인 방식이다.

산문의 한 칸에는 쑨원, 장제스, 마오쩌둥, 덩샤오핑 등이 남긴 제문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산문의 주위는 회랑으로, 예부터 황제묘를 찾은 사람들이 남긴 비석과 비문이 안치되어 있다.

과청 앞에는 측백나무가 많다. 그 중 괘갑백(挂甲柏)은 황제가 직접 심었다는 나무다. 높이 19m, 밑둥 둘레 10m에 달한다. 진위는 판명되질 않지만, 사실이라면 무려 5000여년 동안 세상의 풍파를 견뎌온 셈이다.

대전은 헌원묘의 주 건물로 일곱 칸이고 단첨헐산식 지붕구조이다. 대전 내 감실(龕室)에는 황제의 위패(位牌)와 석상이 모셔져 있다. '헌원묘'라 불리는 이유는 황제가 오늘날 허난(河南)성 신정(新鄭)시 서북쪽에 있는 헌원촌 일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교산 정상에 있는 황제묘가 있다. 황제묘 주변은 수천그루의 측백나무에 둘러싸여 자연 풍경이 아름답다. 황제묘는 한무선대 뒤편에 자리잡고 있다. 정자 뒤에 큰 비석 하나와 커다란 무덤 형태로 구성됐다.

비석에 쓰여진 '교산용어'(橋山龍馭)는 황제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이라는 뜻이다. 즉 시신은 없는 가묘(假墓)다.

황제묘에서 절을 드리는 단체 참배객. 중국인에게 황제는 민족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황제묘에서 절을 드리는 단체 참배객. 중국인에게 황제는 민족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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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원전 광장 좌우로 나부끼는 황색 깃발. 중국에서 노란색은 황제의 자손, 곧 중화민족을 상징한다.
 헌원전 광장 좌우로 나부끼는 황색 깃발. 중국에서 노란색은 황제의 자손, 곧 중화민족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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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에서 떨어진 거리와 그리 많지 않은 볼거리를 감수하고 황제릉을 찾는 이유는 간단하다. 황제가 중국 국체(國體)의 상징이자 한족 정체성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역대 중국 왕조는 각기 다른 통치 목표를 내걸었지만, 권력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황제의 권위를 빌렸다. 이는 중국 공산당도 다를 바 없어 황제를 민족의 구심점으로 삼으려 하고 있다. 공산주의가 통치이념에서 조금씩 퇴장하고 오늘날 새로운 국가이념이 요구되자 중국 공산당은 황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즉, 전 세계에 흩어진 중국인을 단결시키고 양안 통일을 촉진시킬 수 있는 공통이념. 공산주의가 사라지는 대륙에 새로운 종교로 정착시킬 수 있는 사상체계. 번영하는 경제에 대한 자부심을 고대의 영화로부터 찾으려는 종교적 복고주의.

이 모든 시대적 요구에서 황제를 앞세운 중화민족주의의 거센 바람이 황제릉에서 피어올라 대륙을 몰아치고 있다.

# 여행Tip

황제릉은 시안(西安)시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50분 떨어진 거리에 있다. 황제릉에 가려면 시안 기차역 앞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황링(黃陵)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는 1시간마다 한 대씩 있고, 표값은 45위안(약 7650원)이다. 좌석은 넓고 냉방이 잘되며 고속도로를 이용해 승차감도 좋다.

황제릉의 개방시간은 여름철 8:00~17:30, 겨울철 8:30~17:00이다. 입장료는 91위안(약 1만5500원)으로, 단일 유적지로는 상당히 비싸다. 헌원전에서 황제묘까지는 800여m 가량 떨어져 있다. 이 구간 사이는 셔틀 버스가 운행하여 관람객의 편의를 돕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BS U포터,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중국, #섬서, #시안, #황제, #황제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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