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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형 감옥서 나온 기념으로 간만에 저녁이나 같이 먹읍시다"

 

지난 10월 23일 보석으로 풀려난 영도형은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구속될 당시 울산 민주노총 수석 부본부장 위치에 있었던 지라 고마웠던 분들 찾아 뵈온다고 나랑 만날 시간을 잘 내지 못했습니다. 영도형은 지난 2008년 12월 24일 아침 6시 경 혹독한 추위가 엄습하던 그날 100미터 높은 굴뚝으로 미포조선 김순진 조합원과 함께 올라 갔었습니다. 그 후 2009년 1월 23일 119에 의해 헬기로 구조되기 전까지 추위와 굶주림으로 보냈었습니다.

 

영도형이 민주노총 수석 부위원장으로서 결단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미포조선 사측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6년이나 부당해고에 맞서 싸워온 미포조선 사내하청 용인기업 노동자들이 불법파견에 의한 부당해고라고 대법원 판결까지 받아 내고 복직되기를 희망하고 있었지만 미포조선 사측은 묵묵부답으로 일관 했다고 합니다. 또한 원청 노동자에 대한 부당노동행위도 극에 달해 이홍우라는 조합원이 투신후 병원에 입원 치료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병원으로 달려간 영도형은 이홍우 조합원의 유언 내용을 녹음기로 듣고서 며칠을 눈물 흘렸다고 합니다. 결국 미포조선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마지막 방법으로 100미터나 높은 굴뚝에 올라 가기로 결단 했다고 합니다.

 

119 헬기에 의해 굴뚝에서 구조 된 후 병원 치료를 받았고 지난 2009년 2월 9일 구속되었다고 합니다. 영도형을 울산 구치소에 있을 때 딱 한번 면회를 간적이 있었습니다.그리고 9개월이 그렇게 흘렀습니다. 지난 10월 23일 보석으로 풀려 났다고 하는데 먹고 살기 바쁜 나는 11월 중순경에야 석방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날잡아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싶었습니다.

 

지난 1989년 현대목재라는 회사 다닐때 같은 공장에서 일하며 알게 된 인연이 벌써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내가 아는 한 영도형은 '법 없이도 살 사람'입니다. 이번에 감옥 간 것도 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당 대우를 받고 있어 그들을 돕다가 그리 된 것입니다.

영도형은 항상 그렇게 자신 보다는 다른 사람의 부당함을 그냥 못넘기는 탓에 여러차례 감옥에 들어 갔다 온 것입니다. 도대체 몇 차례나 감옥 갔다 온 것일까요? 또, 그때 당시 감옥과 지금의 감옥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감옥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궁금해서 저녁 같이 먹자고 만난 영도형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영도 형은 그동안 몇 번 이나 감옥 갔다 왔어요?"

"이번 2월 9일 구속 된 게 다섯 번 째 지. 현대목재 입사해 일하고 있을 때였지. 왜 거 있잖아 87년 7월 현대엔진에서 촉발된 노동자 대투쟁 말이야. 그 이후 회사에서 식물노조를 만들었어. 우리도 노조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었고 그때 앞장 섰다가 89년 7월 경인가 암튼 여름이었어. 세월이 하두 흘러 정확한 날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야. 기숙사에 있었는데 아침에 출근하던 중에 갑자기 경찰들이 막아서며 나와 동료 3명을 잡아 가더니 구속 시켜 버리더구만. 가을쯤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동료 조합원들과 같이 석방 되었지. 그게 첫 감옥살이 였었어.

 

두번째 감옥살이는 90년 3월 경에 시작하여 약 2년 정도 감옥에서 지냈어. 처음 구속 당시 집행유예가 있었거든. 두번째 구속은 좀 더 복잡해. 89년 가을쯤 석방되었는데 겨울쯤 위원장으로 발탁되서 활동하게 되었지. 왜 창기도 잘 알잖나. 그때 자본과 정권의 노동탄압이 극에 달한거.... 그래서 민주노조진영은 전국 민주노동조합 협의회(전노협)를 만들자고 힘을 모아 나갈 때였어. 그땐 지금보다 더 살벌했어. 정부는 노조에 대한 업무조사권을 수시로 발동시켜 탄압을 일삼았지. 그야말로 공안정국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그렇지만 정경유착이 아주 노골적인 시절이었지. 그럼에도 민주노동진영은 단위노조의 한계를 넘기 위해서는 전국노동조직의 필요성이 절실했고 나도 그게 옳다고 보았어.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쪽 방향으로 활동하게 된것이고. 사측과 경찰은 그게 못마땅 했던거지. 마침 그때 회사내에서 큰 사건 하나가 터졌잖아. 창기도 알지? 김해석이라고... 그 사건 때문에 사측에서 하는 한마음 교육도 못하게 막았잖아. 그랬더니 회사에서 기다렸다는듯이 업무방해,폭력 등의 혐의로 고소당했고 바로 잡혀 갔지 뭐. 2개월 남짓 위원장직 수행하다가 바로 잡혀가 한 2년간 감옥생활 했어. 91년 12월 쯤 나왔지. 그리고 92년 3월에 해고자 신분으로 명숙씨랑 결혼식을 올렸었지. 해고자로 신세로 지내다 94년에 가서야 복직 시켜 주더구만.

 

김해석 조합원 문제에 대하여
해석이는 부모가 누군지 모릅니다. 고아원에서 자라 성년이 되었고 현대목재에 입사하여 다녔습니다. 1990년 1월경이었습니다. 20대 초반의 앳된 젊은이 였지요. 해석이는 나랑 같은 반에서 작업 했습니다. 해석이는 로울러에 2겹 나무를 넣어 접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악! 하는 비명 소리에 놀라 달려 가보니 이미 롤러에 팔이 깊숙히 들어간 채로 계속 롤러가 돌고 있었습니다. 나도 그때 회사 들어간지 얼마 안된터라 기계 끄는 법을 몰랐습니다. "아저씨 큰 일 났어요" 다른 아저씨에게 달려가 말했더니 얼른 와서 기계 작동을 멈추게 했습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롤러 사이로 팔이 들어 가면서 근육이 터져 피가 나오고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모여 롤러 사이를 벌리고 팔은 꺼냈으나 뼈가 으스러 졌는지 팔을 쓰지 못했습니다. 잠시후 사측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나중에 보니 팔꿈치 전까지 뼈가 으스러져 그는 한쪽 손이 완전 쓸수 없게 되었습니다. 손가락과 팔목도 쓸수가 없었습니다. 영도형은 위원장으로서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당시 현실로 그의 한쪽 팔 완전 장애가 된 보상금은 매우 작았습니다. 나도 그가 안스러워 우연찮게 알게된 지성수 목사님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목사님은 이양원 변호사님을 소개 시켜주셔서 찾아가 상담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회사에서는 보상금 3천만원을 제시 했으나 젊은 그가 평생 먹고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여겨 보상을 더 받을수 없는지 알아보려 서울까지 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변호사님도 그것으로 만족하라 했습니다. 그 친구는 참 착한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돕고 싶었으나 서글프게도 현실은 그게 다였습니다. 그는 회사에서 주는 보상금과 퇴직금 등을 받고 곧바로 퇴직하였습니다. 벌써 20년 전 일입니다. 이제 그도 40대 초반 나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해 집니다. 잘 살고 있는지....

 

세번째 감옥살이는 2001년 초여름 쯤 될거야. 그때 난 민주노총 울산 부본부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어. 효성 사측이 말도 못하게 노조를 탄압해 들어 왔어. 효성노조는 민주노총 울산본부 소속노조 였거든. 그래서 지원 투쟁 나선거야. 그때 지원 업무를 내가 맡아보게 된거지. 마침 선거를 통해 민주노조가 들어섰고 그때 또 효성 사측은 인력감축 구조조정을 계획하고 있었던거야. 그런데 민주노조가 건설되니 걸림돌 될거 아니겠어? 그래서 사측이 강경한 입장으로 나가 노조 와해를 기도하게 된 거고. 사측과 대화가 안되더라고. 노조를 불인정 하는거야. 게다가 있잖아. 용역 깡패들을 공장으로 모아 놓고 대치 하더군. 그들 손에 들려 있는게 뭔지 알아? 나중에 확인 된 것만 해도 가스총, 전기충격기,식칼 같은 무기야. 그런 것들로 무장시켜 놓고 파업농성 노동자들을 위협 했어. 당시 울산시장이 막후 중재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지. 결국 공권력이 투입되고 파업농성 노동자는 모두 회사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어. 나는 그들과 함께 회사와 정부의 공권력 투입에 항의하는 시위를 주도 했었지. 그때 수배되어 있다가 집 근처에서 잠복중이던 경찰에 잡혀 갔었지. 그때 효성노조 조합원도 20여명 이상이 구속 된 것으로 알고 있어. 난 1심에서 2년 6개월 형 받았고 2심에서 6개월 감형 되었어.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4년 선고 받고 감옥간지 6개월만에 풀려 났어.

 

네번째 구속은 2006년 여름 이었어. 내가 여러번 수배도 되어 보고 구속도 되어 봤지만 네번째 구속은 정말이지 억울 하더라고. 지금 생각해도 억울한 감옥살이였어. 2005년 말 민주노총 울산지역 수석부본부장 후보에 출마해서 당선 되었었잖나. 그리고 2006년 여름에 포항에서 일이 한건 터졌어. 포항지역 건설노조가 투쟁 중이라고 지원 요청이 온거야. 연일 집회와 시위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한 날 포항건설노조 조합원 중 한사람이 경찰의 과잉진압 중 사망하는 사건이 터졌어. 경찰이 그래 놓고 계속 발 뺌 하니 말이 안되는 거잖아. 그래서 민주노총 차원서 강경 대응 하기로 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규탄집회를 열었지. 거기에 울산지역본부도 인원을 규합해서 올라 가게 된거지. 집회가 거의 마무리 될즈음 다시 울산 내려 가려고 집회장을 빠져 나와 울산 가는 대절버스 있는 곳으로 이동 중이었지. 그런데 경찰이 무리지어 우리 앞을 가로 막는거야. 이유가 깃발 내놔라 이거야. 경찰이 우리 깃발을 빼앗아 갈 이유가 없잖나. 그래서 못주겠다니까 갑자기 여럿이 달려들어 날 마구 때렸어. 강제로 경찰차에 태워 경찰서로 끌고 갔어. 그리고 조사후 바로 구속 시켜 버리더군. 뭐 그런 구속이 다 있는지 참 어처구니가 없었지. 그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이라는 판결을 선고 받아야 했어. 그렇게 4개월 만에 풀려 났어."

 

"그럼요. 옛날 감옥과 요즘 감옥 어떻던가요 차이가 많이 나던가요?"

 

"세상이 많이 변한것처럼 교도소 안도 많이 변했어. 내가 80년대 부터 경찰서에 들락 거렸잖나. 그 땐 울산엔 구치소란게 없었지. 남부서 대용감방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었어. 시설도 열악하고 운동과 일조권 행사도 불가능 했지. 남녀가 따로 감방시설이 되어 있었지만 서로 마주보고 있었거든. 여성 재소자들이 남자 재소자들의 희롱에 고충이 많았지. 그러다 90년 후반에 가서야 울산에 교도소가 생겼지. 그 후로 시설과 교정 행정이 많이 개선 되고 있는 상태야.

 

그 땐 필기구 소지도 불가능했어. 사동 복도에 나가서 편지를 써야 했지. 편지 쓸 사람들이 줄을서서 대기중이어서 아주 잛은 시간에 편지를 써야 하는데 시간 제약이 많았지. 창기도 내 편지 받아 봤잖아. 그렇게 엽서처럼 한장짜리에 글 쓰는 것도 서둘러 써야지 안그러면 다음 기회에 나와 나머지를 써서 보내야 했지. 지금은 거실 내에서 아주 자유롭게 집필이 가능해. 각종 필기구와 공책, 우표, 편지지 등을 자유롭게 구입하여 사용할수 있게 되었지. 세상 참 많이 변했어.

 

화장실 문제도 거론 해야 되겠네. 그 땐 화장실이 푸세식이었어. 냄새도 많이 났고 날파리와 벌레들이 우글 거렸지. 그 땐 똥누는 것조차 참 곤욕이었지(웃음) 하지만 지금은 어떤지 알아? 수세식으로 모두 바뀌어 있더라고. 아주 깔끔하고 냄새 전혀 나지 않아. 아주 좋아.

 

접견 문제도 있네. 그 땐 내가 부산구치소에 있었는데 거기선 5분 정도 시간을 주었지. 하루 1회의 접견을 허용 했었어. 지금 울산구치소는 10분 정도 주지. 그리고 인터넷으로 화상 접견도 가능 해졌어. 하지만 예전엔 약정 시간은 5분이지만 시간을 더 주곤 했었는데 요즘은 완전 기계식 시스템을 갖추어 대화 도중 시간 지나면 자동으로 끊어저버려 안과 밖의 말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교도소도 인간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렸어.

 

교도소에도 운동 시간이 주어지는데 여럿이 있는 곳은 30분 주어지고 독방에 있는 사람들은 1시간 주어지지.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운동 기구는 일체 지급 금지야. 걷거나 맨손 체조 뭐 그정도지. 공차기는 불가능해. 공이 없어서.

 

그 땐 교도소 내 재소자들 간 폭력이 빈번하게 일어 났어. 지금은 거의 일어나지 않더라고.

 

우리가 지내는 거실의 시설이 그 땐 텔레비,선풍기 정도 였지.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나 선풍기도 있고 싱크대도 있어서 설겆이 하기에 좋은 상황이 되었어.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재소자들이 너무 비좁게 지내. 내가 있던 방도 91명이나 되었는데 바로 누워는 못 자.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어. 방에 인원수를 줄이든지 방  평수를 넓혀 주던지 해야지. 아무리 감옥이라지만 인권 차원에서 아직 고칠게 많더라고."

 

"징벌방이라고 있다던데요. 그건 무슨 방이길래 그런 두려운 방이름이 생겼나요?"

 

"응, 징벌방......내가 감옥안에 있을 땐 그랬지. 혼거방 생활에 적응이 안되어 독거실로 전실을 요구하면서 입방을 거부할 경우, 거실 내에서 재소자들 간 다툼이 벌어졌을 경우, 허용되지 않은 물품을 만들어 소지하고 있을 경우 등 다양한 이유로 징벌을 받게 되는 데 징벌 집행되면 징벌방에 갇히게 되지. 흔히 하는 말로 독방신세가 되는거야. 징벌방에 갇힌 재소자는 여러가지 불이익이 뒤따라. 가령, 접견권 제한, 운동 제한, TV시청 제한, 신문구독 같은게 제한 되어 버려. 그리되면 이중 감옥을 사는 느낌이 들어. 비참 해. 그래서 제소자들 모두가 징벌 당하는 걸 두려워 해. 징벌이 남용 되는 면도 없잖아 있는거 같아. 개선 되어야 할 사안 중 하나지."

 

"감옥살이 해보니 어떤 점을 개선 시켜야 할거 같던가요?"

 

"개선 시켜야 할게 아직 많지. 우선 접견 문제야. 접견이 현재 낮에만 이루어지고 있잖아. 낮엔 모두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데 언제 접견 와보나? 가난한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잖아. 재소자나 가족들 입장에서는 야간 접견이 허용되면 아주 좋지.

 

일반 재소자들은 보면 검찰 조사시 수갑을 찬 채 조사받고 있어. 이유를 모르겠어. 왜그런가. 이것은 아주 부당한 처사야. 아무리 범법자라도 인권은 있잖아.

 

교도소 안에서는 별로 할일이 없어. 있어봐야 책 읽는게 고작이지. 근데 문제는 도서실에 대한 지원책이 전혀 없다는 거야. 책이래봐야 재소자들이 나갈때 놓고 간 책이나 기증받은 책이 대부분이라 볼 것도 별로 없는 형편이야. 또 독서를 지도하는 공무원도 없어. 재소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책은 없거든. 자기 돈으로 사봐야 하는데 대다수 가난한 신분들이라 책 사볼 돈이 없어. 내 생각엔 지역 내 도서관과 구치소 간 협력협약을 맺어서 지원 받으면 좋을듯 싶어.

 

일단 구속되고나면 여러 면에서 자유롭지 못 해. 그래서 재소자 대부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이를 해소 하도록 하는 교도 행정이 필요 해. 가령 소 내 노래방 시설 같은 것이 사동마다 설치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거야.

 

또, 재소자 중에는 검정고시 등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거든. 재소자 중 학습지도가 가능한 사람 있으면 같은 거실에 생활토록 배려해서 함께 공부할 분위기 조성을 해주는 것도 좋겠는데 아직 행정력이 거기까지 못미치나봐. 전혀 무방비 상태야.

 

아무리 재소자라 해도 행복권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봐. 재소자라고 외모에 신경 쓰지 말라는 법 없잖아. 외모 중 가장 신경 쓰이는게 머리 모양인데 머리 깎거나 손질해줄 사람이 없어. 이미용사 협회에 의뢰해서 자원봉사를 보내서 이발도 해주고 미용도 해주는 교도 행정이 절실 해.

 

가장 안타까웠던 점은 재소자와 교도소 측의 신뢰관계가 전혀 없었어. 그렇게 서로 불신만 쌓고 있는데 국가에서 말하는 교정,교화활동이 제대로 되겠냐고. 문제는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을 통제나 재약의 대상으로만 보고 있는거 같았어. 그럴게 아니라 재소자를 도움을 주고 도움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인식전환이 필요하지. 그래야 국가의 교도소 정책인 교화와 교정 행정이 제대로 될수 있지 않나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어."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요?"

 

"모두 다섯 차례 구속되어 있으면서 많은 재소자를 만났고 많은 것을 느꼈어. 그래 가정과 주변 상황이 정리되고 안정되면 일반 재소자와 그 가족돕기 일을 한번 해보고 싶어. 범죄 행위가 있어 구속된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들은 우리 사회의 약자 중 약자야 대부분. 1차적으로는 범죄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지만 사회적 책임도 적지 않다고 생각 해.  국가가 수감 생활 후 사회복귀와 적응을 제대로 지원하지 않음으로써 범죄가 반복되는 측면이 상당하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지. 그들은 자신에 대한 존대감이 상대적으로 약하고사람과 사회에 대한 불신도 깊은 데 누구도 이를 헤아려 지원하거나 돕지 않고 있지 않고 있는게 현실이었어. 참 불쌍한 사람들이지. 범법자란 이유로 가정과 사회, 국가로부터도 버림 받는 형국이니 말이야. 그들은 재범 가능성을 상당히 않고 사회에 복귀할 경우 그것은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들에게도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지 안그래? 따라서 교정,교화 사업을 제대로 하는 것은 그들과 사회 모두를 위해 바람직하다 생각하고 있어.

 

  특히 가정 경제를 책임지던 사람이 구속되었을 경우 가족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상당한 고통을 감내하게 되고 당사자도 이로 인한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지 않겠나? 재소자와 그 가족들은 특별히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어서 특별한 도움과 지원이 절실한 사람들이야. 그런 일을 국가차원에서 해야 하는데 잘 못하고 있으니 나라도 그런 일을 추진 하면서 정책과 교정행정의 개선을 촉구하려는 거야. 내가 직접 그런 일을 하면서 주장하면 당사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도 할 뿐더러, 개선 요구에도 힘이 실릴 것이라고 여기지."

덧붙이는 글 | 자신의 안위보다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앞장서는 사람은 타고난 천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도형 처럼 말이다. 장시간 대화에 응해준 영도형께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영도형이 계획하고 있는 재소자를 위한 인권 개선 사업이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도소를 출소한 어떤 분은 교도소를 가리켜 '재범 양성소'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국가 차원의 구조화된 모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도형의 활략이 교도소가 재범 양성소가 아니라 좋은사람 만드는 학교로 거듭나기를 바라 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서로 사랑으로 보듬지 않고서는 교도소가 여전히 두려움과 고통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국가 차원의 애정어린 교도 행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사안입니다. 주먹구구식,건성건성이 아니라요.


태그:#현대미포조선, #이영도, #교도소, #감옥, #구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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