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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맛이 없다. 아침 일찍 백두산에 올랐다가 천지의 티끌도 보지 못하고 하산한 우울함이 온몸을 송두리째 억누르고 있으니, 괜찮게 차려진 점심 식탁이라는 주변의 평판에도 아랑곳없이 뽀얀 쌀알조차 그저 돌부스러기요, 저절로 군침이 돌 만한 먹음직스러운 국물까지도 오로지 소태일 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지만, 나는 백두산 아래에서 문득 밥맛을 잃은 것이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했던가. 그러나 나는 지금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말이 정말 진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1,300계단을 오르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몸이 아프거나 연로한 노인들을 위해 유료 가마가 운행된다.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라 등반객이 드문 탓인지 가마들이 계단 주위에 널부러져 있다. 안개 속으로 천지 가는 계단이 까마득하다.
▲ 가마를 타고 1,300계단을 오르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몸이 아프거나 연로한 노인들을 위해 유료 가마가 운행된다. 오늘은 비가 오는 날이라 등반객이 드문 탓인지 가마들이 계단 주위에 널부러져 있다. 안개 속으로 천지 가는 계단이 까마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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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술 억지로 뜨다말고 이내 숟가락을 놓고는 다시 백두산을 오른다. 이번에는 서파로 가는 등정이다. 역시 차량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서파로 오르는 길은 오전에 갔던 남파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한다. 남파처럼 차에서 내리면 곧장 탄탄대로로 얼마 아니 이동하여 천지를 조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주차장에서 출발하여 정점까지는 무려 1,300여 계단을 숨가쁘게 딛고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오후이기 때문에 막차를 타고 내려오려면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내려야 한단다. 그 말을 듣더니 몇몇 나이 많은 관광객들은 크게 걱정에 사로잡힌다. "그렇지 않아도 관절이 좋지 않아 마을 앞산에도 못 올라갔는데 중국까지 와서 무슨 계단을 1,300개나, 그것도 어떻게 빨리 오른단 말이고!" 그러자 일행인 듯한 다른 노인이 말한다. "가마로 태워서 천지까지 날라주는 것도 있단다."

비도 그치지 않고, 안개까지 여전하다. 그래도 나는 오른다. 여기까지 와서 천지를 보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 이은상의 노래를 떠올린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양사언의 시조도 잊지 않고 기억에 되살아난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물론 중국의 태산은 백두산 정상에 비하면 높이가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사언의 시조에 태산이 등장한 것 자체가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견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태산은 상징이기 때문이다. 시조 속의 태산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가리키는 문학적 수사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해발에서 시작하여 백두산 서파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정상 가까이까지 차량으로 이동한 후 계단만 1,300개 오르는 등반을 하는 것이므로, 실제로 오르막을 타는 것은 태산이 아니라 그저 앞산 오르는 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이 길어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 정도 높이 앞에서 망설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누군가가 소리친다. "자, 출발이다!"

1,300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비가 내리는 속에서 올라야 한다. 지금 1/5 가량 왔다는데 숨이 차다.
▲ 서파의 계단 1,300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비가 내리는 속에서 올라야 한다. 지금 1/5 가량 왔다는데 숨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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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안개를 뚫고 앞으로, 위로 나아간다. 비닐 우의를 덮어썼으니 당장 빗물이 옷을 적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점점 추워지고 몸이 싸늘하게 내려앉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여느 때라면 산을 오를수록 땀이 나야할 일이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반대인 것이다. 게다가, 자욱한 안개 사이로 희끗희끗 드러나는 좌우의 절경이 더욱 사람의 마음을 한탄스럽게 하니, 시간이 흐를수록 빗길을 걷는 안타까움은 점점 애잔하고 짙어진다. 비와 안개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드러나는 풍광도 저처럼 경이로운데 날씨가 좋다면 얼마나 멋진 장관을 눈에 담을 수 있을 것인가. 힘들게 발을 옮겨놓으며 나는 자꾸만 '내가 왜 이리 운이 없나'하는 마음속 장탄식을 되풀이한다. 어제만 해도 얼마나 맑은 날씨였던가.

올라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내려오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다. 우리 일행은 넷인데, 올라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도 불과 열 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비린내 독한 스프레이라도 뿌린 듯이 차갑고 칙칙한 안개가 비바람과 함께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는 이런 악천후에 누가 꾸역꾸역 천지를 오를 것인가. 천지를 볼 가망성이 전혀 없는 날씨에 이렇듯 무모하게 등반을 계속하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한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아니야!'하고 부르짖는다. 지금 이 순간, 머릿속에는 남이(南怡) 장군(1441-1468)이 꽉 들어찼기 때문이다. 안개가 얼굴에 닿을 때마다 악취처럼 살갗을 후벼파는 비린내에 시달리다가 문득 장군의 시조 한 편을 떠올린 까닭이다.

長劍(장검)을 빼어 들고 백두산(白頭山)에 올라보니
大明天地(대명천지)에 腥塵(성진)이 잠겼어라
언제나 南北風塵(남북풍진)을 헤쳐볼꼬 하노라.

나이 불과 20대에 지나지 않는 장군은 지금 '비린내나는 먼지[腥塵]'에 묻힌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이 '어지러운 세상[腥塵]'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미끄러운 돌계단을 1,300개나 빗속에 내려 걷는 일은 정말 위험하다. 저 사람을 보니 하산을 앞둔 내 가슴도 답답해진다.
▲ 가마에 실려서 내려가는 관광객 미끄러운 돌계단을 1,300개나 빗속에 내려 걷는 일은 정말 위험하다. 저 사람을 보니 하산을 앞둔 내 가슴도 답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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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파 오르는 길은 1,300개 돌계단

백두산 정상 주변은 하루에도 수십 번 날씨가 돌변한다니, 지금은 이 지경일지라도 곧 이슬처럼 청아한 천지를 보게 될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이렇게 자위를 거듭하면서 나는 비바람과 안개를 헤치고 줄기차게 앞으로, 위로 나아간다. 비록 남이장군처럼 국가의 중대사를 목전에 두고 천지를 등반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마음먹은 일을 중도에 쉽게 포기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다.

그렇게 마음을 달래는데, 홀연 사람의 정신을 뒤흔드는 장면이 돌출한다. 누군가가 가마에 실려서 내려오고 있다. 아하, 아까 계단 주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물건들이 바로 가마였구나. 그제야 나는 이 험악한 1,300계단을 오를 엄두를 내기 어려운 고령의 아낙네나 병자들이 가마에 실려 정상까지 오간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돈으로 5만원을 주면 두 가마꾼이 한 사람의 관광객을 달랑 가마에 얹어 주차장에서 천지까지 오르내린다더니, 지금 목격하는 것이 바로 그 이야기로다.

하지만, 문득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두려움이 있다. 이 빗길에 내려갈 때는 어쩐단 말인가. 본디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훨씬 위험한 법인데, 빗물과 안개로 뒤범벅이 된데다 돌계단이라 미끄럽기가 한정이 없는데, 과연 무사히 주차장까지 하산할 수가 있을까. 걱정에 걱정이 겹치면서 머리가 가없이 무거워지고 눈동자까지 아파온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마침 내려오는 사람 중에 한국인이 있어 그에게 물으니 '천지가 바로 저긴데' 한다. 고개를 드니 희끗희끗하게 뭔가가 시야에 들어온다.

"다 왔다!"
기쁨에 겨워 환호성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계단이 끝나고 '천지'라 새겨진 안내판이 우리를 반겨준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이번에는 글씨가 희다. 아까 남파에서 본 돌비석에는 녹색 글자 '天池'가 있어 사람을 놀라게 하더니, 이번에는 무슨 영문인지 흰 빛깔의 글자가 나무 입간판에 새겨져 있다. 글씨 색깔이 다른 걸 못 본 것인지, 아니면 그런 건 신결 쓸 가치가 없는 사소한 잡동사니라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천지에 도달하였다는 감격에 듬뿍 젖은 탓인지, 일행들은 다투듯이 와르르 달려가 그 입간판 앞에 선다. 비가 오고 안개가 짙은 것을 피하려고 비닐 비옷으로 온몸을 감쌌으니 말을 하기가 불편한 까닭도 있어 아무도 말은 하지 않지만, 그렇게들 '천지' 글자를 부랴부랴 둘러싸는 빨리 사진을 찍으라는 뜻이다.

뒤에 뿌옇게 보이는 곳이 천지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 천지는 보이지 않고 '天池'만 보인다 뒤에 뿌옇게 보이는 곳이 천지이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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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기념 촬영은 해야 한다. 비닐 비옷을 입고.... 그러나 실제로는 이 사진이 훨씬 좋다. 천지가 엉거주춤하게 보이는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흔하지만, 이런 사진은 보기 어렵다.
▲ 천지를 배경으로? 아니, 안개에 파묻혀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기념 촬영은 해야 한다. 비닐 비옷을 입고.... 그러나 실제로는 이 사진이 훨씬 좋다. 천지가 엉거주춤하게 보이는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흔하지만, 이런 사진은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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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 뒤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천지의 풍경은 단 한 오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냄새나는 모기약 같이 뿌연 안개만 자욱할 뿐이다. 혹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면 행여나 뭔가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싶은 마음이 없지도 않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단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가려 드는 사람은 없다. 이미 빨랫줄 같은 금지선이 가로막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불과 50cm 앞이 천지로 떨어지는 절벽인 줄은 단숨에 느껴지는 까닭이다. 하릴없이 우리는 앞만 멍하니 바라본다.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천운을 기대하면서 여기까지 숨가쁘게 올라왔건만, 야속하게도 백두산은 손톱만큼의 천지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고 있다. 노자영(盧子泳)은 수필 <창공무한록(蒼空無限錄)>에서 '백두산 절정에 올라 그 웅장한 천지에 어린 하늘 그림자를 바라볼 때, 또는 하늘의 구름이 천지에 가로 비침을 볼 때, 나는 비로소 하늘의 웅대함을 깨달았다.'라고 감탄했는데, 어째서 하늘은 이렇듯이 불공평하단 말인가.

고개를 돌려본다. 그렇구나. 역시 하늘은 불공평하지 않구나.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 청명한 날씨라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국경 표지판이다. 안개에 가려진 국경 표지판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오직 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이  국경 표지석뿐이니, 국경 비석은 오늘 최고의 관광 명소, 가장 눈부신 경치로 단숨에 격상되고 있다. 사진을 찍어 국경 표지석만 화면에 나타나도록 할 수 있는 날은 오늘 같은 날씨뿐인 것이다. 오늘이 아니면 언제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인가. 연속으로 셔터를 정신없이 누르던 중에, 문득 바로 옆에 어김없이 세워져 있는 경고성 입간판도 본다. 윗부분에는 중국어로, 아랫부분에는 조선어(북한 어투)로 뭔가가 적혀 있는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탓에 읽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이 진기한 풍경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니, 바짝 다가서서 촬영도 하고, 육안으로 읽어도 본다.

천지에도 국경이 있다는 슬픈 사실을 확인하는 경고판.
▲ 국경의 경고판 천지에도 국경이 있다는 슬픈 사실을 확인하는 경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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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바탕 위에 고딕체로 쓰인 붉은 글자들은 '어떤 조직과 개인은 국경 지역에서 제사 례배 앉아버티기를 금지해야 한다'이다. 우리식으로 읽자면, '어떠한 조직과 개인도 국경 지역에서 제사, 예배, 농성을 해서는 안 된다'이다. 단군이나 광개토대왕 등을 기리는 제의 행사를 해서도 안 되고, '여기는 우리땅'이라며 집회를 가져서도 안 된다는 뜻이다. 다 읽고 나니, '이 경고문은 비록 조선어로 쓰였지만 사실은 중국의 명령 아닌가?'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면서 울컥 눈시울이 젖어든다. '백두산 내린 물이 압록강이 되었도다/ 크고 큰 천지에 분계(分界)는 무슨 일고/ 슬프다 요동 옛땅을 뉘라서 찾을소냐'하고 노래한 강응환(姜膺煥, 1735-1795)의 심정이 그대로 심장을 터질 듯 압박해온다. 두 손으로 국경표지석을 붙잡고 그냥 안개와 비에 젖어들고 있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소리친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막차 못 타요."

서둘러 사진을 찍는다. 특히 국경 비석을 사방에서, 아래에서 위로, 심지어는 위에 올라가 아래로 내려다보며 안개 속 천지 일대 풍경을 '팍팍팍!' 찍는다. 오전에 남파로 올랐을 때나 마찬가지로 비와 안개는 국경 수비대를 철수시켰다. 자꾸 자꾸 사진을 찍느라 경황이 없는데, 재촉하는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크게 비닐 우의를 뚫고 들어온다.
"여기는 사람 기다리지 않아요, 버스가 그냥 가버립니다. 그럼 걸어서 하산해야 해요. 죽어요."
왜 이 돌을 여기서 보아야 하나?
▲ 국경 비석 왜 이 돌을 여기서 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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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백두산, #천지, #서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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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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